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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Apr 04. 2024

짜릿한 덕질에도 권태로움은 찾아온다

인스타 갬성 카페에서도 당당하게  덕후 예절샷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덕후에게는 필수적으로 치러야 하는 관문들이 있다. 입덕 부정기, 최애 잡기, 넘쳐나는 떡밥의 파도 속에서 정신 차리기… 여러 가지가 관례가 있지만 그중 근본을 건드리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이건 사고처럼 느껴질 만큼 강렬한 입덕에서도, 서서히 물들어가는 쪽빛 같은 입덕에서도 마찬가지다. 입덕 초기의 덕후라면 반드시 이 질문에 대답해야만 한다. 


“너는 걔가 왜 좋아?”


쉽다. 아주 쉬운 질문이다. 입덕 초기일수록 질문 같지도 않게 느껴진다. 대답할 시간으로 5분이 주어진다면 인저리 타임을 얹어 5시간 동안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일단 시작은 이 덕질이 운명처럼 느껴진 그 순간부터. 아주 평화롭디 평화로워 지루할 정도였던 어느 날이었어. 우연히 내가 직캠을 하나 보았는데… 


그렇게 덕후는 영원히 짜릿함만 있을 것 같은 덕질을 이어간다. 위의 질문에서 점 위치가 바뀔 때까지. 


“나는 걔가 왜 좋지?”


어느 순간 이런 질문이 불쑥 치솟는다면 그건 때가 왔다는 것이다. 권태기. 이 행복만 할 것 같았던 덕질에도 권태기가 찾아왔다. 


좋아하는 아이돌이 있다. 거의 신인 때부터 좋아했다. 지금 그 아이돌은 더 이상 신인이 아니게 됐다. 그 아이돌을 좋아하기 시작했을 때는 나도 신입이었다.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신입. 어쩌다 보니 나와 사회생활을 비슷하게 시작한 애들을 좋아하게 됐다.


자아의탁까지는 아니지만, 우리는 함께 성장 중이라고 생각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 아이돌이 음악 방송에서 1위 트로피를 쌓아 온 것처럼, 나도 이력서에 몇 줄 적어낼 경력을 쌓아왔으니까. 


내 아이돌의 음악과 메시지를 들으며 매일 힘을 냈고, 그렇게 얻은 에너지를 내 아이돌에게 되돌려 주고 싶어서 또 힘을 냈다. 그래요, 다 아실 테니 굳이 감상적이게 표현하지 않을게요. 열심히 일해서 번 돈 다시 내 새끼들에게 되돌려 주었습니다. 왜 그렇게 쳐다보시죠? 원래 돈 안 들어가는 건 취미 아니랬어요.


아 미리 말하자면 이건 그동안 덕질하며 쓴 돈이 아깝다며 한탄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게 반짝이던 마음에도, 영원할 것 같았던 열정에도 권태로움이 찾아 온 것이 그저 놀라워 쓰는 글이다. 


어쩔 수 없다 생각한다. 이건 그냥 먼지 같은 거니까. 권태란 먼지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쌓여 나가는 것. 눈에 보이지 않을만큼 미세하지만 결국에는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 


멈춰 있는 것에 먼지가 쌓이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걔가 왜 좋지?”


쌓인 먼지를 인지하는 순간, 덕후는 선택해야 한다. 이 먼지를 닦아낼 것인가, 아니면 원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만큼 먼지가 쌓이도록 내버려 뒀다가 버려 버릴 것인가.


사실 이 덕질에서 권태를 느끼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마 한 달쯤 됐을까?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여전히 내 아이돌의 모든 것이 짜릿했고, 말 한마디에 심장이 몽글몽글해졌고, 허술한 자체 콘텐츠 영상도 즐거워서 재탕삼탕사탕을 해서 봤었다.   


모든 것은 일이 바빠지며 시작됐다. 문제는 이 바쁜 일상이 꽤 재밌다는 데 있었다. 힘들 때 웃는 자가 일류라고 했던가. 기력이 떨어져 안면근육을 못 올려서 그렇지 나는 마음속으로 항상 웃고 있었다. 하하하하! 더 해! 더 해 봐! 그래, 마침 나도 내 이성과 인성의 끝이 궁금했는데 잘 됐네! 한 번 끝까지 가보자고!


이런 미친(듯이 바쁜) 일상 속에서 내 아이돌은 미국으로 외화벌이를 하러 떠났고, 어긋난 시차만큼 소통의 타이밍도 점점 어긋나고 있었다. 새벽에 보내는 메시지, 이른 오후에 찾아오는 라이브, 보지 못하는 미국 콘서트의 영상 클립들.


내 아이돌은 점점 내 일상과 분리되고 있었다. 소통앱에 답장을 놓친 말풍선이 늘어갈 때마다, 다시 보기 해야 하는 라이브 영상 시간이 누적될 때마다, 한국에서는 일 년에 한 번하는 콘서트를 미국에서는 10번 넘게 하는 걸 볼 때마다 내 감정은 점점 무뎌져 갔다. 


‘지금’은 ‘나중에’가 됐고, ‘반드시’는 ‘생각해보고’가 됐다. 그렇게 붕 뜬 시간 사이로 성찰의 씨앗이 비집고 들어간 것이다. 입덕 초기처럼 다시 한번 이 질문에 답할 때가 왔다. 


“나는 걔가 왜 좋지?”


일단 내 아이돌은 정직하다. 먼저 실력. 콘서트장에서 모든 곡을 라이브로 때려 버린다. 댄스곡을 연달아 4곡을 하든, 높은 고음이 있는 발라드곡을 부르든 전부 라이브로 들려준다. 가끔 무반주로도 부른다. 타고 난 노래천재는 아니지만 노력천재로서 매번 업그레이드된 실력을 보여 준다. 그들을 보고 있자면 잊혀 가는 노력의 가치를 바로 세우게 된다. 


인간 됨됨이도 괜찮다. 연예인 화면에서 보여주는 거 그대로 믿지 말라 하는 말, 나도 안다. 하지만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무례가 무례인지도 모르는 인간들이 눈앞에 수두룩 빽빽한 세상이다. 적어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여 사회적, 도의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수행할 정도의 인간은 됐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 


인성 좋고 정직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사람. 뭐지, 이거 신입사원 채용 조건 아닌가? 내가 하는 덕질의 ‘덕’이 클 덕(德)이었나?    


덕후적 자존심이 상하긴 하지만, 그저 내 마음이 변한 걸 수도 있다. 바쁘고 낯선 하루들 때문에 열정의 발화점이 달라진 것이다. 불이 붙지 못하니까 마음도 식은 거겠지. 그래, 권태로움이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다. 아직까지는 변질되지 않은 현상유지의 상태. 


아니면 아이돌인데 아이돌적인 모먼트를 못 보니까 아이돌로서의 매력을 잠시 잊어버린 것일 수도? 갑자기 한국 콘서트 공지가 뜨거나 컴백 기사가 올라오면 심장이 인저리타임까지 풀타임 뛴 축구선수 마냥 두근거릴 수도? 뭔가 마음이 살짝 떠난 척 하고 있지만, 옷깃만 슬쩍 붙잡아 줘도 얼씨구나 되돌아 갈 수도?


한동안은 이 미지근하고 지루한 상태를 지켜볼 생각이다. 혹시 모르지 않나. 상한 우유인 줄 알았던 것이 그릭 요거트가 될 수도 있으니까!


일단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이번달까지만 구입할 수 있는 팬십은 가입해 놓을 계획이다. 앗, 생각해 보니 나 소통앱도 1년 치 한 방에 결제해서 아직 7개월이나 남았네. 그러고 보니 굿즈 예약 구매한 것도 아직 못 받았잖아?  


… 어쩌면 이 권태로움은 돈으로 극복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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