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젠가 송찬호의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라는 시를 아주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었다. 그 시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 가운데 하나다. 그 시는 나에게 흙과 기억에 대한 함의를 가르쳐주었다. 가르쳐주다니! 시는 가르침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한 시인의 어떤 마음의 뜨거움이 다른 이를 동조하게 하고 그 시의 “표정”(이성복 시인의 표현!)이 오랜 세월 동안 영혼의 벗으로 가까이 있게 한다. 그 시는 그러했고 한 번도 직접 뵙지 못한 송찬호 시인에 대한 강한 동지애가 나에게는 있다. 만일 내가 한국에 살았더라면 그에게 가서 뜬금없이 술 사라고 떼를 부렸을지도 모를 일. 먼 거리가 그런 불례(不禮)로부터 나를 지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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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삽 한 자루를 생각하면서 대륙을 건널 때 넣어온 시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를 생각한다. 내가 아직 젊었던 날의 시집이었다. 지은이 송찬호, 발행 연도 1989년. 그 시집이 내 손삽과 함께 시리아와 터키의 발굴 지역을 떠돌았다. 그 장엄한 세계와 시의 마음도. 그때 내 배낭은 물질적으로는 아주 가난했으나 물질 바깥의 우주에서는 모든 잠재태를 불러낼 만큼 거대했다. 그 시집으로 내 배낭은 너무나 부자여서 더러 염치를 잃고 햇빛 속에서 뜨겁게 웃다 울다 했다. <허수경 산문 ‘손삽’ 중>
겨울비가 좋다. 여름비도 좋지만 겨울비가 내리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추위를 많이 타는 이유도 있겠다.
두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우산 마중을 못했다. 일을 하고 있어서였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엄마를 떨어지지 않으려고 눈물범벅으로 발버둥 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일터로 갔지만 희한하게 나는 일터에서 까마득히 아이를 잊었다. 놀랍게도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그 순간은 또 온통 아이생각뿐이어서 뛰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걸음이 빠른가?) 둘째를 키울 땐 그나마 프리로 일을 해서 시간이 좀 주어졌지만 체력이 받쳐주지 못해서 또 못했다. 아이들이 그랬다. 누구네 할아버지는 누구네 엄마는 그러며 우산마중을 해주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비가 오면 우산 들고 오시고, 비가 오지 않은 날에도 늘 학교 앞으로 마중을 나오시는 s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자주 했다. 나는 왜 할아버지가 안 계신 거냐고 따져 묻기도 했다.
몽촌토성역에서 잠실역까지 걸었다. 토닥토닥 우산을 통과하는 빗소리가 뭉클 나를 자극했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걷고 있을 때 문득 생각난 나의 아버지. 문득이 아니다. 스터디 후 차 한잔을 하며 아버지 이야기를 잠시 했었다. 아버지의 편지 ‘막둥아 보아라’로 시작된 그 이야기를 했었던 것. 아버지는 아마 한 달에 한 번쯤 내게 편지를 보내주셨던 것 같다. 편지 서두는 언제나 ‘막둥아 보아라’로 시작됐다. 삐뚤삐뚤 맞춤법이 틀린 아버지의 편지. 나는 책상에서 아버지의 편지를 뜯어읽질 못했다. 지금 같기만 하다면 아버지의 편지를 자랑삼아 펼쳐놓고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만 해도 어린 나는 늙은 아버지가 부끄러웠고, 더욱 맞춤법이 틀리고 삐뚤삐뚤한 아버지의 편지(글씨)는 더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몰래 숨어들어 읽었다. 병원 가운 주머니에 편지를 넣어놓고 화장실에 가서 읽었으니까. 화장실에 갈 때마다 다시 꺼내 읽고 또 읽었던 아버지의 편지. 그 편지가 가운 주머니에서 닳고 닳을 때가 되면 다음 편지가 당도했다. 너덜너덜해진 편지를 서랍 속 깊게 숨겨놓고 새로 온 편지를 또 가운 주머니에 넣어놓고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꺼내 읽곤 했다. 편지를 읽을 때마다 웃고 울었다. 아버지의 편지는 우주였고 세상의 전부였다. 두렵지 않았고 힘이 솟았다. 무얼 해도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었고, 사랑해 주셨던 세상에 단 한 사람 나의 아버지. 특별할 것도 없는 아버지의 편지는 그런 존재였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으나 물질 바깥의 우주에서는 모든 잠재태를 불러낼 만큼 거대했다.… 너무나 부자여서 더러 염치를 잃고 햇빛 속에서 뜨겁게 웃다 울다 했다.(허수경)” 편지 한 장이 주는 에너지가 그러했다. 내게 그런 아버지가 계셨다.
국민학교 다닐 때 비가 오면 그리고 눈이 오면 아버지가 늘 우산 마중을 해주었다. 눈이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졌던 어느 날엔 나를 등에 업고 그 눈길을 걸으셨다. 그런 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아버지의 넓은 등허리가 가슴에 뜨겁게 느껴진다. 몇 굽이의 강과 산과 골짜기를 지나 바람 속 먼 미지의 세계로 가버린 아버지. 내가 그러한 아버지의 보호 속에 평생을 살고 있었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다.
우리 부부 그런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었는지, 문득 생각한다. 허수경 시인은 대륙을 건널 때 넣어온 시집 한 권이 “그때 내 배낭은 물질적으로는 아주 가난했으나 물질 바깥의 우주에서는 모든 잠재태를 불러낼 만큼 거대했었다고 표현한다. 그 시집으로 내 배낭은 너무나 부자여서 더러 염치를 잃고 햇빛 속에서 뜨겁게 웃다 울다 했다.”라고.
유시민 씨가 그랬다. 허수경 시인을 ‘피부가 너무 얇은 사람을 보는 것 같다’고. 조금만 추워도 에는듯한 추위를 느끼는, 조금만 뜨거워도 불에 데는 듯한 고통을 느끼는, 타고난 시인이라고. 이런 감수성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예민한 감수성은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백배는 예민하게 느끼고 그 예민하게 느끼는 것을 또 적절한 언어로 표현해 낸다고, 시인이 느끼는 감정 고통 이런 것들이 딱 전해져 오니까 무섭기도 했다고. 시집 한 권이 물질 바깥의 모든 잠재태를 불러낼 만큼 거대했었다고 하니, 그런 시를 쓰신, 아니 그토록 감수성이 예민한 시인의, 감수성의 깊이를 흔든 송찬호 시인. 그런 존재 그런 사람 그런 삶. 그럴 수 있는 사람이고 그럴 수 있는 좋은 글이고 싶은 것, 그런 사람이고, 그런 글을 쓴다는 것은 얼마나 크고 보람 있는 일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