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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역, 1호선의 끝

[지하철 여행기 #1] 1호선 종착역 연천역에서 시작

by 젊은 느티나무

시간과 몸은 자유롭고 재정적으로 그리고 미래안정성 측면에서는 불안정했던 백수(이자 취업준비생) 생활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 첫 출근일 전까지 지하철 종착역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원래는 약 3주의 시간 동안 뭘 할까 싶었는데, 그 전날 봤던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고 아 역시, 한국 여행의 정취가 있다니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소도시에서 일주일 살기를 해보고 싶었다. 직장을 다니고 있을 때에도 틈틈이 2박 3일 정도로 놀러 간 적은 있었는데, 한 일주일 정도 지내보면 여행 갔을 때와 다른 느낌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람이 너무 많지 않고 관광지가 아닌 곳, 그런데 지역 행정이 잘되어있어서 소소한 지역 행사들이 있는 곳(예를 들면 도서관에서 영화 틀어준다던지..) 시내를 걸어 다니기 좋은 곳(운전 못 함), 바다보다는 산이 있는 곳, 그런데 너무 위험하지 않은 곳, 그리고 그때가 한참 폭염인터라 서울보다 선선한 곳. 이런 기준을 가지고 역시나 챗GPT와 열심히 의논했다. 그는 사실 추천에는 무척 약한 편이고 외국 AI라 한국 여행지에 대해서 잘 모를 것 같았다. 그래서 나름 머리를 굴려서 인구수, 30대 비율, 등의 데이터화 되어있는 수치들로 물어봤다. 고즈넉하고 한적한 곳을 찾지만 젊은 이들이 너무 없으면 지역 행사나 내가 갈만한 상점이 없더라. 그리고 너무 멀리 가긴 싫어서 강원도로 지역을 좁혔다. 그가 알려주기를, 강원도에서 제일 인구수가 많은 지역은 춘천, 원주, 강릉 순이었다. 그리고 강원도 도시들 중 내가 찾는 조건들의 키워드 검색 트래킹을 물어봤고 (예를 들면, 서점, 와인, 영화관 등) 그중 1-3위는 강릉, 속초, 원주였다. 그다음은 9월 평균 기온을 물어봤고 그렇게 나온 결과물은 강릉, 원주, 속초였는데 강릉은 가보기도 했고 바닷가 도시라 원주가 끌렸다. 그런데 아무래도 인구수가 두 번째로 많은 도시인데 저번 달에 춘천을 갔을 때 그렇게 고즈넉하고 한산한 느낌은 못 느꼈고 원주도 비슷할 것 같았다. 그에게 '홍상수 영화'스러운 고즈넉한 느낌의 도시로 다시 추천해 달라고 했다. 친구였으면 이쯤에서 짜증 한번 냈을 텐데 역시 AI친구는 화 한번 내지 않고 다시 추천해 준다. 그가 다시 골라준 곳은 정선, 삼척, 태백. 도시를 정하고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검색하는데, 정선은 시내에 숙소가 마땅치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긴 휴식기와 유럽 여행으로 모아둔 돈을 다 써버린 터라, 멀쩡한 집 놔두고 굳이 숙소에 큰돈 들여서 여행을 할 가치가 있을까, 라는 근본적인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결국 숙소에 돈을 쓰지 않으면서 여행을 할 수 있는 지하철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매일 하루에 한 역을 가고 저녁엔 집으로 돌아온다. 대신, 안 가봤던 곳, 그리고 너무 서울 도심스럽지 않은 수도권 지하철 역을 가보기로 했다.


첫 여행지는 어디가 좋을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후보지 중 가장 먼 곳을 처음에 가는 게 체력 분배를 생각하면 낫지 않을까 싶어 결정한 곳이 연천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연천역은 소요시간이 긴 게 아니라 배차시간이 긴 거였다.) 지하철로 이동하는 여행이라 최대한 짐을 간소화하기로 했다. 가벼운 짐을 메고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아무리 종착역이지만 그래도 지하철이 개통된 곳이기 때문에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되었고 설렁설렁 돌아다니며 구경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되었다. 오전 10시 반쯤 지하철에 올라탔다. 처음 탄 지하철은 2호선이었다. 시청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탈 계획이었는데, 출근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굉장히 한산했다. 시청역에 내려서 1호선으로 갈아타려는데, 연천행은 배차 간격이 너무 길어서 40분을 플랫폼에서 마냥 기다려야 했다. 그러기엔 시간이 조금 아까워서 계획을 변경했다. 다음 전철이 의정부행이었는데, 어차피 점심시간쯤 도착할 것 같아 의정부에서 내려서 부대찌개를 먹고 다시 연천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오전 11시 20분경, 1호선으로 갈아탔다. 의정부로 향하는 1호선은 어느 정도 차있지만 자리는 드문 드문 있다. 앉아서 갈 수 있어서 좋았다. 외대앞 역쯤 되었을 때, 점점 사람이 줄고 차내는 조용하고 어떤 아주머니의 전화 통화 소리만이 조용히 들려온다. 그러나 그 전화 소리도 말투나 내용이 구수하여 시끄럽지 않다. 시골 전철 타는 기분이다. 역시 지상철은 그런 매력이 있다. 만약 지하로만 한 시간을 넘게 이동했으면 무척 지루했을 거다. 석계역 쯤 둘러보니 젊은이들은 없고 확실히 중장년층만 많다. 신기하다. 여전히 지상철이고 기분이 좋다. 회룡역에서 내려서, 의정부 경전철이라는 걸 타보기로 한다. 지하철 여행은 좋은 점이, 워낙 오래가다 보니까 그 정착역의 역사나 정보에 대해 알아보게 되는데 그게 은근히 재미있다.


원래는 연천역이 종착역이 아니었다.
지상철의 푸릇함

의정부 경전철을 타러 회룡역에 내린다. 사람들이 꽤 많이 내린다. 의정부 경전철 플랫폼은 확실히 신식이고 공항 같다.




의정부 경전철은 존재조차 몰랐는데, 의정부 부대찌개를 검색하던 중, 부대찌개거리가 의정부 경전철 중앙역 앞에 있었고 의정부 경전철을 타고 간 사람의 블로그 후기를 보고 알게 되었다. 부대찌개도 먹고 처음 타보는 지하철도 타보고, 운이 좋았다. 그렇게 타게 된 경전철은 정말 신기했다. 지상철이랑 비슷한데 훨씬 작고 놀이기구 타는 느낌이다. 차체가 작아서 그런가 인구 밀집도가 꽤 있었다. 특히 내가 섰던 곳은 맨 뒤쪽이었는데 창문 밖의 풍경이 참 좋았다.




그렇게 부대찌개거리가 있는 역에 내렸다. 정말 역 바로 앞에 부대찌개 거리가 있었고, 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부대찌개라는 '오뎅식당'이라는 곳에 갔다. 본관, 별관 두 공간이 있는데도 사람이 꽤나 많았는데 그래도 앉을자리도 있고 혼밥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기본 부대찌개를 시켜서 먹었다. 바빠 보이고, 또 한창 점심시간에 혼밥 한다고 테이블을 차지해서 조금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물론 빈 테이블도 있었지만) 그래도 꽤나 친절하셨다. 맛있는 부대찌개 맛이었는데 아무래도 인기 맛집이고 유명한 곳이라 그런가 특색있는 깊은 맛을 느낀 건 아니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전철에 올라탔다. 다시 회룡역. 연천행 지하철을 타는 사람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은근히 많다. 심지어 젊은 사람들도 꽤 있다. 이 사람들 다 어디로 가는 걸까. 큰일 났다. 잠이 온다.

덕정역과 지행역. 이곳에서 젊은 사람들이 꽤 내린다. 뭐가 있어 보이지 않은 역인데 신기하다.


지나가던 아주 오래된 외관의 전철
지상철로 즐기는 평화로운 풍경

그렇게 나른함을 얼굴에 한껏 지니고, 드디어 연천역에 도착했다. 열 시쯤 출발했는데 참 오래도 걸렸다. 두 시 삼십 분이었다. 연천역 참 크다. 새로 지어진 역사라 그런지 크고 신식이다. 출구로 향하는데 연천급수탑이 보인다. 왠지 느낌이 좋다. 그렇게 나간 이 동네는 건물들도 낮고 한적하다. 내릴 때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없다.


역에서 나가는 길에 연천급수탑이 보인다.
낮은 건물들과 한적한 도로.

이번 지하철 여행의 루틴이 있다. 역에서 나와, 관광안내소를 간다. 가서 리플릿이나 지도를 받고, 가능하면 가볼 곳도 추천받는다. 이번에 들른 관광안내소는 예전에 사용하던 폐역을 개조한 관광안내소였다. 엽서 같은 것도 있고 리플릿도 있었다. 리플릿에는 가볼 만한 곳들이 많았는데 이미 시간이 3시쯤 되어가는 시간이라 어딜 멀리 갔다간 돌아올 때 깜깜해져 버릴 것 같았다. 오늘은 첫날이니 무리하지 말고 카페에서 좀 쉬기로 했다. 오는 동안 찾아본 <조각실>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카페로 향했다. 실제로 조각하시는 분의 아뜰리에이자 카페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이 카페를 가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 게, 이 카페로 향하는 길이 정말 아름다웠다. 나는 개인적으로 울창한 가로수가 양쪽으로 쭉 늘어서 있는 길을 언제나 좋아하는데, 이 길이 정말 이상적인 가로수길이었다.


관광안내소에서 보는 풍경

가로수가 무척 크고 울창한 것도 좋았고 그래서 길에 녹음진 풍경도 너무 좋았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아무도 나보고 어디로 가라고, 무얼 하라고 하는 사람 없는 이 자유로운 시간이 좋았다. 그렇게 도착한 카페는 생각보다 굉장히 세련되었고, 멋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격이 서울 카페의 극악무도한 가격에 비하면 굉장히 저렴했는데 브레드 푸딩이 너무나도 맛있었다. (원래 엄청 좋아하긴 함) 사장님도 참 친절하셨다. 앉아서 리플릿도 구경하고 이제 다음에는 어딜 갈지, 내일은 어디로 갈지를 정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푸딩이 참 맛있어서 하나 더 주문했다. 맛있었는데 너무 단 디저트를 두 개나 먹으니 조금 물렸다. 원래는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카페 하나 보고 가기는 아쉬워서 근처에 아트홀을 가려고 했는데 딱히 하고 있는 공연도 없고 해서 일단 카페 근처와 아트홀 근처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이 테이블이 꽤나 탐났음.

아트홀 앞에 공원이 하나 있어서 구경하다가 이미 시간이 다섯 시를 향하고 있어, 집에 도착하면 너무 늦은 시간이겠다 싶고 퇴근길 인파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지하철을 탔다. 특별히 한 건 없는데 최고 온도 34도의 날씨에 낮은 건물들 사이를 돌아다니다 보니 더위에 지쳐서 집에 오는 길이 굉장히 피곤했고, 그렇지만 초록의 풍경들을 많이 볼 수 있었고 나름대로 지하철 여행의 계획을 짜는 시간을 가져서 유의미한 여행이었다.


2024년 9월 9일 1호전 종착역 연천역 여행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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