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입덕기
인생을 바꿔 놓는 운명은 대부분 ‘사소함’의 탈을 쓰고 찾아온다.
나에게 찾아온 것이 색다른 ‘일상'인지, 삶을 뒤바꿔버릴 ‘운명'의 시작인지를 아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바로 내 안의 문을 활짝 열고 이 낯선 손님을 받아들이는 것.
한 번으로 족하다면 이 녀석은 왔던 길로 되돌아 나갈 것이고, 마음에 들면 그대로 자리를 잡고 앉아 나의 또 다른 가족이 될 테니까. 이렇게 보니 동네 고양이의 간택과도 비슷한 듯하다.
운명이 운명이라 불릴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삶을 완전히 뒤엎어 버리기 때문이다. 운명을 만난 사람은 다시는 그것이 없던 시절로 되돌아 가지 못 하게 된다.
어쩔 수 없지. 저항하기를 포기하고 그 운명 속에 깊이 빠져들어갈 수밖에.
야구를 처음 보러 가게 된 계기도 그랬다.
우연히 티켓이 생겼고, 눈치껏 경기를 보러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고, 어릴 때 야구만화를 봐 둔 덕에 별다른 설명 없이 볼 수 있을 정도로 야구 룰을 알고 있던 상태였다.
내가 응원하는 야구팀 'KT WIZ'는 가장 늦게 창단한 막내 구단이다. 창단은 2013년이지만 정규시즌 경기는 2015년에 시작했다.
그리고 KT WIZ의 첫 정규시즌이 있던 해에, 나는 홈구장인 수원 위즈 파크에 갔던 것이다.
우연히 얻은 티켓이 10개 팀 중 왜 하필 KT WIZ였는가,에 대해 묻는다면 당시의 내게 있어서 그건 '당연'했다고 대답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그때의 나는 KT의 계열사에서 인턴 활동 중이었고, 창단한 지 얼마 안 된 구단인지라 보러 가는 사람이 적었으며, 자회사의 야구팀이 기죽는 것을 볼 수 없었던 사장님은 직원들에게 당일 있을 야구경기의 티켓을 뿌렸고, 회사일을 끝내고 팬이 아닌 야구팀을 응원하러 서울에서 수원까지 가는 직장인은 인턴뿐이리라.
그렇게 나는 동기들과 함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수원행 광역버스에 올라타게 된 것이다.
스포츠 직관은 그때가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농구였다.
본가가 있는 지역의 연고팀이 잘하기로 유명한 농구팀이었기 때문에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 팀의 팬이었다. 그때도 선생님으로부터 우연히 남은 티켓을 얻게 되어 보러 갔던 건데, 재미는 있었으나 그게 전부였다.
희한한 일이다. 나는 '크게 휘두르며’보다 ‘슬램덩크’와 ‘쿠로코의 농구’를 더 재밌게 봤는데.
KT WIZ는 첫 정규시즌에서 10개 구단 중 10위를 기록했다. 승률은 0.364. 144경기 중 52경기를 이기고 91경기를 조졌다. 당시의 팬이 직관을 가면 이기는 경기보다 지는 경기를 보고 나오는 게 더 많았을 거란 얘기다.
하지만 운명이란 ‘특별함’의 포장지를 입고 다가오는 법. 비록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시기, 질투, 좌절, 분노, 눈물일 지라도. 일단은 하늘에서 나만을 위해 내려주는 유일무이한 선물처럼 찾아오는 것이다.
셀렘 한 스푼, 불만 아빠 숟가락, 피곤함 한 국자를 머금고 보러 간 KT와 NC의 경기. 그날 나는 그해 KT WIZ가 만들어 낸 52개의 귀한 승리들 중 한 경기를 함께 했다.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어떻게 운이 맞아떨어져도 이렇게 맞아떨어질 수 있었을까.
그 외에도 그날이 특별하게 느껴지던 요소는 몇 가지 더 있었다. 일단 치킨이 맛있었고, 맥주가 더운 날씨를 잊게 만들어 줄 정도로 시원했으며, 회사로부터 제공받은 응원복이 나에게 참 잘 어울려 보였다.
구단명에서 알 수 있듯이 KT WIZ의 위즈는 마법사를 뜻하는데, 그 때문에 응원 아이템 중에 마법사 모자가 존재한다. 그게 해리포터 덕후인 내 마음 한가운데에 꽉 찬 직구를 날려 스트라이크를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KT WIZ의 팬이 됐다. 사실 직후부터 매년 챙겨본 것은 아니다. 그 후로도 KT는 3 시즌을 더 조졌으니까. 간잽이는 조진 시즌은 챙겨보지 않는 법이다.
야구가 나의 운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이제는 야구 없는 일상은 생각할 수가 없게 됐다.
겨울만 되면 야구 언제 하냐고 매일 염불을 왼다. 겨울이 추운 이유는 기온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더 이상 나를 매일 화나게 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퇴근하고 기쁜 마음으로 중계를 켰을 때 볼질하고 루킹 삼진 당하고 걸으면서 수비하는 꼴을 봐야 ‘아, 내 감정이 아직 메마르지 않았구나. 현실에 찌들어 회색빛의 건조한 삶으로 변질되지 않았구나.’하는 감각을 느낄 수 있는데.
내일은 자선 야구 티켓팅이 있는 날이다. 이것이 올 해의 마지막 야구다. 사실 자선 야구는 야구라기에는 스포츠 스타들의 코미디 빅리그에 가깝지만 아무렴 어떠냐. 야구장을 간다는 게 중요하지.
우리 팀은 내가 좋아하는 투수들이 모두 나간다. 신이시여, 제발 고척에 제 자리 하나만 만들어 주십쇼. 제가 이번 가을야구에서 고척 3루 응원석에 흩뿌리고 온 눈물을 거두고 올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운명과 삶의 관계는, 우연처럼 찾아오는 간택으로 시작하지만 종국에는 진달래꽃처럼 나를 즈려밟고 가더라도 신발 밑창에 끼어서 절대로 빠지지 않는 돌멩이처럼 한 시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강인한 집착으로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