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 부흐빈더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전곡을 연주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베토벤 스페셜리스트 루돌프 부흐빈더가 7일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노블레스>와 만나 베토벤을 말하던 그의 문장 끝에는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가 붙어 있었다.
지난 6월, 음악가와 관객이 가까운 거리에서 눈인사와 현장음을 공유할 수 있는 복합 문화 공간 ‘오드 포트’에서 피아니스트 루돌프 부흐빈더(Rudolf Buchbinder)의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60년이 넘는 연주자 생활 중 40여 년을 오롯이 베토벤에 집중한 전설의 피아니스트가 이날의 서막을 올리고자 연주한 곡은 피아노소나타 17번 ‘템페스트’ 3악장. 산들바람으로 출발해 폭풍으로 치닫는, 일필휘지 같은 그의 연주를 듣다가 문득 (이 기사를 위해 오마주한)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찍은 아널드 뉴먼의 사진이 떠올랐다. 사진 속 강렬한 흑백 대비와 몬드리안을 연상케 하는 차가운 균형감이 부흐빈더의 군더더기 없는 템페스트 선율과 닮았기 때문이리라.
‘스페셜리스트’라는 수식어로 인해 루돌프 부흐빈더가 소년 급제의 상징일 것 같지만, 기실 그의 삶은 크레셴도(점점 크게)에 가깝다. 1946년에 태어난 부흐빈더는 어머니가 학생증에 대신 서명해줘야 했던 다섯 살에 빈 음악원에 입학했다. 당시 그는 모차르트에 버금가는 천재로 불렸고, 열한 살 때는 빈 무지크페어아인(황금홀)에서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1번을 협연했으나, 이름을 떨치기 위한 원동력을 온전히 얻진 못한 듯하다. 오랜 시간 독주자가 아닌 트리오로 활동한 것, 1966년 출전한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5위를 차지한 것 등이 이를 방증한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묵묵히 베토벤을 연구했다. 그 결과 30대 중반에 발표한 첫 번째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전곡집이 “감정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가장 완벽한 베토벤”이란 평가를 받으며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부흐빈더는 2014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전곡을 완주한 최초의 피아니스트로, 2019~2020년에는 빈 무지크페어아인 150년 역사상 최초로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전곡을 연주한 유일한 협연자로 기록됐다. 2019년에는 ‘드디어’ 도이체 그라모폰과 전속 계약도 맺었다. 그야말로 베토벤에 의한 대기만성이자 베토벤의 베토벤을 위한 삶인 셈. 줄곧 독일어만 구사하다 “베토벤을 연주하면서 지치거나 싫증 난 적이 있나요?”라는 질문에는 “네버(never)”라는 단호한 영어와 함께 “베토벤의 음악은 우주처럼 한계가 없으니까요”라고 대답한 베토벤 찐러버 루돌프 부흐빈더와 베토벤의 영혼이 깃든 삶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 한국 공연이 60번째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전곡 연주예요.
한국 방문은 늘 설레요. 굉장히 멋진 청중이 있거든요. 음악을 경청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특히 감동받곤 합니다. 확실히 한국은 젊은 관객이 열정적인 것 같습니다. 세계 어느 공연장을 가도 한국만큼 낮은 연령대의 청중을 찾아보기 힘들어요. 한국은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친다죠? 어떤 학교는 학생 오케스트라까지 운영한다고 들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는 오늘날 유럽에선 드문 일이에요. 클래식 문화가 활기찬 건 한국 음악계에 매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당신이 한국인인 걸 축하해요.(웃음)
원론적인 질문부터 할게요. 왜 베토벤인가요?
어릴 때 아주 작은 방에서 자랐어요. 방에는 업라이트피아노(그랜드피아노 보급형)가 있었고, 그 위에는 작은 라디오가, 또 그 위에는 베토벤 형상이 있었죠. 자연스레 영향을 받았나 봐요. 베토벤 형상이 저를 평생 따라다녔습니다. 제게 베토벤은 혁명이자 인간미 물씬 풍기는 작곡가예요. 오랜 시간 베토벤 곁에 있었음에도, 공연할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배웁니다.
혁명이라고 말씀하신 건 어떤 의미인가요?
베토벤은 속도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유일무이한 작곡가입니다. 에스프레시보(espressivo, 풍부한 감정으로) 바로 뒤에 아 템포(a tempo, 본래 빠르기로)를 사용할 정도니.... 보통은 리타르단도(ritardando, 점점 느리게)나 아첼레란도(accelerando, 점점 빠르게) 뒤에 아 템포를 쓰거든요. 혁명과 다름없죠. 또 피아노소나타 27번은 한 악장에서 템포가 여덟 번이나 바뀌고, 29번 ‘함머클라비어’ 1악장은 메트로놈 숫자로는 절대 맞출 수 없을 만큼 속도가 빨라요. 이는 예전 피아노 건반이 오늘날보다 가벼웠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공연할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배운다고 하셨습니다. 이번 한국 공연에선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네요.
70번째 공연이 돼야 정확히 답변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웃음) 분명 같은 곡인데도 피아노를 칠 때마다 음향·템포·프레이즈가 늘 새롭게 다가와요. 베토벤 피아노소나타에는 희로애락이 담겨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느낄 수 있죠. 예로, 작곡가 대부분은 포르테 다음에 피아노를 사용하지만, 극단적 성격의 베토벤은 포르티시모(fortissimo, 매우 강하게) 다음에 피아니시모(pianissimo, 매우 약하게)를 썼어요. 그에게 포르티시모는 고통을, 피아니시모는 비밀을 의미합니다. 젊을 때는 ‘이런 해석만이 절대적’이라는 편협한 관점으로 음악을 정의하려 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음악적 요소를 연구해요. 피아니스트 중에는 전쟁하는 것처럼 빠르게만 연주하는 이가 있는데, 피아노 앞에 앉아 노래하듯 연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베토벤 시대의 포르테피아노와 차별화되는 부흐빈더만의 기법이 있나요?
흘러간 시간은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피아노처럼 엄청난 발전을 이뤄낸 악기는 없어요. 현악기만 해도 수백 년이 지난 악기를 여전히 사용하죠. 베토벤과 리스트는 그 시기의 피아노에 만족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다음 세대 피아노를 기대하며 연주하고 곡을 썼습니다. 만약 베토벤에게 2023년 피아노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엄청난 업적을 남겼을 거예요.
베토벤의 삶과 피아노소나타의 관계를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피아노소나타 1번부터 베토벤의 감정을 대변해요. 사랑에 빠졌거나 혹은 화가 났거나. 굳이 비교하자면, 그는 사랑에 더 자주 빠졌었죠.(웃음) 유머러스한 부분도 있습니다. 피아노소나타 16번을 편하게 들어보세요. 2악장을 듣노라면 높은 음역에서는 바보 같은 남자가, 낮은 음역에서는 진지한 남자가 머릿속에 그려질 거예요.
사랑이라는 주제를 빼놓을 수 없죠. 피아노소나타 14번 ‘월광’이 제자 줄리에타 귀차르디에게 헌정한 곡이란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귀차르디는 스무 살 때 베토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지만 귀차르디 집안은 계급도 재산도 없는, 게다가 청각장애까지 앓는 베토벤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어요. 결국 그녀는 오스트리아 귀족인 벤첼 로베르트 폰 갈렌베르크와 결혼했고, 베토벤은 지독한 사랑병을 앓았죠. 그런데 14번이 왜 ‘월광’이라는 제목과 연결되는지 이해가 안 돼요. 베토벤은 그저 음악을 통해 사랑의 감정을 표현했을 뿐이거든요. 사실 피아노소나타에 붙은 제목은 출판사가 판매 전략으로 붙인 거예요. 베토벤이 직접 제목을 지은 건 26번 ‘고별’뿐입니다.
후기 피아노소나타(제28~32번)는 50대 이전에는 치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접근하기 어려운 곡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40대 후반부터 50대 초반까지 베토벤이 작곡한 곡이더군요.
나이 든 사람만 후기 피아노소나타를 칠 수 있다는 건 오해예요. 다른 소나타와 비교할 때 후기 작품이 특별하거나, 위대하거나, 난해하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꼭 말하고 싶습니다. 고난도에 국한한다면, (열정으로 불리는) 중기 피아노소나타 23번은 베토벤이 가장 사랑하는 소나타였습니다. 하이든에게 헌정한 초기 피아노소나타 3번 역시 멋진 곡이고요. 인격적으로 성숙하다면, 열여섯 살이라도 충분히 연주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연습과 공연 외 베토벤을 사랑하는 또 다른 방식이 있을까요?
그동안 피아노소나타 악보 판본 39개를 수집했어요. 그중 리스트가 만든 판본을 가장 좋아합니다. 자신의 스타일로 수정하지 않고, 베토벤이 쓴 그대로 옮겨 적었거든요. 덕분에 리스트가 적어놓은 판본에는 아무런 실수가 없죠. 이 외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다양한 자료를 읽으며 베토벤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베토벤이 그의 방에서 무엇을 하는지 24시간 동안 관찰하는 거예요.
자신을 제외하고 추천하는 베토벤 스페셜리스트가 있다면?
솔로몬 커트너. 비록 피아노소나타 전곡집을 발매하진 않았지만, 꼭 들어봐야 할 연주자입니다. 어떠한 꾸밈 없이 악보에 온전히 집중하는 연주는 매우 어려운데, 커트너는 이를 잘 구현해냈죠. 빌헬름 켐프도 마찬가지고요. 요즘 사람들은 예전 연주자를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히려면 다양하게 들어봐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노블레스> 독자에게 인사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누군가 동양에서는 60이라는 숫자가 인생의 한 바퀴(사이클)를 의미한다고 하더군요. 60년 넘게 피아노를 쳤고, 이번 공연이 60번째라고 해서 특별하게 받아들이진 않으려고요. 앞으로 얼마나 멀리 또 어디로 갈지 모르겠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완성’이라는 표현과는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내년 6월 한국에서 피아노소나타가 아닌, 피아노협주곡 전곡(5곡)을 직접 지휘하고 연주할 예정인데요. 협주곡은 오케스트라와의 호흡이 중요하기에 소나타와 다른 분위기일 거예요. 이 공연도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202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