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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쩨제 Mar 29. 2020

멀리서 보면 백화점, 가까이서 보면 책방

- Foyles



대형 서점.

한국에서, 특히 서울에서 가봤던 교*문고, *풍문고 등의 대형 서점은 백화점 한 층에 자리 잡고 있던 경우가 많았다. 그마저도 한 층 전체인 경우는 드물고, 어느 한 켠에 서점이 있을 뿐이었다.



자, 그럼 이제 재미있는 가정을 하나 해보자. 

만약에 지하 1층을 포함해서 6층짜리 백화점이 있는데, 서점이 그중 한 층에 있는 게 아니라 지하 1층부터 5층까지 모두, 정말 모두, 모조리 책방이라면? 이런 곳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 가?

솔직히 말하면 나는 없었다. 한국에서 아무리 큰 책방이라도 한 층 전체를 크게 사용하거나, 2층으로 된 책방이었지 그 이상의 ‘초’ 대형 서점은 본 적도 없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만약 상상한다면, 그건 ‘있으려나 서점’* 에서나 볼 수 있는 <백화점 온 층을 서점으로 만드는 방법>** 같은 제목의 책에서나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상상 속에만 있을 법한 서점이 실제로 있었다. 그것도 영국 런던의 소호(Soho) 거리에!

이 날도 역시 책방을 가려던 건 아니었다. 런던 하면 역시 애프터눈 티지, 하며 기대하는 마음으로 소호의 어느 티 룸에 가던 중이었고, 그러다 아주 모던한 디자인의 책방 ‘Foyles’를 만나게 됐다.

검은 바탕의 간판에 빨간 글씨로 ‘Folyes’라고 써진 간판은 커피 한잔씩 들고 서로를 그저 지나쳐가는 런더너(Londoner), 지금까지 봤던 고풍스러운 느낌이 아닌 그야말로 ‘도시적인’ 런던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깔끔한 디자인이었다.  









입구는 그리 크지 않았는데, 이 책방의 위용은 그 간판 아래 문으로 한 발짝 들어가자마자 체감할 수 있었다.

보통은 책방에 들어가면 안으로 넓게 퍼져있는 공간을 느끼게 되는데 이 책방은 위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높이에 의한 공간감을 받았다.

도대체 몇 층이나 되는 걸까 싶어 한 층을 올라간 뒤, 층별 안내도를 봤다. 무려 영국 층수로는 지하 1층부터(0층, 1,2,3,4,5) 6층까지, 한국 기준으로 하면 지하 1층부터 7층까지 총 8층, 8층 모두 오로지 책방을 위한 건물이었다.






Foyles 의 층별 안내도





이 책방을 어떻게 둘러보면 좋을까?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내기도 전에 나는 계단을 올랐다. 일단 오르고 또 올랐다.

위에 높이에 의한 공간감이 느껴진다고 썼지만, 한 층 한 층 올라가다 보니 계단이 끝나고 깊게 들어가는 복도를 따라 공간이 넓게 펼쳐져 있어 복도 둘레로 쭉 늘어선 책장만 봐도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책장 사잇길을 둘러보는 것은 고사하고 긴 복도의 책장만 대강 훑어본 채로 꼭대기 층에 다다르니, 언젠가 언니가 미국에 다녀온 뒤로 ‘디즈니 랜드를 다 돌려면 1주일은 필요할 거 같아!’라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아마 한국에 돌아가면 나도 언니처럼 ‘내가 런던에서 책방을 하나 봤는데, 거기 다 돌려면 1주일은 걸릴 거 같아!’라고 하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결국 내가 찾은 답은 ‘선택과 집중’뿐이었다.


자세히 보고 싶은 딱 두 층만 구경하기.

그렇게 이번엔 한 층 한 층 내려가면서 둘러볼 곳을 정했다. 쭉쭉 계단을 내려와 첫 번째로 정한 곳은 (영국 기준) 2층이었다. 전공이 전공이다 보니 이렇게 큰 서점에서 음악과 관련된 것들로 한 층을 어떻게 꾸몄을까 궁금했었는데, 생각보다 더 전문적이어서 놀랐다. CD에 DVD, 거기다 LP까지 있었지만 그보다 더 놀라웠던 건 공간의 가장 깊숙한 곳 쪽에 거의 천장까지 닿아있는 악보 서랍들이었다. 딱 피아노 악보의 가로 크기만 한 검은 서랍들이 칸칸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베토벤, 브람스, 바르톡 등등 여러 작곡가들의 피아노 작품이 착착 정리된 채로 담겨있었다.


이런 모습은 서초 예술의 전당 안에 있는 ‘대한 음악사’나 마찬가지로 서초에 있는 ‘음악 플러스’ 같은 음악 전문 서점에 가야 볼 수 있는 광경이었는데, 그냥 길 가다 만난 책방에서 이런 모습을 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혹시 스코어(score)*** 도 있을까 가슴 두근거리며 찾아봤는데, 정말 스코어도 있었다. 스코어는 정말, 한 권쯤 사갈까 책장 앞을 서성이며 많이 고민했지만 바로 며칠 전에도 너무 무거워서 길바닥에 던져버리고 싶었던 캐리어의 무게를 떠올리며 자꾸만 스코어 쪽으로 가는 손을 부여잡았다.


그렇게 내가 20kg쯤은 거뜬히 드는 사람이었으면 다 데려가고 싶었던 스코어들을 뒤로하고, 지하 1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 1층은 (영국 기준) 0층에서 힐끔 보고 눈독 들였던 곳이었는데, 역시나 이 곳에도 눈 돌아갈 만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은 어린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아이들이 팔 끝을 쭉 뻗으면 닿을 정도의 책장들에 갖가지 책들과 그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인형으로 한 칸 한 칸 다채롭게 채워져 있었다. 그중 내가 아는 거라곤 무민, 피터 래빗, 곰돌이 푸 정도가 다였지만 그 앙증맞고 보드라운 얼굴들에 하나하나 눈 맞춰 인사하다 보니 책방을 나서야 할 시간이 진작에 지나있었다.










이날 나는 책방을 봤다고 하기엔 겨우 2층을 봤을 뿐이고, 이곳에서 책도 사지 못했다. 애프터눈 티 예약 시간이 다가와서 시간에 쫓겼고, 더 둘러보면 이 책 말고 또 다른 더 멋진 책이 있을 거야 하는 마음에 책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고르기가 더 어려웠다.


이 책방과 인연을 맺은 책은 없지만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이유는 책방이 내가 본 중에 가장 크고 전문적인 음악 서적이 많고, 그것을 넘어 아주 아주 아주 많은 책들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이 책방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딱 한 가지, 처음 들어갔을 때 보였던 문구 때문이었다.




Welcome book lover,
you are among friends.





이 문구는 입구에 딱 들어가자마자 보일 뿐 아니라, 계단을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어느 층에서든 다 볼 수 있었다.

책쟁이를 환영하고, 이곳에서 당신은 친구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는 이 문구가 당신이 어디서 왔든 이곳에서는 책을 좋아한다는 그 이유만으로 모두 친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게 꼭 사람일 필요도 없고 이곳에 있는 수많은 책들과 친구가 될 수도 있는 거고 어쩌면 이곳만의 분위기라던가 그게 무엇이든, 이 안에서 당신은 이방인이 아니라고 당신은 그저 오늘의 그대와 맞는 책을 만나면 되는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땐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책방은 내게 꽤 드문 안전지대였다. 한국에서 유럽의 악명 높은 소매치기, 인종차별 이야기들을 듣고 여행 전부터 약간의 불안과 걱정이 줄곧 따라다녔다. 그나마 영국은 덜하다고 해서 길을 다닐 때 예민하게 촉을 세우며 다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긴장을 아예 풀 수는 없었다.

가방은 앞으로 메고, 핸드폰은 가방과 줄로 연결 해 꼭 쥔 채로 거리를 걸었다.


그러다, 긴장이 풀어진 곳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이었다. 거리를 걸으며 예고 없이 여러 책방들을 만났고, 나는 모험이 시작된 줄도 모르고 책방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그렇게 들어간 문 안의 세상은 문 밖과 너무도 달랐다. 문 밖의 거리에서 낯섦에 힘을 주고 있던 어깨는 문 안으로 들어가며 숨을 한 차례 들이쉬고 내쉬는 동안 언제 굳었나 싶을 정도로 풀어졌다.


그 안은 내게 익숙한 곳이 아니었지만, 또한 익숙한 곳이었다. 한국에서 책방에 들어가면 조용하고 고요한 분위기에,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각자의 책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새로운 책들과 익숙한 책들 사이로 거닐고, 책 향기에 마음 끝을 잡혀 더 머물곤 했다.


이곳에서도 똑같았다. 다른 거라곤 책에 쓰인 언어나, 사람들이 쓰는 언어 정도였을 뿐.

한국에서나 외국에서나 책방은 내게 편안하고 살가운 공간이었다.







그 살가움 속에서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시간, 나 혼자만의 시선으로 충분한 시간, 그 ‘오롯한’ 나 혼자만의 시간을 챙겨갔다. 다시 거리로 나가, 혼자여도 괜찮을 만큼.














*<있으려나 서점>, 요시타케 신스케

**<있으려나 서점>에 나올 법하게 상상으로 만든 책이름

***스코어(score) : 모음 악보, 총보(總譜). 중창(중주)·합창(합주) 등에서 각 성부(part)의 보표(譜表)를 일목요연하게 한 데 모아 나타낸 악보.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Foyles
07 Charing Cross Rd, Soho, London WC2H 0DT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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