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저녁, 평일의 쇼핑몰은 한가하다. 가끔은 한가하다 못해 스산하게 느껴진다. 옷가게 점원의 표정이 무료해 보인다. 손님도 없어 문 닫을 시간만 기다리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옷을 보러 들어가기 괜히 망설여진다. 그들의 평온한 지루함을 애써 방해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유니클로 같은 넓은 가게만 들어간다. 옷을 보던 말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곳이 편하다. 남의 시선이 달갑지 않은 I형(NBTI 중 E와 I) 인간들은 소규모 옷가게가 불편하다. 계속 나를 따라다니며 재촉하듯 계속 뭔가를 캐묻는다. 제발 좀 내버려 두라고. 옷을 사는 사람은 난데, 왜 불편함도 내 몫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와이프가 옷을 보러 간 사이, 슬슬 다리가 아파왔다. 마침 근처에 가로, 세로, 높이가 약 3m인 지구 모양의 쉼터가 보였다. 쇼핑몰이 한가하다 보니, 휴게 공간도 텅 비었다. 아싸. 모두 내 차지다. 아지트 같이 안락한 느낌을 주는 이곳은 평소에 인기가 많다. 특히 아이들에게 인기다. 주말에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붐빈다.
그리 크지 않은 내부에는 한입 베어 문듯한 도넛 모양의 소파가 있었고, 나무 프레임 사이사이에는 여러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과연 여기 앉아 책을 읽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뻔한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다가 무심코 바로 옆에 있는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2009년 이상문학상 작품집이었다. 대상은 김연수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이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이상문학상 작품집은 손이 잘 안 간다. 표지의 올드함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딱 봐도 칙칙한 색에 폰트나 레이아웃도 구식 디자인이다. 90년대부터 하나도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출판사가 왜 이런 디자인을 고수하는지 모르겠지만, 판매고를 줄이는데 표지가 상당히 기여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개인적 의견일 뿐입니다).
평소라면 쳐다보지도 않았겠지만, 제목 때문에 책장을 펴지 않을 수 없었다.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린인지 무슨 동물 몇 마리가 나온 것 같은데.. 모르겠다. 아무튼, 금세 와이프가 도착했기 때문에 찰나의 독서는 강제로 마무리되었다. 단 하나 기억나는 건, 소설 중간에 쓰인 ‘명징’이라는 단어뿐이었다.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영화 평론가 이동진 씨의 기생충에 대한 한 줄 평이다. 있어 보이려 허세를 부렸다, 일반인들이 알기 힘든 단어가 연속으로 쓰였다는 둥 당시에 다양한 비판 여론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그 단어를 이 책에서 보다니.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동시에 이렇게 흔하게 쓰이는 걸 보니 이동진 씨에 대한 대중의 비판이 조금 부끄러이 느껴졌다. 어쩌면 이동진 씨가 수준 높은 단어를 구사한 게 아니라, 오히려 대중의 어휘 수준이 낮아졌기 때문 아니었을까? 괜히 이동진 씨에게 사과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은 책을 잘 읽지 않는다. 지금도 그랬고, 30년 전에도 그랬다. 집안에 아이가 태어나면 50권짜리 전집이나 동화책은 잔뜩 사주면서, 정작 본인은 단 1권도 읽지 않는다. 아마 1년 내내 단 1권도 읽지 않는 사람이 정말 많을 것 같다.
나도 언제부터인가 책을 멀리한다. 특히 문학은 더욱 그렇다. 자기 계발, 경제, 경영 등 실용적 목적으로 간간히 읽고 있지만, 찬찬히 시간을 두고 즐기며 읽는 법은 잊어버렸다. 어쩌면 안락한 삶을 위해 돈을 버는 것에만 초점을 맞춰 살다 보니 시간이 아깝다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조금 여유 있게 산책하듯 살아도 좋을 텐데. 우리 어른들은 자동차 액셀을 꽉 밟고 간신히 신호위반에 걸리지 않을 속도로 누구보다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만 생각하며 살아간다. 참 씁쓸한 일이다.
그래서 가끔, 이렇게 의도치 않게 집어 든 책 한 권에 현실도 모르고 꿈만 꾸던 20대의 내 모습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