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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강 Nov 29. 2024

내 이름은 레이몽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줄 때

자녀가 많았던 우리 어머니 세대에는 아이들 이름을 맞게 부른 적이 거의 없었다.

돌림에 '미'자가 들어가면 '미'만 맞고 뒤는 섞여서 다 틀리는 게 다반사였다.

그래도 알아듣고 심부름도 하고 야단도 맞고(칭찬은 거의 없던) 동생도 돌보곤 했다.


불어를 공부하던 대학에서 프랑스인 여교수가 학생들에게 부르기 힘든 한국 이름대신 프랑스 이름을 지어 주었다.

대학 입학 후 50년 만인 2년 전에 찐친들을 만나서 그때 그 시절의 불어 이름을 서로 불러 보며 깔깔거리는데 분명히 웃는데 얼굴은 하회탈이 울고 있는 느낌은 뭐지?

마음은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데 몸은 이미 삭아서 넷이 사진을 찍는데 뒤로 넘어갈 것 같아서 담벼락에 기대던가, 고풍스러운 건물이면 육중한 나무문의 쇠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는.


나는 그 여교수가 'Raymonde'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내가 보이쉬한 커트 머리에 청바지를 입고 다녀서인지 '아네뜨'나 '엠마'같은 예쁜 이름이 아닌 남자 이름인 'Raymond'에다  여성을 나타내는 'e'를 붙여준 것 같아서 4년 내내 불만이었다.

그 여교수는 그 옛날에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서 한국에 왔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한국의 매서운 겨울에도 맨다리에 양말도 안 신고 구두를 신었던 그 백옥 같았던 다리만 지금도 선명하게 생각난다.

연탄 난방으로 온돌방의  꺼멓게 탄 아랫목에 펴있던 뜨끈뜨끈한 이불속을 파고들던 엄청 추웠던 시절이었는데 얼마나 추웠을까 하며 내 다리가 시린듯한 동정심과 함께.


목화솜의 두꺼운 청 홍 양단 이불 안에는 스텐 밥통과 뚜껑 덮인 밥주발이 보온되고 있었다. 빨간 내복과 공작실 털바지를 입고도 꽁꽁 얼은 채로 밖에서 돌아와서 이불속으로 쏙 들어가면 옷의 찬 공기가 따뜻한 이불속으로 빠져나가던 그 묘한 기분을 느끼면서 나른함에 빠져들곤 했다.

교복 바지도 주름을 세우기 위해서 요 밑에 깔고  자동 다리미질을 효과적을 하면서 자기도 했다.

그렇게 춥고 위풍이 센 옛날 집에서 살면서 그 백인 여교수의 창백한  살을 보니 외국 사람들은 추위를 안 타거나 보일러 집에 사는 부자라고 생각하면서 프랑스는 멀고도 이상한  나라, 엄청 부자 나라 것 같은 부러운 이질감을 느꼈다.

땟국이 흐르는 가난한 한국 사람으로써.


남자들은 다 늙어서 만나면 계급장을 떼고 만나면 임원이나 사장으로 퇴직해도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게 보통인데 이상하게 성직자인 친구들을 만나면 동갑인데도 꼬박꼬박 '목사님'이나 '신부님'으로 부른다는데 보다 못한 한 친구가 '야, 친구한테 무슨, 이름 부르라고' 면박을 준다나.


세월이 흐르면서 누구 엄마, 누구 와이프, 회사 다닐 때는 직함으로 불리다가  누구 할머니, 할아버지로 불리면서 늙어간다.

요즘 같아서는 결혼을 기피하는 자녀들 때문에 손주 보기도 하늘의 별따기가 되어가는 추세이다.

어쩌면 현직 시절의 승진해서 쟁취한 명패보다도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이름이 더 어깨에 뽕이 들어가는 것이 타당한 시대가 되었나?

손자들이 있는 할머니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다가  세월이 하 수상하니 나 같아도 결혼 안 하겠다는 이율배반적인 소리를 한다.


나의 이름을 불러주던 부모님은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시고 다만 친구들만 남아있다.

하굣길에도 친구가 청소 당번이면 기다렸다가 손 꼬옥 잡고 같이 가고 대학교 때도 어두컴컴한 학교 앞 다방에서 숙제하고 버스 정류장까지라도  팔짱 끼고 같이 가던 친구들, 결혼해서 누구 엄마로 불리던 때에나 누구 할머니가 된 지금도 멀리 있지만 보이스톡(페이스 톡은 절대 안 함)으로도 서로 이름 불러가며 수다를 떨 때가 제일 즐겁다. 

내년에 서울에 친구들 만나러 가려니까 오랫만에 만나야 하는 친구들과 지인들이 55명이더라. 하루 나가면 하루 쉬어야 하는데 도대체 얼마를 머물러야 하는지...


여자들은 보통 1시간씩 떠드는데 반해 남편들은 '잘 있냐? 잘 있다'로 끝난다는 것이 이해불가이다.

 너무 점잖아서 그런지 아니면 점점 비사교적이 돼서 그런지 있던 친구들 마저 사라지고 외톨이가 되어 가고 있다.

남자들이 나이 들면 여성 호르몬이 나와서 눈물과 함께 말도 많아진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고 그저 모든 게 다 줄어드는 게 맞는 것 같은데.


 

50년 전 친구들은 지금 만나거나 목소리만 잠깐 들어도 그때의 감성이 살아나서 마냥 즐겁다.

정말 내 이름을 불러주는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는 생각에 초조하지만 그래도 그 정겨운 목소리(약간은 쇳소리가 섞인)를

들을 수 있다는 것에 감동한다.

 

한국이름, 불어이름, 캐나다에 와서는 영어이름도 생겼지만

아직도 한국이름을 불러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고맙다.


아직 갈 길이 남아있긴 하지만 언젠가 종착역에 닿을 때까지 부지런히 서로의 이름을 불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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