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얻은 교훈
글로벌 IT 대기업에서 퇴사를 결심할 때 다음 스텝을 어떻게 밟아나가야 할지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세워 놓았습니다. 업무를 하면서 느꼈던 점이 있었습니다.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에 선발된 많은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던 저는, 어느 날 한 대표님으로부터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을 그 순간이 저에게는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제가 개인적으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이. 글로벌 IT 대기업의 입장에서 스타트업을 돕는 일은 일반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었지만, 저 개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어요.
다른 일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이유는 또 있었습니다. 저는 학창시절부터 모범생으로 자랐고, ‘모범생의 끝판왕’이라는 찬사를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듣기도 했어요. 그래서 웬만한 일을 어느 정도 수준 이상으로 잘해내는 데는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입과 다름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 생활도 원만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오랫동안 무언가를 ‘잘하고’ 그로 인해 칭찬받는 삶을 살다 보니, 그런 삶이 지겨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찾아서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는 퇴사하고 제가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를 탐색하기 시작합니다.
매일같이 카페에서 자기탐색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집 근처 하천을 걷다가 문득 ‘랩’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네, 힙합의 랩이요. 그래서 아무 주저함 없이 유튜브를 켜서 아무 비트나 재생해서 혼자 프리스타일 랩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웬걸, 너무 재미있는 거에요!! 비트를 타는 느낌도 너무 좋고, 비트에 맞춰 내가 뱉어내는 랩도 가사가 의미있고. 그때 ‘랩이 이렇게 재미있구나’ 하는 것을 알아버렸습니다. 물론 예전부터 랩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어요. 나중에 누군가와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린다면 같이 디스전을 하며 놀고 싶다는 생각을 몇 년 전에 버킷리스트에 적어 놨었죠. 그래서인지 몰라도, 평소 생각이 많아 시작이 더딘 저에게 음악은 시작이 참 쉬웠습니다.
힙합 음악과의 인연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전에 ‘고등래퍼2’이라는 힙합 경연 프로그램의 우승자인 김하온 군의 싸이퍼(자기소개 랩) 영상을 우연히 본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다시 한 번 영상을 찾아 보았습니다.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엄청난 랩 실력으로 심사위원과 참가자들을 충격에 빠뜨리는 모습이 역시나 명불허전이더군요. 김하온 군이 이병재 군과 함께한 ‘바코드’라는 곡도 오랜만에 다시 듣게 되었는데, 덕분에 명곡을 듣는 즐거움에 인생 처음으로 푹 빠져 버립니다. 이런 명곡을 만든 ‘그루비룸’이라는 프로듀서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저도 그런 멋진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게 됩니다. 힙합과 어울리지도 않는 곱상한 외모를 가진 제가, 랩도 하고 프로듀싱도 하는 랩퍼 프로듀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다행히 주변에 말할 때 반응이 나쁘지 않았어요. 가족들도 친구들도 좋으면 해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때는 음악이 제게 주는 느낌이 정말 특별했어요. 예전부터 평소에도 음악을 많이 들으며 사는 저였지만, 그렇게 음악과 사랑에 빠져 버린 것은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음악을 듣는 게 너무나도 즐겁고,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적극적으로 찾아서 보고, 심지어 음악이 제 영혼을 채워준다는 느낌까지 받게 됩니다. 그렇게 음악에 꽂혀 버린 저는 고민 끝에 그루비룸의 프로듀싱 클래스를수강하고서 마스터키보드와 모니터링헤드셋이라는 장비를 사고 미디 프로그램 체험판을 다운받아 독학으로 음악에 도전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음악에 도전하겠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어요. 저는 퇴사 후에 일과 삶을 설계하는 어느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 프로젝트에서 내가 일을 하는 ‘이유’를 명확히 해야 행복한 삶을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철학적인 가사를 기반으로 사람들이 힘든 하루를 버텨낼 수 있도록 마음을 받쳐 주며 진실한 위로를 해주는 음악을 하고 싶다는 뜻을 갖고 음악에 도전하게 됩니다. 작곡 선생님께 고민 상담을 요청하기도 했는데, 그 정도 열정이 있으면 해봐도 될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러나 음악만 하면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고 저도 제 밥벌이는 하는 음악인이 되고 싶어서, 병행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까지 구하면서 음악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생 처음으로 제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기준에 따라 일과 직장을 선택했었던 과거의 제가 그런 것과 아무 상관없이 스스로의 기준을 따라 선택하여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어요. 그 느낌이 정말 상쾌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스트레스도 알게 모르게 많이 받았는데요. 아무래도 음악에 큰 재능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재능이 없진 않았습니다. 작곡 선생님도 제가 대학교 시절에 만들었던 자작곡을 들으시고는 재능이 있다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렇지만 음악을 직업으로서 잘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제 능력이 턱없이 부족해 보이더군요. 아이러니하게도 저를 음악의 세계로 이끌어 준 그루비룸의 인터뷰 내용을 들으면서, 저는 음악을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은 모든 관심사와 열정이 음악에 있고 음악을 하기 위해 태어난 분들 같았어요. 그렇지만 저는 그 정도의 관심과 열정, 그리고 재능은 없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좋아하는 일을 하려고 음악을 시작했던 거죠. 잘하는지의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잘하는 일이어야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경제적 생활이 고민이 되기 시작했어요. 평일에 하루 3시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한 달 동안 버는 금액은 80만원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음악에의 도전을 병행할 수 있기에 그 정도 벌 수 있는 것도 감사하다고 생각하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프로 작곡가 겸 프로듀서가 되기까지 약 2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가정해 보았을 때, 저는 그 기간을 월 80만원으로 생활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아무래도 제가 돈을 적게 벌다 보니 집안 경조사와 관련해서 지출을 할 때 제 동생이 더 부담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저 자신을 경제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선택을 하고자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회사원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이지요.
음악을 포기했냐고 물으신다면, 전업으로 하는 건 포기했지만 취미로 오랫동안 하는 삶은 남겨 두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저의 선택을 멋지게 해석해 주시더군요. 내가 사랑했지만 실패했던 것은, 내 삶에 흔적으로 남아 평생을 함께한다고…
결국 ‘잘하지 못해서’ 음악을 그만두었다기보다는, ‘좋아하는 정도’가 음악을 직업으로 잘하고 있는 사람들만큼 크지 않아서, 였다고 설명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전 애초에 잘하는 일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삶을 체험해 보고 싶어서 음악을 시작한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월 80만원의 수입도, 부족한 재능도, 2년의 준비 기간도 이겨낼 만큼 저는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인생을 살면서 그렇게 무언가를 좋아하는 느낌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기에, 저는 앞으로는 현실적으로 균형잡힌 삶을 살면서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자고 다짐하게 됩니다.
저도 남들이 하는 것처럼 정규직 회사원으로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 음악을 하기로 결심했어요. 회사원이 되면 충분한 월급도 나오고, 도전해 보고 싶은 일은 퇴근 후에 조금씩 준비하며 제 미래를 꾸려나갈 수 있잖아요. 그게 저는 책임감 있는 성인의 자세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음악에 온전히 뛰어들었던 것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어요. 뭔가 회사원으로 일을 하면서 음악에 도전하는 것은 한 발을 걸치는 것 같고 현실과 타협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제 성격상 화끈하게 모든 것을 걸어 도전하는 것을 더 좋아하기에 음악을 했던 것이었는데,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생각하며 준비하라는 이유는 있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조금의 성장이라도 한 것이겠죠.
그래서 요즘 저는 다시 회사에서 일하기 위해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전과 똑같지는 않을 거에요. 왜냐하면 저는 이전과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직업 설계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제 인생의 행복과 연결될 수 있는 일을 찾기로 결심했던 것, 무분별하게 잘하는 일을 하기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체험을 했던 것, 나를 경제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이 되기로 마음 먹었던 것 등. 저는 참 많은 것을 얻고 회사로 돌아갑니다.
사실 안정적인 경제 생활을 위해 정규직 일자리를 구한다고는 하지만, 제 앞길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알 수 없어요. 또 다른 도전을 해볼 수도 있고, 비정규직 일자리를 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회사에 들어가기로 결심하는 마음이 참 편안합니다. 적어도 이제 제가 왜 회사에 다니기로 선택하는지는 명확히 알 수 있으니까요. 직장에서 왜 일을 해야 하는지 몰랐던 과거와 비교했을 때 지금의 저는 나름의 답을 갖고 회사로 돌아갑니다. 아마 전보다 행복할 거에요. 내가 만들어 낸 나의 선택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