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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Nov 25. 2022

어떻게 팬이 제일 적은 KT WIZ를 응원하게 됐어요?

야구 입덕기


인생을 바꿔 놓는 운명은 대부분 ‘사소함’의 탈을 쓰고 찾아온다.

나에게 찾아온 것이 색다른 ‘일상'인지, 삶을 뒤바꿔버릴 ‘운명'의 시작인지를 아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바로 내 안의 문을 활짝 열고 이 낯선 손님을 받아들이는 것.


한 번으로 족하다면 이 녀석은 왔던 길로 되돌아 나갈 것이고, 마음에 들면 그대로 자리를 잡고 앉아 나의 또 다른 가족이 될 테니까. 이렇게 보니 동네 고양이의 간택과도 비슷한 듯하다.


운명이 운명이라 불릴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삶을 완전히 뒤엎어 버리기 때문이다. 운명을 만난 사람은 다시는 그것이 없던 시절로 되돌아 가지 못 하게 된다.


어쩔 수 없지. 저항하기를 포기하고 그 운명 속에 깊이 빠져들어갈 수밖에.


야구를 처음 보러 가게 된 계기도 그랬다.

우연히 티켓이 생겼고, 눈치껏 경기를 보러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고, 어릴 때 야구만화를 봐 둔 덕에 별다른 설명 없이 볼 수 있을 정도로 야구 룰을 알고 있던 상태였다.


내가 응원하는 야구팀 'KT WIZ'는 가장 늦게 창단한 막내 구단이다. 창단은 2013년이지만 정규시즌 경기는 2015년에 시작했다.


그리고 KT WIZ의 첫 정규시즌이 있던 해에, 나는 홈구장인 수원 위즈 파크에 갔던 것이다.


우연히 얻은 티켓이 10개 팀 중 왜 하필 KT WIZ였는가,에 대해 묻는다면 당시의 내게 있어서 그건 '당연'했다고 대답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그때의 나는 KT의 계열사에서 인턴 활동 중이었고, 창단한 지 얼마 안 된 구단인지라 보러 가는 사람이 적었으며, 자회사의 야구팀이 기죽는 것을 볼 수 없었던 사장님은 직원들에게 당일 있을 야구경기의 티켓을 뿌렸고, 회사일을 끝내고 팬이 아닌 야구팀을 응원하러 서울에서 수원까지 가는 직장인은 인턴뿐이리라.


그렇게 나는 동기들과 함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수원행 광역버스에 올라타게 된 것이다.


스포츠 직관은 그때가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농구였다.

본가가 있는 지역의 연고팀이 잘하기로 유명한 농구팀이었기 때문에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 팀의 팬이었다. 그때도 선생님으로부터 우연히 남은 티켓을 얻게 되어 보러 갔던 건데, 재미는 있었으나 그게 전부였다.


희한한 일이다. 나는 '크게 휘두르며’보다 ‘슬램덩크’와 ‘쿠로코의 농구’를 더 재밌게 봤는데.


KT WIZ는 첫 정규시즌에서 10개 구단 중 10위를 기록했다. 승률은 0.364. 144경기 중 52경기를 이기고 91경기를 조졌다. 당시의 팬이 직관을 가면 이기는 경기보다 지는 경기를 보고 나오는 게 더 많았을 거란 얘기다.


하지만 운명이란 ‘특별함’의 포장지를 입고 다가오는 법. 비록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시기, 질투, 좌절, 분노, 눈물일 지라도. 일단은 하늘에서 나만을 위해 내려주는 유일무이한 선물처럼 찾아오는 것이다.


셀렘 한 스푼, 불만 아빠 숟가락, 피곤함 한 국자를 머금고 보러 간  KT와 NC의 경기. 그날 나는 그해 KT WIZ가 만들어 낸  52개의 귀한 승리들 중 한 경기를 함께 했다.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어떻게 운이 맞아떨어져도 이렇게 맞아떨어질 수 있었을까.



그 외에도 그날이 특별하게 느껴지던 요소는 몇 가지 더 있었다. 일단 치킨이 맛있었고, 맥주가 더운 날씨를 잊게 만들어 줄 정도로 시원했으며, 회사로부터 제공받은 응원복이 나에게 참 잘 어울려 보였다.

구단명에서 알 수 있듯이 KT WIZ의 위즈는 마법사를 뜻하는데, 그 때문에 응원 아이템 중에 마법사 모자가 존재한다. 그게 해리포터 덕후인 내 마음 한가운데에 꽉 찬 직구를 날려 스트라이크를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KT WIZ의 팬이 됐다. 사실 직후부터 매년 챙겨본 것은 아니다. 그 후로도 KT는 3 시즌을 더 조졌으니까. 간잽이는 조진 시즌은 챙겨보지 않는 법이다.


야구가 나의 운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이제는 야구 없는 일상은 생각할 수가 없게 됐다.


겨울만 되면 야구 언제 하냐고 매일 염불을 왼다. 겨울이 추운 이유는 기온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더 이상 나를 매일 화나게 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퇴근하고 기쁜 마음으로 중계를 켰을 때 볼질하고 루킹 삼진 당하고 걸으면서 수비하는 꼴을 봐야 ‘아, 내 감정이 아직 메마르지 않았구나. 현실에 찌들어 회색빛의 건조한 삶으로 변질되지 않았구나.’하는 감각을 느낄 수 있는데.


내일은 자선 야구 티켓팅이 있는 날이다. 이것이 올 해의 마지막 야구다. 사실 자선 야구는 야구라기에는 스포츠 스타들의 코미디 빅리그에 가깝지만 아무렴 어떠냐. 야구장을 간다는 게 중요하지.


우리 팀은 내가 좋아하는 투수들이 모두 나간다. 신이시여, 제발 고척에 제 자리 하나만 만들어 주십쇼. 제가 이번 가을야구에서 고척 3루 응원석에 흩뿌리고 온 눈물을 거두고 올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운명과 삶의 관계는, 우연처럼 찾아오는 간택으로 시작하지만 종국에는 진달래꽃처럼 나를 즈려밟고 가더라도 신발 밑창에 끼어서 절대로 빠지지 않는 돌멩이처럼 한 시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강인한 집착으로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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