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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기환 Apr 10. 2020

미래에 대학교가 꼭 필요할까?

코로나 시대, 사이버 강의를 들으며

 

  사람을 만나지 않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아웃사이더, 속칭 ‘아싸’가 애국자 되는 시대가 찾아왔다. 혼강-혼밥-혼술까지, 아싸 삼위일체로 절대 아싸력을 부여받은 나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엄격히 수행하는 모범 시민일 뿐만 아니라 코로나 시대의 진정한 애국자다. 한편으로는 31번 확진자부터 지금까지, 약 두 달 여간 벌어진 아싸에 대한 평가 상승이 당황스럽기도 하다. 나 같은 찐-아싸는 코로나 시대이든, 평범한 시국이든 상관없이 사회적 거리를 두며 항시 지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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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는 다른 결로 세미 아싸, 즉 혼자 밥을 먹고 혼자 강의를 듣는 ‘아싸력’이 부족한 아싸들은 지금의 시국이 외려 반가울지도 모르겠다. 바로 3월, 개강한 대학교 모두 강의를 비대면 사이버 강의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고 친구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 과 행사에 안 참여해도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 이유를 학교 측에서 친히 나서 마련해주었으니까.

*에세이적 허용(?) 일뿐, 코로나 시국에서 수혜자는 없다. 사태가 빨리 종료되는 것이 진정한 수혜 일뿐!






  보통 개학 후 2주 동안 사이버 강의를 실시한다고 발표했지만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사망자수의 급격한 증가로 카이스트가 코로나 시국이 안정될 때까지 무기한 사이버 강의로 대체하는 것을 결정하며 강의의 향방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사이버 강의를 처음 접해보는 학생과 교수들 모두 혼란스러운 실정이다. 이클래스 서버가 다운되며 교무처 전화기는 불이 났고 영상을 어떻게 찍냐고 묻는 교수들의 문의 메일에 연구실 역시 바쁘다. 서울 사이버 대학이 시대를 앞서간 명문이었다고 칭송하는 세력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나를 찾는 회사가 많아졌다는 것은 물론, 사이버 강의 성공 시대를 노래한 그들이 어쩌면 코로나 시대의 선지자이자 모범대학교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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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나는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 재학 중이며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후배들과 동기, 학부생들이 생각하는 사이버 강의에 대한 평가를 쉽게 들어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학부생들이 내는 의견의 표본을 뽑아보자면 사이버 강의에 대한 생각은 대충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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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은 일단 등록금이 아까워 죽겠다고 말한다. 개강 당일, 9시 수업부터 이클래스 서버가 터지는 바람에 수업을 들을 수 없었고 수업을 들어도 너무 느리다, 화면이 깨진다, 다운로드가 안되는 등등 장애가 많다. 강의 질 역시나 좋지 않다. 1~3 시간 동안 진행되어야 할 강의가 30분 정도로 축약된 수업이 태반이다. zoom, web X 같은 프로그램을 쓰면 얼굴이 다 보이기에 부담스럽다는 학생도 있다. 실기가 있는 미대의 경우엔 더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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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가 잘 안된다는 의견 역시 지배적이다. 인터넷이 공부에 가장 큰 방해꾼인데 인터넷으로 강의하는 것에 집중할 리가 없다. 여러 레전드 빌런도 등장 중이시다. 마이크를 켜고 라면 먹는 빌런, 기침 빌런, 달그락달그락 숟가락 소리를 내는 국밥 빌런까지(실화다...). 제일 안 좋은 것은 과제. 교수님들이 학생의 수업 참여도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과제밖에 없다. 그래서 오히려 과제만 늘어난 느낌이라고 한다.






  석사 과정 재학생일 뿐만 아니라 연구 조교로 일하고 있는 나는 단순히 학생이라는 이유로 교수들이 학생의 여론을 파악하는데 바로미터로 사용되는 처지다. 그렇기에 학생의 입장뿐만 아니라 교강사의 입장까지 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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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근무하는 연구소의 박사 연구원은 강의 유출을 걱정한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외국인 교수는 한국 학생들이 도대체 왜 말을 안 하는지 의문이라고 한다. 옆 자리 교수들은 구글 드라이브가 뭔지 나에게 물어본다. 어떤 교수님은 박사과정생 하나 앉혀놓고 수업을 한 영상을 찍어서 보낸다. 박사과정생만 불쌍한 처지다. 카메라 앞에 서기 쑥스러워 인형으로 자신의 아바타(?)를 생성한 교수도 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안 그래도 바쁜데 더 바빠졌다고 불평이다. 녹화를 하고 강의 파일을 만드는데 나이가 많으신 교강사분들은 수업 시간보다 배로 노력이 들어간다. 사실 이건 다 양반이다. 어떤 교수님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아예 연락이 없다.  





  예측 불가하게 변화하는 미증유의 상황에서 학교에 관련된 사람 모두 그저 학교의 결정에 따를 뿐이다. 좋고 나쁜 건 없다. 생명이 걸린 문제니까. 하지만 나의 대학원 동기들은 작금의 코로나 시국에 조금 다른 결의 감정을 느끼는 것 같다. 이것은 비단 코로나 때문만은 아니다. 어쩌면 코로나로 느끼는 공포보다 한 차원 더 깊다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미래의 밥줄, 먹고사는 것과 관련된 걱정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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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걱정은 이렇다. 이러다가 대학교 강의가 사이버 강의로 완전히 대체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대학교 수업 강의를 하는 학원도 생기지 않을까, 그렇다면 대학교가 필요가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출생률이 낮아서 우리가 박사를 하고 강의를 할 미래에는 대학교가 많이 사라진다는데, 강사로서 먹고살 수 있을까? 그럼 논문을 쓰지 말고 유튜버를 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나? 4차 산업에 통번역학은 이미 맛탱이 갔는데, 학위를 재쳐두고 일단 영상 편집을 할 수 있는 어도비 프리미어나 에프터 이펙트를 배워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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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 전에는 집집마다 백과사전을 한 세트씩 사는 게 유행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백과사전을 사지 않는다. 어쩌면 대학교가 백과사전처럼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학생들도 대학교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겠지만 가방 끈이 긴 교강사들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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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박사과정을 인생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지만 나 역시도 대학교의 필요성에 대해선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나는 오히려 ‘대학교가 없어져야 하는 게 시대의 흐름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부실 대학도 많고 우리나라의 대학 진학률이 필요 이상으로 높으며 대학교의 등록금 정도의 효용으로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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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렇게 생각한 나조차도 이번 사이버 강의 시대를 겪으며 미래 대학교의 효용에 대한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 먼저 말하겠다. 나는 미래의 대학교의 효용이 다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Sébastien Thibault illustration



  만약 미래에 대학교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가상 대학교가 채우게 된다면 장점은 많을 것이다. 수업 듣기도 편해지고 녹화된 석학의 사유를 공유하기도 쉬울 것이며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도 있다. 하지만 ‘편리’하다는 것을 빼면 거의 장점이 없다, 더하여 교수의 지도방식과 학과의 특성을 고려해보면 사이버강의가 적합지 않은 강좌도 많다. ex) 미대, 실습, 토론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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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버 대학교에는 사람이 없다. 동기도 없고 친구도 없다. 컴퓨터를 끄면 대학교가 꺼진다. 주변을 둘러보니 자그마한 6평짜리 원룸이다. 그곳에는 우리가 스무 살에 할 수 있는 소소한 경험들, 평범해서 대단한 경험들 역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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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좋은 콘텐츠를 다루는 유튜브이든, 영화든, 그것이 설사 깊디깊은 선대의 지혜라고 해도 그것을 자신의 일상과 개인적 경험에 연결되지 않는 이상 큰 울림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웹드라마 남주에 훨씬 못 미치는 남사친이랑 시시덕 거리는 게 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설렌다는 것을 떠올려보라. 다양한 직접 경험들, 특히나 어릴 때 해야지 어여뻐 보이는 경험들을 만약 대학교가 없다면 우리는 어디서 경험해야 할까? 첫 직장 혹은 연구소에서?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대학교는 우리 인생에서 사랑, 친구관계, 협력, 돈의 쓰임 등등의 것들을 가장 ‘쉽게 경험해 볼 수 있는 장소이자 잘 실패해볼 수 있는 장소’인 것이다.




영화 <건축학개론>, 물론 현실은 다르다.




  더해서 만약 사이버 강의가 일반화된다면 강의에 출석하지 않고도, 또는 본 강의에 집중하지 않고도 불법적으로 요약된 녹음을 듣고 학점을 얻어내는데 별로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도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학위를 따는 것이 점점 쉬워지고 있다. 내가 속한 대학원도 한 학기를 더 다니면 논문을 내지 않고 졸업할 수 있고 학부 역시 외국 어학원에서 수강한 뒤 등록금을 내면 학점을 인정해 주고 있다. 사이버 강의가 되면 아이엘츠 대리 시험처럼 강의 대리 시험을 봐주는 직업이 생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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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는 이를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긴, 도대체 대학교에서 뭘 배운다고. 하지만 대학교는 이런 행동들이 왜 잘못된 행동인지 역사적으로, 학문의 영역에서 철학을 들먹이며 논리적으로 ‘질문’하고 답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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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뤼셀 대학의 철학 교수 미셸 메이에르는 말한다. 어떠한 개념은 절대불변의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다고. 그렇기에 꾸준하게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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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쉽게 말해보자. 이데올로기도 변화하고 옳고 그름에 대한 개념도 바뀐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소크라테스 이래 서구 철학자들은 질문과 해답의 끊임없는 반복으로 '논리'라는 것을 발전시켜 왔다. 질문은 철학과 사상의 기초, 그 자체이다. 모순과 현실의 장애물은 진보의 동력이며 질문은 진보하는 과정에 윤활유 역할을 해준다. 메이에르는 거듭 말한다. 개념의 의미란 시간을 먹으며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지 결코 쉽게 주어지거나 꽁꽁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고. 그렇기에 한 개념에 천착하여 꾸준하게 질문과 대답을 하는 과정 자체가 개념의 구축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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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확한 대답을 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질문이고 그다음 질문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대답이다. 하지만 '실제로' 질문을 하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직장에서, 사회에서, 어떤 단체에서 “왜?”라고 물어보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귀납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질문을 던질만한 심리적, 사회적, 물리적, 시간의 측면에서 빈 공간이 몹시 필요하다. 각자의 인생이 고착화되기 전에 다음 단계를 자유로이 상상해 볼 수 있는 유예기간(시간)과 각자의 선택과 결정을 가능케 하는 공간(물리적 공간). 자유로이 가치를 좇는 행위를 역사적으로, 전통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개념이 필요한 것이다(심리적). 이렇게 복합적인 의미를 확보하고 있는 공간이 대학 말고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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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하수의 일부가 된 故황현산의 말 역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한 칼럼에서 말한다 “우리에게 과거의 상처는 너무 악착스럽고, 미래에 대한 걱정은 갈수록 두터워질 뿐이다. 그래서 현재는 그만큼 줄어들고 삶을 누리는 것이 용서되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가 미래의 걱정거리로 확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학은 지금 이 자리의 삶에 자신을 자유롭게 바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마련하려고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대학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이 자유의 시간과 공간이 없이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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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교는 자신이 상상하는 미래의 모습을 추구하는 공간이다. 그것이 먼 미래이든, 바로 앞의 미래이든.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었든 자유로이 경험하고 실험해보고 배우고 읽고 쓰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취업 공부일 수도 있고 연애, 공시 공부, 박사과정이 될 수도 있다. 그것 자체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으며 해답을 실험,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그 공간이 존폐위기에 놓인 것이 사실이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삼아 대학교의 의미에 대해 우리 사회가 한 번 진지하게 환기해보는 건 어떠한지.



Sébastien Thibault illustration



  그래도 등록금이 아깝다고? 실제로 대학교는 몇 년 사이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 우리 학교를 예로 들어보자면 창업 클래스, 개인 정신 상담, 1인 창업 지원, 독립출판 클래스도 운영을 하고 무료 토익 강의 등등 학생들의 취업에 결정적인 프로그램 역시 운영 중이다. 또한 생각보다 교수님들 방문은 쉽게 열린다. 물론 학생이 문을 두드릴 경우에 한해서지만. 하다못해 도서관 리모델링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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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렇게 별것 없는 글을 쓴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대학교의 효용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논리를 구성하는 단위는 주로 사회적 성공이라는 산수에 기반해있다. 하지만 성공은 대부분 개인에게 달려있고 얼마나 그것에 집중하고 태도에 달려있다는 것이지 딱 한 가지, 가령 대학교의 유무에 종속된 것은 아니다. 노력 안 하며 살겠다는 말이랑 공부가 필요 없다는 말은 동의어가 아니듯이 취직을 하겠다는 말과 대학, 공부가 필요 없다는 말 역시 동의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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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대학교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고?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명심하라. 따져보면 대학교가 별 거 없다는 것도 대학교가 가르쳐준 가르침이라는 것을.




+ 덧, 코로나 사태가 빨리 끝났으면.



잘버틸수있다...우리가 어떤민족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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