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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용품 코너에 서서 잠시 울다.

by 미스블루

미국서부의 대부분의 학교는 8월에 새 학기를 시작한다.

뜨겁고 뜨거운 한여름에 새 학기라니...

새 학기는 3월에 꽃샘추위가 함께해야 제맛이 나지 않은가 싶지만..

그래서 마트에는 7월부터 백투스쿨(Back to school) 부스가 설치된다.

그곳에는 각종 학용품이 산처럼 쌓여있다.

노트, 연필, 풀, 가위, 파일, 폴더, 색연필, 도시락 가방과 물통까지..

그리고 이때가 학용품의 가격도 가장 저렴하다.

나는... 학용품을 보면 미치는 사람이다.

백 투 스쿨 부스가 설치되면 나는 그곳에서 이것도 만지고 저것도 만지며 넋을 빼고 서있다.

가지런한 색색가지의 색연필을 보면 미치고, 한 번도 열어보지 않은 새 노트를 보면 환장을 한다.

어릴 때 집안 식구들은 나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쟤는 준비물 사고 싶어서 학교 다니나 봐...'

그렇다.

그 말이 딱 맞다.

공부를 하다가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학용품을 써야 해서 공부를 했다.^^


남의 나라에서 아이들을 키우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영어가 서틀은 엄마는 학교에서 보내오는 공문의 내용을 하나라도 놓칠까 늘 긴장하며 살았고, 새 학기엔 그 긴장감이 고조에 달했다.

내가 뭔가를 놓쳐서 아이만 멀뚱해지는 일이 생길까 봐..


미국학교는 새 학기가 시작되면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사진을 찍는다.

그 사진은 학기가 끝날 때 학교앨범에 학급별로 실린다.

전문사진사가 와서 사진을 찍는데 그렇다 보니 사진을 찍는 날 아이들의 옷차림은 시상식을 방불케 한다.

남자아이들은 머리에 헤어프로덕트를 발라 머리카락이 한올도 흐트러지지 않도록 고정을 하고 여자아이들도 고대기를 동원하고 갖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멋진 옷을 입고 학교에 온다.

친한지인도 나와 마찬가지로 영어도 서툴고 정신없이 연년생의 아이들을 챙기며 사느라 사진 찍는 날을 잊어버렸고, 아이는 그냥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반바지에 헐렁한 티셔츠를 걸치고 머리는 부스스하게 하고 학교를 갔나 보다.

초등학교 1학년쯤 되었을까?

저녁에 샤워를 시키는데 아이가 욕조에 쭈그리고 앉아 작은 소리로 말을 하더란다.

오늘 사진 찍는 날이었다고.. 엄마 왜 잊어버렸냐고... 나만 옷을 제대로 입고가지 못해 너무 창피했다며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얘기를 들을떄마다 가슴이 철렁하고 함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어느 날은 또 파자마 데이라고 해서 백화점에 달려가 멋들어진 파자마를 사입혀서 학교에 보냈더니 다들 집에서 입던 구멍 난 내복 같은 것을 입고 왔다고..

너무 차려 입혀 보내서 오히려 또 창피했다고..

학부모 노릇을 처음 하는 우리들이 이곳에서 최대한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아이들과 다르지 않게 해서 학교에 보내는 일이었다.

우리가 우리나라에서 아이들을 키웠다면 남과 다르고, 다르지 않은 것에 그렇게 목숨을 걸었을까 싶다.

남의 나라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란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최선을 다했지만 예상하지 못한 결과에 어떨떈 웃겨서 바닥을 구르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속상해서 서로 붙잡고 울다가를 반복했다.

어느 장단에 어떻게 맞춰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내가 일하는 한국학교도 개학을 했다.

지난 학기에 가르쳤던 내 아이들이 달려와 안긴다.

아이들을 꼭 안아준다.

그리고 새 아이들이 학년을 올라와 나에게 맡겨진다.

우리 한국학교에 처음 왔다며 남자아이인 T와 엄마가 긴장한 얼굴로 개학식에 참석해서 앉아있다.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교실로 올라가는 나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며 걱정을 토로한다.

'우리 애가 잘 못할 거예요.. 한국어 조금 배우다가 손을 놓은 지 일 년도 더 됐거든요.. 다 잊어버렸을 텐데 어쩌죠.."

T의 엄마는 걱정이 되어 그 예쁜 얼굴에 웃음기가 하나도 없다.

꼭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아이들 어렸을 적의 나를..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다가 멈추어 선다.

그리고 T의 엄마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 걱정 하지 마세요. 다 괜찮을 겁니다.'

이 말은 어쩌면 그 시절 내가 선생님들한테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 것이다.

그날 나는 젊고 어렸고 겁이 많던 엄마였던 나에게 이 말을 해주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우리 아이들은 너무 커버려 더 이상 학용품이 필요하지 않다.

학용품부스에서 더 이상 살게 없지만 가위도 만지고 풀도 만지며 나와 아이들을 추억한다.

그래도 두 번 다시 손에 잡아보지 못하는 그 시절을 잘 견뎌낸 나를 안아주며 코끝이 잠깐 시큰하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가듯 핑크색 노트 몇 권을 사서 명랑하게 집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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