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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Eyre May 11. 2020

가지 같은 시간

페랑디 13주 차 - 14주 차(2020.04.27 - 2020.05.0



오랜만에 파리에 비가 많이 온다. 방안을 가득 매운 음악 소리를 줄이자 창문 밖의 빗소리가 더 커졌다. 창밖으로 이따금씩 거센 바람 소리와 비바람에 무언가가 넘어지는 소리가 몇 차례 들린다.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린다.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곳이 안전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과 함께 파리의 비 오는 저녁은 고장 나서 깜빡이는 집 앞 가로등의 조명 밑에서 그렇게 깊어져 간다. 시선을 옮겨 방안 구석에 한국으로 보내기 위해 잘 포장된 박스 2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피 있고 무게가 있는 것들을 미리 포장해버리고 나니 이제 내가 이 곳에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이곳에서 해야 할 것들이 있기에 머물러야 함을 잘 알고 있다. 빗소리가 점차 줄어들고 이내 그쳤다. 그리고 물방울이 어디론가 떨어지는 소리를 선명하게 듣기 위해 음악 소리를 완전히 껐다. 그리고 다시 펜을 잡았다.



한국으로 미리 겨울 옷과 책을 보내기 위해 박스포장




화상수업의 목적


화상수업이 있기 전날 저녁은 마음을 새롭게 가진다. 새벽 일찍 일어나 준비하고 나가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수업'이 주는 최소한의 긴장감이라고 해두자. 커피 한잔을 준비하고 참가하기 버튼을 누르면 부담스러울 정도의 인사가 스피커로 전해진다. 서로의 바뀐 모습을 찾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작년 3개월처럼 매일 만날 수 없어서 인지 화면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서 그리움이 묻어 있다. 아니 실제로도 "vous me manquez(난 당신들이 그립습니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학교에서 전달받은 소식을 화면 넘어 학생들에게 재 전달해주고 하루가 멀다 하고 쌓이는 그들의 질문을 한 시간 넘짓 혼자서 답변해주고 나서야 셰프는 비로소 수업에 들어간다.



타르트 틀에 건조 블루베리를 넣은 엠마, 데코도 깔끔하다




수업의 시작은 정해져 있지만 끝나는 시간은 대부분의 한 시간은 훌쩍 넘어 끝날만큼 대중없다. 수업 전에 질문을 하고 응답하며 안부 묻는 시간만큼 늘어나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요즘은 개별적으로 셰프에게 메일이나 SNS로 질문하기도 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수업 도중 나갔다가 다시 참가하는 친구들도 있고 하루에 한두 명은 교대로 보이지 않는다. 수업의 순수한 시간은 1시간에서 1시간 30분가량이다. 친구들처럼 그들의 가족들도 함께 있기 때문에 주변의 목소리나 친구들의 아이들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전해지는 경우도 빈번하다. 그리고 가끔은 그들의 아이들을 인사시키고 옆에 앉혀놓고 수업을 듣는 친구도 있다. 코로나로 인한 화상채팅이 주는 재밌는 광경이다.




셰프 제품이 실린 프랑스 잡지 / 친구의 생토노레



나에게 화상수업의 목적은 제과기술의 향상이 아니다. 작게는 불어를 지속적으로 듣고 그들과 대화하며 아직 끝나지 않은 우리의 과정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수 있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에게 가장 빠르게 듣는 뉴스 같은 것이다. 한편으로 이 타지에서 내가 여전히 소속감을 느낄 수 있음에 큰 위안이 되는 매개체이다.




Crème Chiboust



어릴 때 집 근처 제과점에서 파는 슈크림빵을 잊지 못한다. 동그란 슈를 한입 베어 물면 크림이 주체할 수 없게 흘러나왔다. 흔히 아는 반달 모양의 크림빵은 접힌 부분을 조심스럽게 열어 크림만 먹고 빵은 남겼던 기억이 있다. 커스터드 크림, 슈크림이라고 흔히 부르는 Crème patissier다. 시대가 바뀌고 한국의 제과도 유행이 빠르게 바뀌고 있지만 크림은 여전히 다양한 제과 제품을 만들 때 사용되며, 변화되고 응용된다. 제과에서 크림은 우리 몸속의 물과 같은 존재다. 크림이 없다는 것은 반짝이지 않는 다이아몬드와 같다. 크림의 부재는 제품의 부드러움을 잃게 하고 각각의 재료의 조화가 무너지는 최악의 상황을 도래한다. 크림의 제과에서 기둥이며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졸업장과 자격증을 한국에서 받기 위해 주소 수정



프랑스에서 제과 공부를 하며 내가 기존에 접하고 알고 있고 만들어  크림들의 역사와 이름의 유래들을  강제적으로 공부한 뒤로 마치 모든 것이 연결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Saint-Honoré, 프랑스 정통 제품을 이야기할  빠지지 않는 제품이다. 수업시간에  제품을 설명하다가 셰프crème Chiboust 반복적으로 언급했다. 처음 들어보는 크림이었고 먹어본 적도 없는 크림이었다. 5 정도의 친구들에게 물어봤지만 그들도 존재에 대해서만 알지 만들어보거나 먹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구글과 유튜브에서 이틀은  크림에 대해 찾아봤다. 



거품 낸 흰자(머랭)를 crème patissier와 섞어서 만든 크림으로 전통적인 saint-honoré 크림으로 사용한다. 다른 크림들에 비해 더 부드러운 맛을 가지나 작업성이 좋지 못하고 보존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요즘에는 crème chantilly로 많이 사용한다. - 구글 위키 백과에서 발췌 -



같은 회사의 동일한 액체상태의 크림을 누가 작업하고 어떻게 작업하느냐에 따라서 시작적 차이는 물론이고 식감 조차 바꾼다. 심지어 완제품의 품질과 지속 상태까지 바꾸기도 한다. 모든 제과의 프랑스어 용어나 기술을 짧은 시간 안에 전부 알 수는 없다. 정확하게 아는 것은 결국 시간을 투자해서 시간을 줄이는 것이다. 경험과 지식의 부재는 불가능한 예측과 불안감을 낳으며 결국에는 고객에게 전해진다. 작은 범위 안에서 조건과 상황에 타협해서 제품을 만드는 제과사가 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계속 공부해야 하는 것이고 많은 것을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은 깨어있어야 한다.


3명이나 결석한 오전 수업, 시리엘은 안경이 더 커졌다



이동 제한 해제, 마지막 수업의 윤곽



여전히 정해지지 않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은 화상수업 시작 전에 인사와 같은 일종의 절차로 자리 잡았다. 셰프와 엘로디(선거한 적은 없으나 우리 그룹의 학생 대표)는 학교 관계자들과 프랑스 국가 자격증을 관할하는 시설과의 화상회의에 참여했다. 그리고 5월 4일 오전 우리는 모두 학교에서 메일을 받았다. 6월 29일부터 페랑디에서 수업을 재개한다는 내용이었다. 24명의 학생은 작년 2개의 그룹으로 수업을 받았지만, 코로나로 인해 12명의 학생이 다시 2개 그룹으로 나뉘어 수업을 받게 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총 4개의 그룹으로 페랑디의 수업을 재개한다는 메일이었다. 시험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엘로디에게 개인적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확실하지 않지만 6월 2일에 시험을 보는 방향으로 회의가 진행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프랑스는 11일부터 여전히 약간의 제약이 있지만 약 두 달간의 이동제한이 풀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제대로 된 분갈이를 못해줬는데 잘 크는 선인장




프랑스는 무겁지만 그만큼 늦어진 발걸음을 재촉하기 위해 멈춰 있던 것들을 조심스럽게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각자의 틀어지고 방황했던 꿈들도 다시 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여전히 굳게 닫혀있는 상점도 있겠지만 사람들은 다시 코로나의 위험을 마주하고 거리로 나와 자신들이 있어야  위치로 돌아갈 것이다. 나도 나의 프랑스의 마지막을 위해 마음가짐을 다시 잡는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을 , 어떤 순간에 가장 "우리" 다운지  알고 있다.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2020년의 봄은 꽃들이 만개한 봄은 아니었지만  새롭고 특별하게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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