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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차 Jan 28. 2024

아줌마의 여자친구

먼 곳에서 서로를 키우는 우정

  이십 년 지기 친구들을 만난 자리. 육아를 하며 만나는 인연에 대해 나누다, 누군가 어른이 되어 만난 사람과는 친구가 되기 어렵다는 말을 꺼냈다. 비슷한 일정 속에 매일 동네에서 인사를 나누고, 가끔 약속을 만들어 단둘이 이야기도 나누지만, 내 아이 친구의 엄마일 뿐, 내 친구는 아닌 것 같다는 말.

 ‘누구 엄마’로 나를 부르는 사람들 속에서, 내 이름을 불러 주는 누군가가 그리워질 즈음, 우리는 서로를 만났다.


  그녀를 처음 본 건 큰 아이의 어린이집 오리엔테이션 날이었다. 아이의 손을 호호 불며 집으로 돌아가는 쌀쌀한 밤길,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다 두 딸과 함께인 그녀를 만났다. 둘째가 우리 큰 아이 또래로 보여, 반가운 맘에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그렇게 가문가문 이야기 나누며 걷다 보니 같은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헤어질 때에야, 아이가 아닌,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생각했다. 담담하고 느긋한 말투 뒤, 마음의 표정이 다정한 사람이라고. 갓 돌 지난 둘째와 동생을 본 후 투정이 심해진 큰 아이를 키우며 버거움을 느끼는 중에, 나처럼 딸 둘을 키우는 그녀가 가까운 곳에 산다는 것에 작은 기대감도 품었다.


  몇 주 뒤, 둘째 아이를 오전 시간 동안 어린이집에 보내게 되어 매일 두 시간의 미타임을 갖게 된 나는 매일 동네 도서관에 갔다. 육아로 소진되는 내 삶에 가르침을 주고,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게 해주는 책들이 그리웠다. 등, 하원 시간에도 만날 일이 거의 없던 그녀를 그곳에서 우연히 보고 무척 반가웠지만, 서로의 고요한 시간에 방해가 될까 멀리서 지나쳤다. 도서관에서의 만남이 잦아지던 어느 날, 등원 후 행선지가 비슷한 서로를 가깝게 여기는 맘을 믿고 인사와 연락처를 나누었다. 그렇게 그녀의 집에 초대받은 날, 우리는 오랜만에, ‘누구 엄마’가 아닌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을 만났음에 반가움을 숨기지 못했다.


 나와 닮은 눈길로 세상을 보는 사람, 삶의 속도가 비슷한 사람.

 어린 시절 안쓰러웠던 서로의 모습을 털어놓다 작은 꿈으로 일상을 채우고 싶다는 고백을 나누고 나면 어느새 두 시간이 지나있었다. 하원한 아이를 돌보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같은 일과 속에도 그녀를 만난 날이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상기된 얼굴로 그녀에 대해, 그녀와 나눈 대화 속에서 떠오른 영감에 대해 털어놓는 나를, 남편은 놀렸다. 아줌마의 삶을 생기 있게 하는 우정. 남편도 인정하는 여자 친구가 생긴 셈이었다. 서로에게 소중한 관계라는 것을 느끼며 우리는 더욱 드문드문 만났고, 일상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을 즈음, 나는 제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헤어지는 날, 멀리 있어도 가까이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정말로, 우리는 가끔 나누는 짧은 통화와, 가벼운 안부 문자 속에서 깊이 서로의 하루를 읽고 안녕을 빌었다.


 제주에 온 지 4년째. 그녀는 여전히 나의 특별한 여자 친구이다. 이곳에서도 여러 이웃과 인연이 닿아 인사를 나누기도 하였지만, 그녀와 같은 사람은 없었다. 그동안 그녀의 가족이 제주에 와서 우리 집에 머물기도 했고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커진 어느 주말엔, 바닷가의 구옥을 예약해 둘이서 주말 휴가를 보내기도 했다. 음악 감상실로 꾸며진 작은 방과, 안 뜰의 석류나무, 우리를 바라보던 길고양이. 그녀와 잘 어울리는 장면들로 채워진 시간. 밀도 있는 시간 속에서 나와 그녀가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씨앗을 꺼내 보이고 마음에 심어 두기로 하였다.


내 방식대로 건강히 성장하는 마음을 지켜봐 주고 응원하는 사람, 나에게는 가끔 연락하는 소중한 여자 친구가 있다.


 삶의 불안과 고단함 속에서도 싹 틔운 서로의 꿈이 이제 각자의 속도 대로 자라나길 믿는다. 그녀와 나누는 다음 이야기 속에 잎사귀로 움트길 기대하며, 차가운 제주의 바람 속에서도 얼지 않도록 오늘도, 내 마음속에 한 뼘 더 자라는 보드라운 겨울눈을 따뜻하게 보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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