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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차 Mar 08. 2024

숲 속의 책볶이

  입춘을 지나, 제주의 바람은 제법 포근하다. 봄기운을 느끼며 유채꽃 대신 ‘과학 호기심?’을 싹 틔운 여자들이 동네 책방 ‘라라숲’에 모였다. 책방의 월간 책모임 도서였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에 인용된 또 다른 과학 교양서, ‘이기적 유전자’를 함께 읽기로 한 것이다. 매주 정해진 분량을 읽고, 수요일 오전에 모여 서로의 관점과 소감을 나누는 방식이다.     


 방학한 딸과 함께 있을 시간이라 고민도 잠시, 중학생 딸을 키우는 꿈꿈 님이 ‘엄마가 책 모임 하는 모습을 아이가 보는 것도 좋은 공부’ 일 거라고 하여 가벼운 맘으로 참여 의사를 밝혔다.     


 우리 가족이 제주에 도착한 날도 2월이었다. 아이들이 다닐 어린이집을 알아보고, 이사 후 필요한 세간살이를 장만하다 맞은 폭설, 눈 놀이까지. 바쁜 뜨내기 생활이 몇 주간 이어지다 두 아이를 제주 어린이집에 보낸 첫날, 책이 그리워 가까운 책방을 검색했다.     


 아름다운 책방 순례를 목적으로 제주에 오는 여행객들을 위해 ‘제주 책방 지도’가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들었기에 근사한 책방이 근처에 있겠거니, 잔뜩 기대를 품었건만. 우리 동네엔 학습용 도서나 문구 따위를 파는 서점만 검색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30분 거리의 그림 책방을 발견해 책이 고플 때 드나들며 쉴 수 있었지만, 걸어갈 만한 거리의 책방이 늘 아쉬웠다. 동네 책방이 없어 안타까워하는 나를 보며 남편은 아라동 책방, 우리라도 차려볼까 농담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산책을 하다, ‘안녕, 책방’이라는 귀여운 간판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동네에 책방이라니! 너무너무 궁금해서 오히려 선뜻 발을 들이지 못했다. 그곳이 내 맘에 들었으면 하는 마음만큼이나 나도 책방의 맘에 들고 싶은 마음. 오랜 인연이 될 예감을 앞두고 좋은 첫인상을 주기 위해서 준비가 필요해!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 자연스러운 모습’의 줄임말)로 단장한 어느 날, 책방 앞 공원을 두 바퀴 돌면서 마음을 가라앉힌 뒤, ‘딸랑!’ 문을 밀었다.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의 마호가니 색 가구들과 작은 식물 화분들로 단정하게 꾸며진 실내, 나뭇잎을 닮은 향이 공간을 메웠다. 넓지 않은 공간의 구석구석이 포근했고, 그곳을 살폈을 손길이 궁금해 찬찬히 둘러보았다. 잔잔한 일러스트를 엮은 몇 권의 그림책, 위로와 안녕을 건네는 수필집들. 조용히 머물다 사라지는 피아노 연주 음악. 그리고 모든 배경과 잘 어울리는 단발머리의 그녀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책방’에 책 모임이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 덜컥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책방의 이웃들과 느슨한 친구가 되었다. 다음 해, 책방은 멀지 않은 곳으로 장소를 옮겨 ‘라라숲’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되었고, 라라숲의 숲지기인 사장님은 ‘도토리’라는 새 별명을 얻었다.     

 

 튼튼한 나무에서 떨어져 흙냄새를 맡다 작은 동물들의 먹이가 되어 주고, 영차 힘내어 싹을 틔우면 언젠가 커다란 숲이 될 귀여운 도토리. 엄마가 좋아하는 곳이야, 함께 찾아갔다가 사장님의 예쁨 샤워를 잔뜩 받고 돌아온 아이들. “도토리 사장님, 이름이랑 되게 잘 어울려!” 그녀의 센스 있는 네이밍과 친절을 칭찬하며 책방의 단골이 되었다.     

 

 그렇게 ‘라라숲’의 다람쥐가 된 우리 식구. 날씨가 좋아 집 근처를 산책하고 싶을 때, 아름다운 곳에서 잠시 쉬고 싶을 때, 심지어 엄마 생일에도 아이들은 ‘라라숲에 가자’고 한다. 소박하지만 단단한 삶의 이야기가 가득한 책장, 아늑한 방명록 자리. 달콤하고 따뜻한 초코라테.     

 

 책을 읽으며 몸의 양식도 채우고 싶은 손님을 위해 쿠키와 케이크, 토스트를 손수 만들던 도토리 사장님은 오랜 연구 끝에 ‘언니 떡볶이’를 신메뉴도 내놓았다. 떡볶이가 매워서 늘 엄마 음식이라고만 생각했던 아홉 살 인이도 순한 ‘언니 떡볶이’ 덕에 매콤 달콤한 세계에 입문했다.     

 

 엄마가 과학책 모임을 하는 한 시간 동안 인이는 김리리 작가님의 어린이책 '떡집 시리즈'에 빠져들고, 우리는 라라숲 속 각자의 장소에서 알찬 아침 시간을 빚는다. 내 생각을 읽고 새 마음을 만든 후, 다시 얼굴을 맞대면 환한 기대를 안고 인이가 하는 말,

 “엄마, 나 떡볶이 먹고 싶어요.”     

 떡볶이와 주먹밥, 밀크티와 감귤주스를 테이블에 놓고 마주 앉아 우리는 읽던 책을 마저 읽는다.     


 함께하는 책볶이 속, 든든한 우리 사이. 책과 함께 삶도 볶으며 새롭게 풍요로워지는 우리는 더 잘 지지고 볶으러 우리 동네의 책 숲, 라라숲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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