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랑 친해지는 중입니다
늦바람이 아니라 늦일바람인가?
희한하다 요즘. 회사 가는 게 나쁘지가 않다. 아니 오히려 가고 싶은 날도 있다. 나는 34년 인생 처음으로 회사가 괜찮다. 이렇게 변한 내가 신기하기도 하다. 이제 딱 이틀 뒤면 입사한 지 두 달째 되는 날이다. 그래서인지 이제 제법 적응이 됐다. 첫 출근 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60일이라는 시간이 지난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어느덧 이 낯선 환경과 사람들, 업무 속에서 나는 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처음에 지쳐 나가떨어졌던 하루하루에서 이제는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사람을 만나고 약속을 잡고, 설거지를 할 여유가 생겼다.
지금 되돌아보면, 나는 테스트를 거쳤다. 첫 테스트는 네이밍이었다.
브랜딩 과제 중에서도 고난도인 네이밍 과제를 받았고, 사람들의 비동의 속에서 협의를 하는 과정을 겪었고 네이밍을 최종 도출해 냈다. 두 번째 과제는 팀워크였다. 각기 다른 부서들과 협업하는 것. 서로 맞춰가고 커뮤니케이션하는 과정이 있었고, 우여곡절 끝에 어느 정도 조율이 되었다. 그다음부터는 업무의 연속이었다. 파도처럼 떠밀려오는 업무 속에 나는 처음에 허우적거리다가 정신을 차리고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나를 등 떠밀 수 없었고 우선순위를 하나하나 정리해서 상부에 보고를 드렸고 컨펌을 받고 그 매뉴얼대로 차근히 해나갔다. 그러니까 멘탈이 잡혔고, 흔들리지 않았다. 오늘도 새로운 업무가 들어왔지만, 그렇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 우선순위 나무 어딘가에 배치하면 되니까.
전에는 항상 한 발짝 떨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가고 가까워지는 기분이 든다. 뭔가 일과 친해지는 중인 건가?
사람들은 정말 지극히도 적응의 동물인가 보다. 그리고 시간은 많은 것을 해결해 주는 듯하다. 처음에 디자이너에서 전향했을 때의 그 고통스러웠던 순간이 파도처럼 스쳐 지나간다. 매일 출근하는 게 지옥 같던 그 시간들을 견뎌냈고 표류하다가 정착한 이곳에서 나는 그 시간들을 보상받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오늘 퇴근 후 돌아오는 버스길은 평안했다. 5시에 버스를 타면 도로가 아주 평화롭다. 쾌적한 버스 안에서 나 스스로를 대견하다고 칭찬해 주고 토닥거려 줬다. 그 시간들, 버티고 견디고 지나온 거 참 고생 많았다고. 그래서 지금 이 시간이 있는 거라고.
오늘 회사에서 상사와 회의를 하는데 무언가 내 안에 자신감 같은 게 한 줄기의 꽃처럼 피어올랐다. 말을 하면서도, 뭔가 열정의 에너지가 타올랐다. 나는 잘하고 싶고, 잘할 거고, 나를 믿어달라고 내 온몸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고 그분도 그걸 느끼시는 것 같았다. '잘하고 있다.' '대화하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라는 말을 하셨는데, 그런 말들이 나에게는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인복이 상당히 많았던 사람이었던걸 요즘에서야 다시 깨닫는다. 오늘도 느낀 것이 회사에 마음 붙일 동료 하나만 있어도 복이라는데 나는 생각해 보니까 지금 하나, 둘, 셋, 넷, 다섯 정도가 되니 참 복이 많은 게 아닐까. 그것 자체가 너무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베푸는 게 주는 게 아깝지가 않다. 커피라도 한 잔 더 사주고 싶고, 밥도 사주고 싶고, 계산하고 싶지 않아 진다.
지금 나는 돈 받고 일을 배우는 것 같아서 너무 감사하다. 처음에 기대감이 너무 없었었는데 그게 미안해질 정도로 지금 너무 만족스럽다. 그래서 사람은 내가 핏한 곳, 나를 알아주는 곳을 찾아야 한다는 말을 하나보다. 뭔가 굉장히 순탄한 느낌이다. 원래 일이 되려면은 순탄하게 풀린다고 했다. 지금 여기가 내게 그렇다.
내가 바뀌고 있는 생각이 든다. 아주 좋은 쪽으로 말이다.
그걸 느낀 건 또 오늘 집에서 있던 일을 통해서였다. 집에 와서 엄마가 요리를 하는데 그걸 카메라로 촬영했다. 재미 삼아 유튜브를 만들어 보기로 한 것이다. 엄마는 처음에는 내가 말을 하라고 쑥스러운 듯이 이야기했는데 이내 곧 내레이션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촬영을 마치고 식사를 하면서 회사 이야기를 하는데 엄마가 '참 많이 발전했다'라는 말을 했다. 내가 대처했던 행동에 대해서 어른스럽고 현명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간 내가 겪어온 모든 순간들을 같이 겪어낸 엄마가 내게 해주는 그 말이 내게 큰 힘이 되어줬다.
하나의 선택은 많은 것을 바꾸고 말 한마디가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것을 실감한다.
오늘은 오랜만에 뭔가 하고 싶은 마음이 마음속에 불끈불끈 솟아올랐다. 일도 잘하고 싶고, 영어도 잘하고 싶고, 유튜브도 재밌게 만들어보고 싶고(머릿속에서 아이디어가 돌아갔다. 손글씨를 써서 홍상수 감독 느낌으로 가볼까?), 인스타 채널을 하나 기똥차게 만들어볼까?라는 아이디어들이 오랜만에 머릿속에서 핑핑 돌아갔다.
일단 회사와 내가 결이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내가 만난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 사람들께 너무 감사하다. 나는 지금 누구도 아닌 나만의 커리어를 만들어가고 있다.
같은 음악이 더욱 감성적으로 들리고 좋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