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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쩨제 Feb 24. 2020

한복 입고 서점이라니

– Daunt Books (2)



한국 가을 같은 날씨에 팔랑팔랑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녔던 전날과 달리, 변화무쌍한 영국 겨울 날씨는 갑자기 이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한국의 추운 겨울 같은 날씨로 변해 있었다.

아마 턱이 덜덜 떨리는 그때의 내 모습을 만든 데에는 내가 입었던 옷차림이 한몫, 아니 열 몫은 했을 테지만.




버킷리스트(bucket list) 중 하나였던 ‘생활 한복 입고 스냅사진 찍기’를 블라디보스톡 여행에서 성공적이진 않았지만 즐겁게 마치고, 이번에 런던에서 또 해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한국에서 미리 예약을 잡았다. 이번 드레스 코드 역시 ‘한복’, 기대하고 고대하던 영국 여행이었기 때문에 더 특별한 한복을 입고 싶어서 런던의 분위기와 너무 잘 어울리는 체크무늬 한복을 맞췄다.

 

문제는 그 한복이 예쁘긴 엄청 예뻤지만, 가을에서 초겨울쯤까지 입기 좋은 정도의 두께였다는 것이었다. 속에 따뜻한 히트텍과 두꺼운 레깅스까지 입었지만, 갑자기 추워진 날씨를 대비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정도로.




하지만 겨우 2시간인데, 2시간만 참아보자 는 생각으로 한복 위에 겉옷을 걸치지 않고 목도리만 하나 두른 채로 사진 촬영을 했다. 웃을 때마다 입술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지만, 유쾌한 사진사님과 눈을 돌리면 보이는 색색의 아름다운 집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그림 같은 골목들 덕분에 추운 것도 잠시 잊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런던의 여러 거리들을 돌아다니다, Marylebone 이라는 지역이 촬영의 마지막 코스였는데 아무데서나 자리를 잡고 셔터만 눌러도 작품이 될 것 같은 거리였다. 그곳에서 길 건너의 알록달록 하면서도 감각적인 건물들을 풍경에 두고 사진을 찍던 그때, 횡단보도를 건너며 청록색 간판에 하얀 글씨로 ‘Daunt Books’라고 써진, 바로 전날 봤던 것과 같은 이름의 책방을 발견했다.


그 전날까지만 해도 런던의 동네 책방쯤으로 생각했지, 이렇게 다른 지역에도 지점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뜻밖의 발견에 자꾸 눈길이 갔다.

원래 촬영만 끝나고 얼른 숙소로 갈 마음만 가득했지만, 책방을 보자마자 그 생각이 칼날 같은 바람과 함께 훅 날아가버렸다.


어차피 숙소는 이미 너무 멀어진 거, 다시 갈바에야, 여전히 온몸이 덜덜 떨리게 춥고 치마의 부피를 줄이려고 계속 잡고 다녀야 되는 게 불편했지만 촬영이 끝나자마자 바로 그 거리에서 발견한 책방으로 직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몸이 덜덜 떨리게 추웠지만 행복한 결과물(?)










Marlyebone 의 Daunt Books 는 한눈에 봐도, 입구부터 전날 봤던 책방보다 더 커 보였고 문 뒤로 살짝 보이는 초록빛으로 감싸진 등은 전날의 책방과 같아 보여 왠지 반가웠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책방의 경관은, 그야말로 감탄을 자아냈다. 고풍스럽고 빈티지한 무늬가 있는 청록색 벽지에, 긴 복도에는 따뜻한 색감의 나무 책장이 쭉 세워져 있었고, 천장에 난 큰 창은 책방 가득 햇빛을 담고 있었다.

 

게다가 작은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 보면 그곳에도 책장이 쭉 늘어서 있었다. 책장과 같은 색의 난간 쪽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 고풍스러운 서점이 한눈에 담겼고, 위를 올려다보면 창에서 내리비치던 겨울의 햇살을 더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또 1층으로 내려가, 이번엔 좀 더 길고 넓은 계단을 내려가면 또 다른 곳이 나오는데, 여기도 위층만큼 넓은, 책을 위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미녀와 야수> 의 벨이 생각났다. 만약 벨이 런던이 살았다면, 이 책방을 단골 삼았을 것 같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책을 고르는 벨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섞이는 그림 같은 책방이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책방에서 만난 책은, 책방만큼 특별했다.

픽션 칸을 유심히 살펴보며 ‘ㄷ’ 자로 놓인 서가를 쭉 따라가다 보니 청소년 칸이 있었고, 그 옆에 알록달록 아기자기한 그림이 그려진 앙증맞은 의자들이 놓인 어린이를 위한 책들이 모여있는 공간이 나왔다.

그곳에는 여러 그림책과 우주 관련 책, 무민 책, 팝업북 등 아이들이 보기 좋은 책들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눈길이 갔던 책은 <호두깎이 인형> 그림책이었다.

 

무려, 그냥 그림만 예쁜 것이 아니라 버튼을 누르면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깎이 인형 음악이 나오는! 이 책을 보자마자 마음이 두근거렸다. 샘플로 음악을 들을 수도 없었지만, 이건 정말 최고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직까지 1 책방 1 책의 다짐을 지키고 있던 때여서, 다른 거 볼 것도 없이 오늘은 이 책이다, 하며 데려왔다.












숙소에 도착해선 불편했던 옷만 대충 갈아입고 침대에 폭 기대앉아 바로 오늘의 책을 찬찬히 구경했다. 스냅 촬영이 오전에 진행돼서 책방을 갔다 왔어도 이른 시간이었는지 숙소에는 나 혼자였던 덕분에 장면마다 있는 음악소리를 하나하나 다 들어볼 수 있었다.

 

따뜻한 색감의 그림과 그 장면에 어울리는 음악이 나오는 책이라니, 책에서 나오는 음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퀄리티가 좋았다.

음악이 시작되면 장면의 분위기가 주변을 감돌았고, 흘러나오는 선율과 함께 글을 읽으면 글에서 느껴지는 것과 또 다른 상상력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문장들은 왈츠의 선율에 맞춰 스텝을 밟았고, 플룻의 리듬을 따라 종종거렸다. 무섭고 장엄한 음악이 나올 때는 같이 숨죽이며 발소리를 낮춰 사박사박 발걸음을 내디뎠다.











영국에서 이렇게 음악이 나오는 책을 또 몇 번 봤지만, 부피가 크고 여러 권 가져오기에는 부담스러워서 이 책 한 권 밖에 사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와서 바로 후회하게 될 줄 알았으면 눈에 보이는 대로 집어왔을 텐데. 그래도 이 책을 알게 된 덕분에 그 이후 여행에서 꼭, 이렇게 소리가 나는 책을 찾게 됐다.


혹자는 ‘그래 봤자 어린이 책 아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 특별한 책을 찾는다고 한다면 나는 어린이 책 코너로 한 번 가보세요, 할 것 같다. 어린이 책 코너, 특히 외국 서점의 어린이 책 코너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보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어른들도 눈이 돌아가게 만드는 휘황찬란한 팝업북, 간단한 짧은소리부터 음악까지 들을 수 있는 책, 보들보들한 천이 무늬로 덧대어져 손으로 그 촉감을 느껴볼 수 있는 책.


그리고 아직 발견하지 못한 무수한 책들. 이 모든 것들이 어린이 책 코너에 있다.













Daunt Books Marylebone
84 Marylebone High St, Marylebone, London W1U 4QW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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