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제 이준서 Apr 07. 2024

총몽, 갈리, 알리타 배틀앤젤

아이 러브 갈리

영화 쇼생크탈출에서 보통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대개는 보통 주인공 앤디가 긴 하수로를 지나 바깥세상에 나온 후 두 팔 벌려 자유를 만끽하며 비를 맞는 장면을 꼽을 것이다. 아니면 그가 19년간 판 굴이 발견되는 순간이거나. 영화개봉 당시에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에게 가장 기억되는 장면은 아주 잠깐 나오는 장면인데 앤디가 오픈카를 타고 멕시코 국경을 지나 그가 교도소에서부터 가고자 했던 멕시코 지와타네호를 향해가는 짧은 장면이다. 오행 중 본인이 가장 부족한 기운이 화(火) 기운인데 화기운을 보충하는 방법 중 하나가 여행이다. 그래서 실제로 여행을 좋아한다. 내가 그 짧은 장면에서 본 것은 어디든 내가 가고자 할 때 갈 수 있는 용기, 자유, 여유였다. 앤디는 조금 다른 것이 지와타네호는 그에게 여행이 아닌 정착지였다. 좁은 감방 속에서 시야가 환히 트인 바닷가 마을은 그에게 있어 그가 그가 가야 할 곳이며 그가 살아갈 곳이며 그가 응당 받아야 할 평생의 보상이었을 것이다. 소위 지상낙원, 도솔천, 유토피아를 누구나 꿈꾸지만 누구나 그곳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상상 속에 존재하는 유토피아가 아닌 지금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유토피아가 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사람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환경이 아닌 나, 사람이 변하지 않는 한 유토피아는 죽음너머 하늘세계라는 몽상가의 언어도단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몇몇 만화를 접하게 되었는데 만화 총몽에서 ---영화로 알리타 배틀앤젤의 원작이다--- 주인공 갈리가 사는 곳은 고철마을이고 그 위로 공중도시가 하나 존재한다. 그곳의 이름은 자렘.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 위로 하나의 도시가 더 존재한다. 그곳의 이름은 예루. 둘을 붙이면 예루자렘. 매트릭스의 지하도시 이름이 시온이다. 시온은 예루살렘 남서쪽에 자리 잡은 해발 765m의 산으로 '시온 산(Mount Zion)'으로 불린다. 시오니즘이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조상의 땅이었던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대인의 민족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던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t) 운동으로,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됨으로써 실현되었다. 로스차일드가문이 자본을 댔고 영국의 외무장관 벨푸어가 선언함으로써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국가 이스라엘이 건국된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약속한다는 맥마흔 서한(1915년)과 반대되는 이중선언인 셈이다. 세계사에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의심되면 반은 영국을 의심하라고 하였다. 서방으로선 석유패권을 위한 친서방국가가 중동지역에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유대인이 살았던 것은 맞으나 그 기간이 짧았고 그리고 이 땅에 유대인이 모두 떠난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은 구약을 공통분모로 하며 십자군전쟁을 비롯하여 이곳은 그 어느 국가나 민족의 영구지배 하에 있지 않았다. 여하튼 이렇게 이스라엘은 금권에 의해 시오니즘을 완성한다. 이렇듯 유대인에게 예루살렘은 언젠가 다시 돌아갈 땅이라는 의미이다. 보지는 않았지만 영화 엘리시움에서도 공중도시가 등장하며, 설국열차 또한 우생학에 근거하여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바글대는 빈민굴 같은 맨 뒤쪽의 꼬리칸, 그리고 선택된 사람들이 술과 마약까지 즐기며 호화로운 객실을 뒹굴고 있는 앞쪽칸으로 나뉜다.

엘리시움, 설국열차
총몽&주인공 갈리

예루자렘과 고철도시. 그 자렘에 올라가려는 유고와 그의 사이보그 여자 친구 갈리. 유고에겐 그곳이 유토피아이다. 그 어떤 이유와 대가도 필요 없는 곳. 그런 갈리의 눈에는 유고가 유토피아이다. 각자의 유토피아가 다를 때 갈리의 유토피아인 유고의 유토피아가 붕괴되었을 때, 과연 갈리의 유토피아도 영원할 것인가? 내용을 자세히 스포하진 않겠지만, 자렘과 고철도시의 사이보그를 통해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강력한 메타포를 던진다. 인간의 의식이 존재하고 사이보고 몸을 가진 자는 사람인가? 인간의 몸과 그의 모든 기억이 저장된 칩을 장착한 인간은? 트랜스휴먼? 메타휴먼? 포스트휴먼? 나의 모든 기억을 아바타로 전이한 아바타는 인간인가? 아니 나인가? 나는 뇌인가? 나의 기억이 나인가? 그 기억의 총체가 나인가? 나를 나라고 부르는 나는 나인가? 나를 정의할 수 없다면 너는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나는 너라는 존재가 있어야 존재한다. 그렇다는 너는 또 다른 나인가?


은하철도 999에서 철이는 기계몸을 갖기 위해 메텔과 길을 나선다. 9는 인간이 그리스도의식에 가기 위한 중요한 실마리이다. 이 얘기는 여기서 넘어가고... 그렇게 긴 여정 끝에 드디어 기계행성에 도착하고. 거기서 철이가 본 것은 유토피아 너머의 디스토피아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질문이 나온다. 기계몸을 가진 나는 완벽해진 건가? 그렇게 철이는 의문을 남긴 채 기계행성에서 발길을 돌린다. 갈리가 사는 고철마을에는 갈리와 같이 뇌만 인간의 신체일 뿐 몸은 기계인 사이보그들이 많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인간인가? 통속의 뇌 가설은 데카르트의 악마 가설을 현대적으로 풀이한 것으로, 1981년에 철학자 힐러리 퍼트넘이 제시하였다.

통 속의 뇌

우리의 뇌를 머리에서 분리해서 통 속에 넣고 생명력을 유지하게 한다. 그리고 모든 외부의 자극을 컴퓨터로 만들어서 뇌에다가 주입하고, 뇌가 가상의 환경만을 느끼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뇌는 자신이 진짜 세계와 마주하고 있는지, 아니면 주어지는 자극에 반응하고 있을 뿐인지 구분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실제 세계와 마주하고 있는 것인지, 통 속에 들어있는 우리의 뇌가 가상의 자극을 현실인 것처럼 느끼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전기적 신호와 화학적 신호에 반응하는 자유의지 없는 생체적 매개체인가 하는 것이다. 벤자민 리벳의 자유의지 실험에 의하면 우리의 자유의지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존재하는가에 의한 의구심을 낳는다. 우리가 공을 집으려 한다고 하자. 당연히 공을 집으려는 인간의 의지, 그리고 그 의지에 대한 전기적 신호가 손에 전달되고 그리고 공을 집을 것이다. 그러나 리벳의 실험에 의하면 실제로는 전기적 신호가 인간의 의지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파블로프의 개

보지는 않았지만 영화 트랜센더스에서 조니뎁은 자신의 뇌를 슈퍼컴퓨터에 업로드하고 과학의 힘으로 신과 같은 능력을 얻는다. 영화 매트릭스와 레디 플레이어 원은 2045년이 배경이다. 2045년은 인공지능의 특이점이 촉발된다고 예측되는 해이다. 일론 머스크는 스타 링크 프로젝트를 위해 2030년을 전후하여 4만대 가량의 위성을 우주에 띄울 계획이다. 그리고 인간의 뇌에 칩을 이식하는 뉴럴링크와 결합하여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얻은 갖가지 데이터를 토대로 인공지능을 개발할 것이고 그렇게 구축된 인공지능은 인간을 일자리에서 몰아내고 그들의 입맛에 맞게 사회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유토피아와 총몽의 예루잘렘이 우리와 같은 평범한 시민에게도 유토피아일지 디스토피아일지는 각자 스스로의 판단이다. 총몽 최대 빌런인 디스티 노바의 생각 또한 인간이란 전기적 생체신호에 충실한 생리학적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일찍이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 1984를 통하여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보여줬으며 블레이드 러너에서도 암울한 미래상을 통하여 인간의 존재에 대한 심각한 의문점을 남긴다. 그렇다면 위의 실험에 대한 전제는 항상 옳은가? 우리의 뇌가 지금 통 속에 들어가 있고 지금 나라고 믿는 나는 나를 나라고 믿는 자아 없는 생리적, 전기적, 화학적 유기물인가?

트랜센더스, 뉴럴링크

한 쌍의 남녀가 결혼을 하여 아기를 수태하고 보통 10 달이면 산고를 거쳐 이 세상에 태어난다. 처음 생기는 장기가 심장이다. 형태발생장 이론에 따라 심장이라는 하나의 장, field가 생기고 뒤따라 간의 장, 손의 장, 발의 장과 같은 에너지 필드가 생겨난다. 그리하여 그 에너지 필드에 의하여 설령 팔이 떨어져 나가도 한동안은 팔이 있는 것과 같은 통증을 느끼게 된다. 그 형태의 장이 심장에서 시작하여 뻗어나가는 모습이 형태발생장, 프랙탈fractal 이론이다. 인도 철학에서는 심장이 만들어지고 난 후 그 심장의 뒤쪽으로 미세하게 영혼이 자리를 잡으며 ---그 자리를 흐릿 빠드마라 한다--- 뇌는 그 이후에 만들어지게 된다. 보통 참선을 하게 되면 혀끝을 입천장에 대는데 물리적으로 심장과 연결된 혀 끝과 시상하부가 맞닿은 입천장을 이어줌으로써 영과 두뇌를 이어주는 것이다. 과학적인 견지에서 영혼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은 어려우나 인류의 역사에서 빠짐없는 존재하는 여러 문헌이나 사례, 종교 등에서 추론할 수는 있다. 우리가 나라는 사람을 가리킬 때 가슴을 가리키지 머리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인간이란 존재는 영혼의 존재는 차지하더라도 단순히 두뇌라는 장기 하나인 것은 아니다. 뇌간을 포함한 뇌 전체가 손상된 경우와 달리 대뇌의 일부가 손상된 식물인간인 상태에서도 회복되는 경우가 있다.


인간에게 유토피아가 오지 않는 것은 단지 제도나 체제의 문제만은 아니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외쳤던 마르크스도 자본가의 혁파는 부르짖었으나 은행가의 혁파는 외면했다. 동물농장에서 쫓겨난 인간 농장주를 대신하여 탐욕스러운 돼지들이 그 자리를 이어받아 다시 부르주아의 지배는 시작된다. 문제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눈은 동물들과 달리 태양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리고 피부는 자외선에 약하고 귀는 좁은 청각 주파수를 가지고 눈은 좁은 전자기 스펙트럼만 포착한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변해야 한다 해서 마음가짐, 사상, 철학을 얘기할 줄 알았는가? 아님 갈리나 은하철도의 철이처럼 기계의 몸을 가져야 한다는 것인가?

만화 에반게리온을 보다 보면 뜬금없이 유대교 카발라의 생명나무(세피로트)가 등장한다. 유대교 카발라의 생명나무는 천부경과 같은 우주의 법칙을 설명하고 있다. 바로 10개의 빛과 22개의 길이다. 거기에 소위, 불교에서 말하는 공, 무극 그리고 카발라의 아인 소프에 이르는 길을 더하여 총 33개의 길이 존재하며 인간의 척추는 총 33개로서 척추의 기저에 존재하는 쿤달리니가 척추를 통하여 정수리, 사하스라라에 도달하는 인간 의식의 진화의 길을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프리메이슨의 가장 최고직은 33도이며 그 길은 3분법에 의해 생명나무의 꼭대기 근본자리 아인 소프에서 최초의 1 케테르가 생겨나고 인간의 길, 하늘의 길, 땅의 길에서 차츰 의식의 물질화가 이루어져 말쿠트에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생명나무는 거꾸로 자라나는 모습니다. 최초의 근본자리에서 인간의 의식으로 떨어진 이곳에서 우리는 다시금 중간자리, 인간의 길을 통하여 말쿠트에서 티페레트, 케테르로 올라가야 한다. 천부경, 세피로트를 입체화한 것이 피라미드이며 피라미드는 인간 의식의 상승을 위한 입문 비전 의식(이니에이션)치르는 장소였다. 세기적인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의 3, 6, 9 코드도 천부경, 생명나무를 숫자로 표현한 것이다.

테슬라 코드 369

천부경의 한 구절인 일묘연만왕만래(一妙衍萬往萬來)에 의하면 하나하나의 세피로트에도 10단계의 세피로트가 존재한다. 신지학에서 말하는 아래에서와 같이 위에서도(As above, so below)가 나오는 대목이며 말하자면 우주는 대우주, 인간은 소우주이며 이 또한 프랙탈이다. 이상은 조하선 님의 [베일 벗은 천부경]에 자세히 나온다. 10수 사상은 이러한 프랙탈 이론에 의하면 9수와 다름이 없다. 수비학적으로 10은 곧 1이다. 끝맺음이자 새로운 시작이기에 9수와 10수는 다름이 아니다. 어렸을 때 디아블로란 온라인 게임을 했었는데 난이도 노멀을 액트 1부터 끝까지 깨고 나면 다시금 난이도 나이트메어의 액트 1이 똑같이 시작된다. 하나의 세피로트 안에도 또 하나의 세피로트가 존재하고 10번 말쿠트에서 정진하여 케테르까지 올라가면 또 다른 의식의 장, field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엔 끝이 없고 깨달음엔 끝이 없다. 그만큼의 깨달음이 있고 각자의 깨달음이 있을 뿐이다. 인도말로 구루(guru)란 '중요한 사람'을 뜻하는 의미로서 가치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이다. 스승이라고 쉽게 번역하는데 구루란 구루로서의 삶을 보여주는 사람이지 사람들 앞에 스승으로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다. 고로 본인이 인류의 스승임을 자처하는 자는 의심을 해야한다. 구루 위에 또 구루가 있으며 깨달음이란 끝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지구가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의식 레벨은 3개 뿐인데, 1레벨은 원초적인 영역이고 2의식 레벨이 현재 우리 그리고 3레벨이 '그리스도 의식' 또는 융합의식(unity consciouness)이라고 한다.

다양한 생명나무

만화 총몽에서 갈리는 끝없는 질문과 그 질문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인간성이란 명제와 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수많은 도전과 갈구를 낳는다. 인간의 몸과 정신이 진정 인간이기 위한 기준은 무엇이며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실존주의적 물음으로, 선택을 통해 자신의 자아를 성해야만 하는 인간의 본질을 기계몸을 가진 갈리를 통해 끊임없이 되짚는다. 동양사상은 정기신(精氣神), 성명정(性命精), 영혼백(靈魂魄)을 통해 인간의 존재를 규정짓는다. 또 다른 만화인 간츠나 총몽의 빌런인 디스티 노바의 세계관은 서양의 데카르트식 기계론적 사고관이다. 최근의 경향은 모든 학문과 사상의 융합, 곧 통섭이다. 인간, 생명이란 주제가 빠진 빅데이터들의 집합체인 인공지능 AI는 인간을 생체 유기물로 정의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될 경우 인간의 미래는 스카이넷에 의한 인류종말이라는 터미네이터의 결말을 맞게 될 확률을 높일 것이다. 그래서 갈리가 자신이 과연 인간인가 하는 고민은 아직 불완전한 의식을 가진 인간이 설명하기 난해한 문제이다. 생명나무의 타락한 물질계 말쿠트로 전락한 지금의 우리로서는 그 이상의 의식세계를 이해할 수가 없다. 3차원에서 시간선이 더해진 한 단계 위인 4차원조차도 절대 이해할 수가 없다. 고대(古代) 우리는 정말로 지금보다 상위의 의식을 가졌으며 의식의 추락은 수명의 단축을 낳았고 DNA의 축소를 가져왔고 그로 인한 의식의 상승 기회조차 적어졌다. 따로 얘기하였지만 2025년을 끝으로 칼리유가가 끝이 난다. 허나 갑작스러운 변화는 없을 것이다. 전 지구적인 변화는 없겠으나 각 개인은 노력하고 정진해야 한다. 나의 의식의 장, field가 변하면 또 다른 의식의 장이 변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시크릿, 끌어당김을 원하지만 전체 파이의 성장없이 나만 끌어당긴다면 그것 또한 또 다른 이기심의 표출이 아닌가. 전체 파이를 늘리기 위해서 몸만이 아닌 의식을 성장하는 노력들 예로써 독서, 좋은 음악 듣기, 자연 산책하기, 봉사하기, 명상 등등을 해야 한다는 교과서적인 얘기로 끝을 맺겠다.


천부경

※ 덧붙여 명상을 하십시오. 명상은 공인된 안전하고 쉬운 명상, 다음카페 '사단법인 빛명상'을 추천합니다.

사단법인 빛명상 - Daum 카페

작가의 이전글 칼리유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