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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기환 Jun 10. 2020

친구 아빠



*친구 아빠

  맨발로 걸었기에 알 수 있었던 사실 하나, 탄자니아는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거친 도로를 가지고 있다는 것. 모시로 가까워질수록 도로의 결이 사나워졌다. 바가모요 도로의 결과 비교한다면 수세미를 밟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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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시는 꽤나 진하게 여행지의 분위기를 풍기는 소도시였다. 출처를 가늠할 수 없는 고물을 잔뜩 지고 가는 리어카와 형형색색의 오토바이 사이 여러 인종이 바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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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시에 온 사람들의 대부분의 이유는 5,289m의 덩치를 가지고 마을을 지배하는 킬리만자로 산을 보기 위해서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갖 인종의 관심을 받고 있는 산. 마사이족 언어로는 신이 사는 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스와힐리어로는 하얀 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오로지 아프리카에서 첫 번째로 높은 산이라고 기억될 뿐이다. ‘첫 번째’를 사랑하는 물질 사회에서는 당연한 감성이다. 굳이 기록을 남기며 처음으로 산꼭대기에 오른 사람이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적이라는 사실 역시 딱히 놀랍지 않다.




  우리는 차가운 공기로 세수를 하며 호텔로 겅중겅중 발걸음을 재촉했다. 먼지 색깔의 아우라를 풍기며 들어간 호텔에선 경비원이 우리를 막아섰다. 왜 그러냐고 한 마디 쏘아붙이려고 했지만 로비의 유리창에 비친 나의 모습을 마주하고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발에는 붕대를 감고, 옷은 다 찢어져 남루했으며 덧 데어 기운 가방을 멘 동양인, 기묘한 외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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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우 안내를 받아 들어간 방에는 온후하게 늙은 신사가 오도카니 서있었다. 그가 바로 닉의 아버지 니엘이었다. 샤워를 방금 마쳤는지 머리칼이 젖어있었고 샤워 가운을 걸치고 있었지만 흐트러졌다는 느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그 특유의 느낌은 그의 몸가짐에서 오는 고상함이었다. 니엘은 외모보다 더 기억될만한 몸가짐을 가지고 있었다. 반바지 아래 삐져나온 앙상항 다리, 불뚝 나온 배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이는 행동의 선이 촌스럽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이 투박해보이지 않았다.




  10년 넘게 만난 그의 여자 친구 스테이시도 니엘에게 어울리는 근사한 여인이었다. 은은한 배려를 할 줄 아는 어른이기도 했다. 일본에서 근무한 경험을 살려 내가 대화에서 붕 뜨지 않게 대화를 요리조리 가이드해주었고 닉에게 담배를 제발 끊으라는 니엘의 잔소리를 적당히 유머로 말아낼 줄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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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인도풍의 저녁식사를 하며 맨발 여행에 대한 안부와 각각의 에피소드를 나열했다. 닉과 나는 그간 아프리카에서 겪은 일을 말했다. 니엘은 닉을 만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낮에 모시를 둘러보다 맨발의 여자를 만났는데 알고 보니 미친 여자였다는 이야기, 그 여자가 자신과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한 이야기를 키득거리며 나에게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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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하는 와중에 니엘은 몇 번이고 닉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피로 얽힌 관계 특유의 각별함이 보였다. 니엘이 닉을 보며 미소 짓는 것만으로 아버지가 아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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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식 영어와 호주식 발음, 나의 미숙한 영어 때문에 대화에 쉬이 살이 붙지 않았다. 허나 어떻게든 서로를 이해하려는 의지를 불태우며 우리는 끝끝내 대화를 이어나갔다. 오히려 말의 뼈대로만 대화를 나눈 것 같아 속이 후련했다. 언어, 소통 같은 피상적 단어보다 중요한 건 역시 상대방을 대하는 의지와 태도였다.  




* 마지모토     

  별다른 일정이 없던 우리는 아버지와 스테이시를 따라 움직였다. 그들의 일정에 따라 다음날, 마지모토와 킬리만자로로 향했다.

*마지모토는 스와힐리어로 뜨거운 물이라는 뜻이다. 같은 곳을 가리켜 챔챔이라고도 부른다. 마찬가지로 온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스와힐리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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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를 타고 도착한 마지모토는 유리같이 맑은 연못이었다. 이른 시간에 도착한 그곳은 아직 세상에 발견되지 않은 어떤 성역처럼 고요하여 우리 스스로가 마치 못된 짓을 꾸미러 온 침입자처럼 느껴지게 만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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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싱한 오이 색깔을 가진 마지모토의 물은 흐르는 기색도 없이 맑았다. 솜씨 좋은 공예가가 암녹색 유리로 조형해놓은 것 같은 수면에서는 공기의 흐름이 결결이 나타나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조짐을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수면 위에 드린 나의 그림자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내가 가진 그림자의 무게로 물결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멋들어지게 가로 방향으로 자란 나무에는 사람들이 수 억 번 걸터앉은 흔적이, 무성한 수풀로 주름 잡힌 하늘에서 내려오는 은혜로운 햇살은 나의 기억에 깊은 굴곡을 남기기 충분했다. 마지모토는 빛의 직선을 그대로 통과시키며 하나의 동요도 없이 자신의 밑바닥을 솔직하게 드러내었다. 별스럽게...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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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모토에는 지저분한 사람 몸의 부산물을 먹고사는 민물고기가 살고 있었다. 신나게 수영을 하다 만약 몸 주변으로 치어들이 모여들면 미약한 생명체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조그마한 주둥이로 피부를 간질일 때면, 투박한 모양새가 마치 남자로 탈바꿈하는 소년을 엿보는 것 같아 입에서 쿡쿡 웃음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계속 쿡쿡, 쿡쿡. 평화로운 정취가 온몸 가득 퍼진다.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평범하지 않은 풍경들이 눈 안에 가득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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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닉과 나는 조용히 수영을 했다. 투명한 물로 피부를 적시자 무언가 내 자신을 정성껏 청소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 둘을 보고선 원래는 물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했던 니엘이 수영을 하기로 마음을 바꿨는지 뱃살을 출렁이며 다가왔다. 그는 나무 윗동에 묶여 있는 줄을 잡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와 닉, 트레이시는 나름의 흥미를 선사하는 그의 모습을 주목한다. 니엘이 입 주위가 팽팽해진다. 무거운 몸으로 도약을 한다. 줄이 연결된 나뭇가지가 니엘의 무게에 거짓 없이 휘어진다... 그리고 모두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바깥세상을 조롱하듯 울창한 정글 속 유유히 흐르는 물은 충분히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유속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나는 온천에 사는 새끼 원숭이가 끽끽거리는 소리를 구령 삼아 못을 거슬러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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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앞에서 니엘의 흰머리와 닉의 갈색 머리가 목적 없는 공방전을 벌이는 것이 아름다웠다. 이렇듯 계획 하나 없었지만 여행은 언제나 내 머릿속에 머무는 감각 이상의 세계로 나를 안내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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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여행의 특성은, 무언가 사람의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문득 시간이 연하고 느릿하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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