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비극, 인스타는 희극
대학생 때 잠시 교환학생을 다녀왔습니다. 제 전공은 어문인데 교환학생으로 간 국가/학교에선 어문 전공을 살릴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경영 복전을 시작했어요. 그게 나중에 제 인생을 바꿀지 누가 알았겠어요. 아, 경영 복전이 아니더라도 어쨌든 마케팅으로 오게 되었을라나요.
교환학생 때 처음 경영 복전을 했으니 당연히 마케팅 수업도 처음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4P, 글로벌 기업 마케팅 사례 발표 등 아주 단편적인 기억밖에 없지만, 느낌적인 느낌으로 마케팅은 뭔가 세련됐다는 인식이 들었죠. 코카콜라에서 제품 패키지에 ‘Love you!’(?) 같은 문구를 쓴 마케터처럼, 나도 세상이 (잠시라도) 기억해줄 마케터가 될 거야! 란 생각을 처음 해봤던 것 같아요.
1화에도 썼듯, 뷰티 회사의 마케팅팀에 일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 하루는 어땠냐면요, 동기가 제 캘린더를 조회해보더니 “혹시 너 우리 회사 사장님 됐어?”라는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였답니다. 아침 10시부터 1시간 단위로 미팅을 했어요. 오전 내내 팀장님과 업무 분장 면담 및 제가 하고 있는 업무 보고를 했구요, 오후 1시부터 미용 컨텐츠 미팅, 영업팀 미팅, 디자인 미팅, 브랜딩 미팅을 했답니다.
미팅 간 쉬는 시간은 5~10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요, 잠시 자리에 돌아올 때마다 인턴이 하고 있는 디자인 업무 체크하거나 메일 답장을 했답니다. 물 마실 시간도 없어서 화장실도 거의 안 갔어요. 덕분에 지금 늦은 시각에도 샤인머스캣 하나 다 먹고 있습니다. 몸 속 수분은 꼭 채워줘야..하니까요.
이게 꿈꿔왔던 삶이 맞을까? 라고 5년 전 취준생이었던 제게 묻는다면, “배부른 소리하지 마라.”라고 했을 것 같아요. 취준생 때 자소서 쓰면 CJ 기업이었나요, 이런 질문 항목이 있었어요. ‘니가 ㅇㅇ사업 사원이라고 생각하고 하루를 그려봐라.’ 이걸 왜 물어보나 싶었지만, 덕분에 인터넷에 나와있는 회사원들 일상을 찾아봤던 것 같아요. 지금 제가 겪고 있는 일상들이었는데, 그땐 참 멋있고 부러웠어요. ‘마케팅 회의라니, 디자인 회의라니... 그 자리에 커피라도 탈 테니까 한번 들어가보고 싶다.’
(안 그럴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제 경험에 비춰보자면) 대학생분들 중엔 제 일상을 보면서 ‘와, 마케터구나. 마케터의 삶은 참 흥미롭다.’라고 하실 분들이 계실 것 같아요. 브랜드 SNS 계정 운영 방향성을 수립하고 디자인/스튜디오와 커뮤니케이션해서 시안 디벨롭하고, 이번달에 신제품 런칭도 해서 계속 이커머스 영업 미팅 다니면서 제품 열심히 홍보하고 있답니다. 꿈꿔왔던...삶이라면 삶일 것 같아요. 하지만, 코카콜라 마케터가 제품 패키지에 간단한 영어 단어 하나 새기는 데에 얼마나 많은 아이데이션과 내부 협의와 보고를 거쳤을지 생각해봤냐고 물어보시면 그 부분은 정말 생각 못했던 영역이라고 답할 것 같아요.
현실은 현실이더라구요. 아쉽게도 오늘은 열정 뿜뿜 긍정적인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지난 화에도 열정 뿜뿜 긍정적인 얘기는 아니긴 했던 것 같지만요). 요즘 계속 야근을 했더니 일기를 쓰고 싶어졌어요. 회사 동기들이랑 얘기하면 정말 다들 힘든 얘기뿐이에요. 5년차가 마땅히 그럴 연차라서 그럴까요? 지금 시점이 딱 이직하기 좋은 시점이라던데, 우리는 이직해야 할까? 장업계를 탈출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이 회사가 딱히 싫은 건 아닌데 지금 그냥 너무 힘들어.... 이 대화의 도돌이표, 도돌이표.
제품 개발하는 건 분명히 재미있는 일인 것 같아요. 화장품 업계에 있다는 장점 중 하나는, 내가 실제로 고객이 사용할 제품을 만든다는 거에요. 제가 문과생인지라, 핸드폰이나 냉장고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하기 어렵거든요. 근데 화장품은, 연구소나 생산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나름대로 제가 할 수 있는 게 꽤 있어요. 제형은 이렇게 쫀득쫀득하지만 촉촉해서 잔여감이 없게 만들어주시구요, 향은 요 제품과 비슷한 향이 좋을 것 같아요, 또는 무취가 어떨까요? 임상은 아무래도 요 내용이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야 할 것 같구요... 등등, 실제로 브랜드 마케터가 결정하고 주도해야 할 것들이 많아서 재밌어요. 5년이라는 짧은 커리어지만, 나름 마케팅 쪽에서 제품 개발/커뮤니케이션/전략, 3가지 종류의 일을 해봤어서 조만간 마케팅 세부 직무에 대해서도 글을 쓸 예정이에요. 글을 쓰면서 제가 했던 업무 성격도 정리해보고 싶구요.
여러 이슈가 겹쳐서 늦게까지 야근하고 집에 오는 길에 친한 동기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바쁘게 일하고 있을까? 가끔은 허탈하다며 전화를 하는데, 그 친구가 들려주는 얘기들도 참 힘들게 느껴지더라구요. 다 똑같구나, 다 똑같아. 마냥 신입 사원처럼 우리가 해맑지도 않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쉽지도 않구나.
그리고 나서 집에 도착했는데 제가 개발한 제품이 담긴 택배가 도착해 있더라구요. 제품 출시하자마자 제가 제일 먼저 구매했거든요. 제품에 대한 애정이 있기도 했고 언제, 어떤 식으로 배송되는지 제일 먼저 확인해보려고 직접 구매했죠. 신나서 그 제품을 뜯어놓고 인증샷 예쁘게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렸어요. 인스타그램 스토리 멘션은,, 다들 아시죠? 밝고 행복하고 세상 긍정적! 그렇게 신나게 인스타를 올리고 있는데, 문득 이 말이 뇌리를 스쳤어요.
“인생은 비극, 인스타는 행복.”
다들 그렇게 살고 계신가요? 저와 비슷하게 살고 계실까요? 남들이 보기에 저런 삶은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내 현실은 고민 투성이. 어려운 일 투성이. 하지만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는 인스타 같은 장소에선 절대 힘든 티 안 내기. 그게 요즘 인스타스러운 삶을 사는 방법인 것 같아요.
오늘의 마케팅 일기는 이렇게 마무리하고 싶네요.
“내 인생이 곧 인스타의 행복을 닮아갈 수 있기를! 모두들 힘내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