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 만에 이메일의 편지함은 가득 쌓였다.
읽지 않은 문자도 그득하다.
왜 이런 사태가?
'블랙 프라이데이' 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떙스기빙데이'이고 내일은 '블랙프라이데이'라는 미국의 전 국민 쇼핑의 날이다.
아마존, 백화점, 화장품점, 소매점, 코스코 까지 합세하여 내일 단 하루, 네가 우리 물건을 사지 않는다면 너 평생에 이런 가격으로 우리 물건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협박에 가까운 이메일과 문자를 하루 종일 날린다.
쌓이는 이메일과 문자에 이제는 심장까지 두근거린다.
미국에 처음 오고,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이 시간을 이용해서 쇼핑을 많이도 했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왜 그렇게 필요한 물건이 많았는지 모르겠다.
사도사도 필요한 것은 계속 나왔다.
그리고 특히 이날 무언가를 사지 않으면 굉장히 손해 보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일 년 내내 쇼핑을 하고 있는데 '블랙프라이데이'라고 하면 더욱 기세를 몰아 쇼핑을 했었다.
언젠가 떙스기빙 연휴를 이용해서 샌프란시스코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내가 묵고 있는 호텔방 창문으로 백화점의 정문이 바로 보였다.
'블랙프라이데이'에는 아침 6시나 7시부터 상점이 문을 열기 때문에 아침에 일치감치 그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한차례 하고 돌아왔었다.
그런데 호텔에서 조금 쉬려고 하면 그 백화점 정문으로 끊임없이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면 나는 벌떡 일어나 다시 백화점으로 달려 들어갔다.
뭐라도 또 사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또다시 호텔방.. 조금 쉬려고 누웠다가 저녁이 되어 밖이 어둠 컴컴해지면서 백화점에 화려한 불빛이 들어오고 더 많아진 사람들의 행렬을 보면 몸은 자동으로 다시 백화점의 회전문을 밀고 있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여행이었다.
정말 그날이 그 물건을 가장 값싸게 살 수 있는 날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물건도 정말 있고 아닌 물건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정신없이 물건을 사고 있는 사람들 틈에 있으면 이게 정말 싼 건지 뭔지 이 물건이 정말 필요한 건지 아닌지 가늠을 할 수 없게 된다.
제정신으로는 그곳에 있을 수가 없다.
정말 알뜰한 사람들은 이 날을 이용하면 정말 괜찮을 수도 있다.
꼭 필요한 물건만 사는 사람들 말이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때 나누어줄 선물 목록을 미리 작성해 두었다가 이날 구입을 하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하고 쇼핑 목록은커녕 그냥 어슬렁거리고 나섰다가 필요하지 않은 물건만 잔뜩 사게 되는 수가 많다.
전에는 알뜰하게 한답시고 '블랙프라이데이'에 지인들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까지 사다가 넘치게 사놓고 정작 줄 사람이 더는 없어서 쓸 필요도 없는 물건들을 내가 먹고 내가 썼던 경험들도 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즈음이 되면 또 화려한 상점들에 이끌려 뭐라도 사게 되니 그냥 11월부터 12월까지 나의 지갑은 하루 종일 입을 벌리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는 블랙프라이데이 쇼핑을 안 하기로 했다.
이메일을 열어 세일을 한다는 물건 구경은 실컷 한다.
거의 대부분의 물건이 안 사도 사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요즘 유행하는 주물냄비는 색깔만 바꿔서 새로 선보이는 냄비인척 광고를 하고 작은 가전제품들은 뭐시기랑 콜라보를 했느니 하며 성능은 그대로인데 외관만 화려하게 바꿔 신제품인척 한다.
크리스마스에 지인들에게 나누어줄 선물도 사긴 사야 하는데 그것도 크리스마스 즈음에 닥쳐서 꼭 필요한 만큼만 사기로 했다.
그리고 그때도 세일은 똑같이 한다.
아침에 일어났다.
'블랙프라이데이'다.
어제 아침에 싸 먹고 남은 김밥 3줄과 컵라면과 뜨거운 물을 끓여 보온통에 담고 작은 통에 깍두기도 좀 담았다.
귤도 몇 개 넣고 좋아하는 바베큐맛 감자칩도 넣었다.
그리고 남편과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바닷가로 향했다.
한산한 비치에 도착하여 테이블에 가져온 음식을 펼치고 뜨거운 물을 컵라면에 부어 놓았다.
테이블 바로 앞에서 바다는 잔잔하고 푸르게 빛난다.
김밥을 하나 먹고 컵라면 한 젓가락과 깍두기를 집어 오독오독 씹어본다.
말이 안 나오는 맛이다.
김밥과 라면을 다 먹고 바삭한 감자칩을 먹으며 입이 텁텁해질 때 귤을 까서 입에 넣고 귤주스를 실컷 마신다.
바닷바람은 어느 때보다 시원해 두터운 윗옷을 벗게 한다.
촉촉한 바닷바람에 이런 공기는 약이라며 실컷 들이마신다. 그리고 공기값은 공짜다.
아침을 다 먹고 바닷가 옆으로 난 오솔길로 들어가 산을 오른다.
엘에이에 이십 년을 살았는데 이곳을 처음 와보았다.
사는 게 뭐가 그리 바빴는지 말이다.
거대한 산자락이 나를 품어 준다.
대자연 앞에 나는 먼지만 하다.
산은 나에게 어서 오라고.. 왜 이제야 왔냐며.. 나를 기다린 오랜 시간을 토로하는 것 같다.
산 정산에서 멀리 보이는 금빛의 바다를 바라보며 쇼핑쏀터에서 도망친 나를 대견해한다.
잘했다고.. 정말 잘했다고..
사람은 관뚜껑 닫힐 때까지 배우고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는 말을 되새기며 '블랙 프라이데이'는 아무것도 안 사는 노쇼핑이라는 뜻의 '블랙프라이데이'로 지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을 내려온다.
인간이 크게 변화하고 싶을 때 자연에게 달려가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과소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블랙프라이데이'에 1992년부터 'Buy nothing Day' 캠페인이 함께 진행되고 있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