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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대하여

밀란 쿤테라 <농담>

by leegang


그때, 나는 루치에를 처음 보았다.

그녀는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극장의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


그곳을 떠나 창구로 이어지는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다. 그토록 나를 매혹시켰던 것은 루치에의 그 특이한 느림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둘러 돌진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란 없다고, 무언가를 향해 초조하게 손을 내미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체념한 마음을 발산하는 그 느림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그 아가씨가 매표소로 가서 동전을 꺼내고, 표를 사고, 관람실을 한번 보고는 다시 마당으로 나오는 동안 계속 나로 하여금 그녀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게 했던 것은 아마도 정말로 그 우수로 가득한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등을 돌리고 서서 마당 너머로 멀리 작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정원과 시골집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너머로는 흙빛 채석장이 시야를 가로막아 버렸다. (나는 이 마당을, 그 어떤 세세한 부분들조차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조그만 여자 아이가 집 계단에 꿈꾸듯 앉아 있는 이웃집 마당과 이 건물의 마당 사이에 놓여 있던 쇠창살 울타리를 기억한다. 그 집 계단이 한쪽 벽에 붙어서 나 있고 거기에 빈 화병 두 개와 회색 냄비 하나가 놓여 있던 것을 기억한다. 채석장 바닥을 굽어보고 있던 연기에 싸인 태양을 기억한다.)

6시 10분 전이었는데, 그것은 영화가 시작되기까지 앞으로 10분이 더 흘러갈 것임을 뜻했다. 루치에는 돌아서더니 서두르지 않고 마당을 나가서 거리로 향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갔다. 내 뒤로 오스트라바의 황폐한 벌판의 그림이 닫혀지고 이제 다시 도시의 거리였다. 오십 보 앞에는 잘 관리된 작은 광장이 나 있었는데. 거기에는 벤치도 몇 개 있고 아주 조그만 공원도 있었으며 또 고딕풍 흉내 낸 붉은색 건물이 비스듬히 살짝 빛을 발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루치에를 관찰했다. 그녀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단 한순간도 그녀의 느림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자칫하면 거의 그녀가 천천히 앉아 있었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고 전혀 움직이지도 않았다. 마치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또는 무언가에 너무 사로잡혀 주위의 일을 완전히 잊은 채 자기 내면으로만 온통 집중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내가 그녀 주변을 배회하고 세세히 살피면서도 그녀가 눈치를 채지 못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래서였을 것이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들을 잘한다. 나는 사랑이 자기 자신의 전설을 만들어낸다거나 그 시작을 나중에 신비화시키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 그것이 그렇게 돌연히 불붙은 사랑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분명 어떤 예시 같은 것이 있었다. 루치에의 본질, 아니 - 아주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면 - 나중에 루치에가 내게 어떤 사람이 되었는데 그 루치에의 본질, 나는 그것을 한순간에 즉시 깨달았고 느꼈고 보았던 것이다. 마치 누가 밝혀진 진리를 가져와 보여주듯이, 루치에가 내게 가져와 드러내 보인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나는 그녀를 계속 바라보았다. 시골풍의 파마를 해서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부스스하게 퍼져 있었다. 다 닳고 터무니없이 짧은 밤색의 초라한 외투도 보았다. 은근히 예쁘고, 예쁘게 은근한 겸허를 느끼고 있었고, 그것이 바로 내가 필요로 하는 가치들임을 느꼈다. 나는 우리가 아주 가까운 사이인 것 같기까지 했다. 그냥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네기만 하면 될 것 같았고, (마침내) 그녀가 나를 보게 되는 순간, 마치 여러 해 동안 못 본 형제를 갑자기 만나기나 한 듯 미소 지어 줄 것만 같았다.


루치에가 그때 고개를 들었다. 시계탑에서 시간을 보는 것이었다.(이 동작은, 영원히, 내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다. 손목에 시계를 차고 있지 않아 자동적으로 언제나 시계 앞에 앉는 아가씨의 동작).


밀란 쿤테라 <농담>





위 문장은 루드빅이 루치에를 처음 만난 순간의 장면을 묘사한 대목이죠. 혼돈과 불안과 잡념과 부조화를 끌어안고 있던 그가 만난 햇볕 같은 하루. “그날 저녁부터 내 안의 모든 것이 변화했다. 내 안에 다시 누군가가 살게 된 것이었다. 나의 내면은 마치 방처럼 휙 청소가 되고 어떤 사람이 거기에 살게 되었다. 여러 달 전부터 바늘이 마비된 채 벽에 걸려 있던 시계가 갑자기 다시 똑딱거리기 시작했다.”라고 회상하거든요. 그녀 때문에 갑자기 부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외출 허가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고 했으니까요. 하루하루의 나날들이 루치에를 만나러 가기 위해 올라가는 사다리의 계단이 되었다, 고 했고요.


루드빅에게 루치에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런 날, 그런 사람, 혹 갖고 있지 않나요. 잊히지 않는 한 장면 한 순간 한 공간. 그곳의 냄새와 빛깔과 온도와 그 순간의 모든 감성을 아우르는 밑그림까지도요. 김애란의 소설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에서도 사랑의 힘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묘사한 부분이 있어요. 눈치없고 게을렀고 책임감없고 불성실한 용대는 집안의 천덕꾸러기였지만 사랑하는 여자 명화에게만은 최고의 사람이 되려고 애쓰거든요.


<농담>에서 제가 뽑은 문장이 겨우 이 수준이네요. 저는 어쩔 수 없는, 조직적이지 못한 사람. 말랑말랑하고 소심한 감성의 소재를 빼면 남는 게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인 걸까요? 굵직굵직한 주제를 드러낸 조직적인 모든 문장을 차치하고 뽑은 문장이 기껏 이것이라니요.


“친구들을 피해 혼자서 밖으로 나갔다. 오스트라바 외곽 지역들을 꼬불꼬불 이어주는 낡은 협궤 전차를 타고 아무 데로나 그냥 실려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무 데서나 내려, 역시 그냥 아무 노선이나 다른 전차를 바꿔 탔다. 이 끝도 없는 오스트라바 변두리, 공장과 자연, 벌판과 쓰레기더미, 나무들과 탄광의 잿무더기, 커다란 건물들과 조그마한 농가 등이 기이하게 한데 섞여 있는 그 변두리의 풍경 전체가 내 눈길을 끌었고 이상하게 마음을 흔들어 산란스럽게 했다. 나는 전차에서 내려 오래 걷기 시작했다. 거의 마음을 온통 빼앗긴 채 이 기이한 풍경을 바라보며 그 의미를 해독해 내려고 애써 보았다. 이렇게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마구 뒤섞인 풍경에 통일성과 질서를 부여해 주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루드빅! 오스트라바 변두리 공장과 자연, 벌판과 쓰레기더미, 나무들과 탄광의 잿무더기 조그마한 농가를 바라보며 자신이 처한 현재를 해독하려 애썼을 그 순간들. 그때 불쑥 나타난 루치에를 향한 시선. 무려 3부는 거의 다 루치에를 만난 장면을 이 소설은 묘사하고 있죠.


"사실상으로는 자연과학대학에서 진짜 모라비아 사람은 나 하나였으며, 그것이 여러 가지 특권을 가져다주었다. 회합이나 축제, 노동절 등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동지들은 내가 클라리넷을 뽑아 들고 학생들 가운데 뽑힌 두세 명의 아마추어들과 함께 정통 모라비아 음악을 흉내 내어 보도록 청하곤 했다."



자연과학대학생, 모라비아 음악에 심취할 수 있는 사람, 역설과 농담을 좋아하는 남자. 그런 그가 겪었을 변명할 수 없는 억울한 사건. 묶여버린 자유, 징집된 탄광과 부대에서의 고된 하루, 가장 활기차고 평화로운 대학생활을 유지해야 할 그가 한순간의 실수로 퇴출되고, 징집되어 버리다니. 그 억울함은 어떠했을까요? 그런 중에 만난 한 여자 루치에.


‘그때가 나에게는 행복한 시절이었다. 아마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지긋지긋한 일들로 완전히 녹초가 되고, 지치고 힘이 들었지만, 내 안의 깊은 곳에서는 하루하루 점점 더 푸르러가는 평화가 넓게 퍼져가고 있었다’


루치에를 만난 그때가 가장 행복했었노라고 말하는 거죠. 스물두 살의 청년 루드빅. 치기 어린 한 순간의 실수로 빚어진, 암울하던 암담했던 시기에 나타난 루치에는 루드빅에게 그런 사람이었다는 거죠. 루드빅은 그때 이후, 한 여자를 그토록 많이 생각하고 그토록 고요히 온 마음을 집중했던 적은 다시 없었다고 해요. 다른 어떤 여인을 향해서도 그러한 감사의 마음은 결코 느껴보지 못했다고요.


'루치에는 나의 회색빛 안내자였다. 감사의 마음? 무엇에 대해서? 루치에는 우선 우리 모두가 갇혀 있던 저 참담한 사랑의 전망으로부터 나를 끌어내 주었다.'


"나는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떠나서는 삶은 삶이 아니라 반 죽음이며, 권태이고, 유배이고, 시베리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그 시베리아에서 여섯 달이 지난 후) 지금 나는 갑자기,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완전히 새롭고 예상치도 못했던 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내 앞에는 이제 전속력으로 비상하는 역사의 날개 아래 가리워져 있던 초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잊혀져 있던 일상이라는 초원, 소박하고 가난한, 그러나 충분히 사랑할 만한 한 여인, 루치에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곳."


밀란 쿤테라의 문장만으로 글을 엮으려 했으나 사족 같은 몇 마디를 보태고 말았네요. 쿤테라를 빌미로 스무 살의 그를 생각해요. 스물두 살의 그도 생각해요. 그 겨울 경주 호수 주변을 걷던 버건디색 패딩점퍼를 입었던 키 크고 빼빼 마른 그의 따뜻한 손을 생각해요. 행복한 기억이란 것이 삶을 기름칠해 준다는 사실, 때때로 힘겨워도 추억이란 이름으로 오래 되새길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사랑이 닿는 시간은 예측할 수 없다는 것. 그 순간은 그게 전부였다는 것. 그래서 빛날 수 있었던 것. 어떤 상황에서라도 위안을 길어올릴 수 있는.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 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장석남 ‘배를 매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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