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쩨제 Apr 15. 2020

비 향기 짙게 밴, 런던의 책방 거리에서

- Goldsboro Books



Singin’ in the Rain
I’m singing in the rain
Just singing in the rain
What a glorious feelin’
I’m happy again

( ··· )

<Singing in the rain>, Gene Kelly 中



런던에 도착한 첫날 이후로, 날씨 요정이 함께 했는지 그야말로 푸른 하늘에 거리 구석구석까지 햇빛이 비치는 쨍한 날씨가 이어졌다. 그래서 이른 아침 숙소에서 나와 바로 옆의 작은 공원에서 산책할 때 활기찬 아침을 만들어주었던 음악은, 언제나 라라랜드 Ost 중 <Another Day of Sun>이었다.


그러다, 런던에 온 지 5일 차 되는 날, 드디어 비가 왔다. ‘야호!’ 하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내 상상 속 런던은 언제나 비가 내렸다.

영국 하면 떠오르는 세 가지는 해리포터, 신사(gentleman) 그리고 우산!

즉, 나에게 비와 영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그야말로 붕어빵 속 슈크림 같은 존재였다.(붕어빵엔 슈크림 파. 손들어주세요. 푸쳐핸졉!)


문을 나서자마자 느껴지는 비 오는 날 특유의 그 향기는 물기를 잔뜩 머금은 붓이 닿은 물감처럼 숨 사이로 퍼져나갔다. 물기에 향기까지 더해진 붓이 그 무게를 못 이겨 구부러진 털끝으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토독 토도독하고 우산 위로 닿는 빗방울이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덤.

마음까지 촉촉해져 마치 필터를 끼운 것처럼 눈길이 닿는 곳마다 수채화처럼 보였던 이 날은, 역시 <Another Day of Sun>의 감성이 아니었다.


그래서 근처 공원으로 산책하는 대신 바로 거리를 거닐었다.

비 오는 날, 런던. 추적추적 내리는 빗물이 아니라 땅에서부터 통통 튀어 오르는 빗방울.

한국에서 고심 끝에 만들어온 플레이리스트 중에 바로 이 날 꺼내 들었던 음악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Singing in the Rain>이었다.

많은 버전들 중에서도 딱, 영화 속에 나온 오리지널로!


귓가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리듬을 타고 발걸음이 만들어내는 자국에 물방울이 부딪혀 와 통통 튀었다. 타닥 타다닥, 발자국이 만들어내는 소리에 평소보다 들뜬 마음으로 발을 굴렀다. 마치 노래의 주인공이 탭 댄스를 추던 것처럼!




그동안의 여행에서는 국내든 해외든, 햇빛이 비치는 날씨가 늘 함께하기를 바라며 날씨 요정을 찾았다. 하지만 런던에서 만큼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Singing in the Rain>의 주인공처럼 광대까지 한껏 끌어올린 웃음을 지으며 신나는 발걸음으로 걸을 수 있는 비 오는 거리는 내겐 런던뿐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날씨 요정을 바라지 않을 여행지는 런던뿐이지 않을까?


런던만큼은 비가 와도, 아니 비가 와야 좀 더 런던 답고 또 런던스럽다.










이 날은 처음으로 책방을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동안은 차장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눈에 담는 게 좋아서 버스를 애용했는데, 오늘 갈 곳은 지하철로 가는 게 경로가 훨씬 간단해서 오랜만에 숙소 근처 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Tottenham Court Road 역에서 내려 걸어간 거리에서 보았던 건물들은 마치 지금이 2019년이 아니라 17, 18세기쯤 되는 것처럼 고즈넉이 회색 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런던 하면 떠오르는 빨간 버스와 빨간 공중전화 박스는 평소보다 더 강렬한 색감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비 오는 런던 거리.






그 우수(雨水)에 한껏 젖은 거리를 이리저리 구경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오늘의 목적지가 있는 골목의 초입에 도착했다.


왼쪽으로 방향을 꺾자 마자 보이는,

Goldsboro Books.


한국에서 유일하게 알아갔던 런던 책방으로, 그마저도 내가 먼저 알아본 게 아니라 친구 익구로부터 알게 된 책방이었다. 내가 책과 서점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또 곧 런던에 가는 걸 알았던 익구는 <퇴사 준비생의 런던>이라는 책에서 ‘초판본’을 취급하는 런던의 어느 서점을 봤는데 한 번 가보라고 알려줬다.


‘초판본’이라니! 그렇게 귀한 책을 파는 서점을 안 가볼 수야 없지!

그 얘기를 듣자마자 ‘런던에 가면 꼭 가봐야 할 목록’에 추가했고, 이미 널널했지만 더더욱 여유롭게 다녀오고 싶어서 저녁에 예매해 둔 공연과 아주 먼 오전 시간으로 일정에 넣었다.


게다가 해리포터 덕후에게 영국은 모름지기 해리포터의 나라. 혹시 귀하디 귀한 해리포터 초판본이 한 권쯤 있지 않을까, 2주 뒤에 책 위에 내려앉은 먼지를 호호 불기도 아까운 그 책을 가슴에 꼬옥 안고 한국에 들어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날이 시작되는 아침부터 이미 마음이 콩닥거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렇게 기대하던 책방을 눈 앞에 두고 그보다 먼저 내 눈을 사로잡았던 건 바로 책방 거리, 그 자체의 풍경이었다.

일단 한국에서 알아간 거라곤 Goldsboro Books라는 이름과 대략의 위치뿐이라 이렇게 여러 책방들이 함께 있는 골목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해서 1차로 놀랐고, 바깥으로 보이는 책방 안의 분위기는 각 책방마다 고유한 색과 그림체로 되어있는 것 같은데 외관은 청록색으로 통일해서 하나의 책방 골목이라는 느낌이 확 들게 구성했다는 점에서 두 번 놀랐다.


분명 내가 쭉 걷고 있던 곳은 런던의 큰 길가였고 골목으로 들어가려고 왼쪽으로 꺾었을 뿐인데, 영화에서 장면이 전환되 듯 완전히 새로운 곳에 발을 들여놓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비가 골목 곳곳에 묻어 더 비현실적인 그림 같아 보여 그랬는지, 그 모습이 꼭 ‘다이애건 앨리’ 같아서 정작 눈에 보이는 Goldsboro Books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한참을 그 골목의 다른 책방들과 가게들을 보며 구석구석 서성거렸다


그런데 그때, 웬 열댓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골목으로 들어왔다. 선봉에 있던 사람은 가이드였는지 작은 마이크를 입에 대고 말하고 있었는데, 런던 투어인가? 궁금한 마음에 눈은 그 사람들과 먼 골목 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귀는 비가 오는 데도 쪼르르 모여 설명을 듣고 있는 사람들 쪽으로 향해 슬쩍슬쩍 움직였다. 빠르게 흘러가는 영어에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와중에 ‘Diagon Alley’라는 말이 귀에 팍 꽂혔다.


다이애건 앨리? 지금 이 골목이 다이애건 앨리라고 하는 건가 지금?

다이애건 앨리라고 하는 건지, 다이애건 앨리 촬영장이라고 하는 건지, 다이애건 앨리의 모습을 구상하는데 영향을 준 곳이라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때만큼은 한국에 있는 해리포터 지도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영국 여행할 때 해리포터와 관련된 곳들을 가보려고 큰 맘먹고 한국에서 구해놓은 지도였는데, 잊어버릴 게 따로 있지 그걸 잊어버리고 오다니.

어쩌면 이곳에 대한 설명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아쉬운 마음에 더 자세히 듣고 싶어서 슬금슬금 티 나지 않게 조금씩 가까이 다가갔지만, 이미 이 골목에 대한 설명은 끝난 건지 그들은 금방 자리를 떴다.


덩그러니 혼자 골목에 남아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을 피해 어느 책방이든 들어가보는 것이었다.







Goldsboro Books의 외관










그렇게 들어간 곳은, 당연히 Goldsboro Books였다.

밖으로 보이게 유리창에 전시된 책들만 봐도, 하나 같이 ‘나 아주 소중해요, 나 아주 귀중해요, 나 아주 값진 책이에요.(안 데려갈 거예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으응. 뭐라도 데려가야지. 그게 해리포터 책이면 더 좋고! 라고 대답하며 들어선 책방은 생각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거의 천장까지 닿을 것만 같은 책장에는 아래 위로 책들이 꽉꽉 차 있었다.

다 ‘초판본’들이라 그런 건지 앞이 뚫려 있어 쉽게 꺼낼 수 있는 일반 책장이 아니라, 앞이 유리로 막혀있고 찬장 같이 손잡이가 달린 문이 있어 열고 닫을 수 있는 책장이었다.






Goldsboro Books의 책장들






책방의 중앙을 다 둘러보고, 왼쪽에 계단이 있어 내려가 볼까 했지만 직원 분들만 드나드시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 같아 보여 지나치고, 대신 오른쪽에 있던 또 다른 방에 들어가 봤다. 사실 거의 모르는 책들만 있어서 이 책방의 어딜 둘러보든 결국 ‘해리포터 책 찾기’가 됐다.

오른쪽 방에도 없고, 아래층은 내려가 볼 수가 없고, 바깥으로 나 있는 창에 <해리포터와 저주받은 아이>라는 연극 대본은 있었지만 롤링이 쓴 게 아니라 별로 마음이 안 갔고.

작은 책방이니까 다시 한번 더 찬찬히 둘러보자, 뭐라도 발견할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다시 중앙으로 갔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책방 중앙의 왼쪽  책장에서 <음유시인 비들 이야기>(이하 비들 이야기)를 발견했는데,



아, 이거 좀 애매- 했다. 정말 애매-.



해리포터 마지막 편인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에서 등장하긴 하지만 일단 해리포터 메인 시리즈는 아닌 데다가, 가격이 80 £로 내가 여행할 당시 환율로 하면 아마 11~12만 원쯤의 금액이라 섣불리 구매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하루 예산을 10만 원으로 잡았던 터라 이걸 사고 오늘 하루 종일 쫄쫄 굶을 것인가, 아니면 이걸 사고 해리포터 스튜디오 갔을 때 굿즈를 조금 덜 살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미 이때부터 사지 않겠다는 선택지는 없었던 것 같지만 막상 이 상황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는 살 용기가 쉽게 나지 않았다. 그래서 책방 안을 뱅뱅 돌며 좀 더 고민해봤지만 아무래도 빠르게 결정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 손에 아무것도 든 것 없이 그대로 책방을 나왔다.


나와서 잠깐 잊자는 심정으로 아직 안 둘러본 다른 책방들을 차례로 들어갔다. 명상이나 주술 같은 주제를 다루는 책방, 지도 책방, 악보 책방, 거기다 화방까지 여러 다양한 책방들이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머리 한 구석에서 계속 존재감을 드러내는 ‘비들 이야기’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다 결국 다시 Goldsboro Books 근처까지 오게 됐는데, 아까는 보지 못했던 웹사이트 주소를 간판 아래서 발견했다.


사실 아까 혹시 다른 해리포터 책은 없는지 점원 분께 여쭤 보려다 뭔가 쑥스러워서 포기했는데 다행히 방금 발견한 웹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음유시인의 비들 이야기>는 재고 1개, <해리포터와 불의 잔>은 품절 상태로 검색 결과가 나왔다.


이럴 수가, 오히려 고민이 더 추가됐다.

영국에 있을 수 있는 앞으로 약 10일 남짓의 시간 동안 <해리포터와 불의 잔> 재고가 나올 때까지 속된 말로 ‘존버(존나 버티기)’를 할 것인가, <음유시인의 비들 이야기>에 만족하고 오늘 그 책을 사갈 것인가.

아무리 고민해도 쉽사리 결정 내리기가 어려워 결국 친구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래서 평소 즐겨 찾던 책 위주의 인스타그램 계정(북스타그램)의 인친들께 물어보려고 인스타 스토리에 질문을 올렸다.




재고 나올 때까지 존버
vs
오늘 비들 이야기라도 사 오기





결과가 나올 때까지 발 동동 거리고 있고 싶지는 않아서 책방 골목에서 나와 아예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마침 5분 안쪽 거리에 레고 스토어가 있어서 여기서 구경할 때만큼은 잊자, 제발 잊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역시 이곳은 해리포터의 나라. 레고 스토어에서도 이번에 새로 출시됐다는 해리포터 레고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어서 와, 해리포터 레고는 처음이지?


또, 해리포터 레고를 사 갈까 말까 하는 고민에 들어가게 되려나 걱정했지만 도저히 캐리어에 담아 가져올 수 없는 무게였고, 다행히 한국에서도 구할 수 있는 거라 사지 않기로 결정하는데 그다지 큰 힘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제 레고 스토어까지 구경을 끝내고, 대망의 인스타 스토리의 결과 확인만 남았다.

채 30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감사하게도 꽤 많은 의견들이 모아져 있었는데,

두구두구두구. 결과는?




7:3 정도의 비율로 ‘산다’가 7, ‘존버’가 3이었다.

그 길로 레고 스토어에서 나와 바로 Goldsboro Books가 있는 골목까지 내가 걸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걸음으로 파워 워킹을 했다.

이번에는 다른 책들을 구경할 여유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바로 ‘비들 이야기’가 있는 곳으로 직진했다.

처음 봤을 때 애매함을 느끼며 약간 심드렁했던 것과 달리 이렇게 다시 보니 살짝 바랜 듯한 표지에서 귀한 빛이 반짝반짝 일렁이는 것 같았다.






<음유시인 비들 이야기>






이미 확고한 마음에 시간을 더 지체할 필요도 없어 바로 옆에 계시던 점원 분께 이 책 사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왕 사는 김에 혹시 다른 해리포터 책도 있다면 돈을 좀 더 얹어서 사가자, 내가 여길 언제 다시 오겠어하는 마음으로 약간의 용기를 보태서

 “해리포터 책 다른 것도 있나요?”라고 점원 분께 카드를 건네며 물어봤다.


점원 분은 내 물음에 친절하게 대답해 주셨는데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일러스트북은 500£, <해리포터와 저주받은 아이> 대본은 무려 7500£ 였다. 와아우.

여기는 나중에 로또 되면 다시 와야겠다,라고 다짐하며 원래 계획대로 <음유시인 비들 이야기>만 품에 꼭 안고 책방을 나왔다.











이 날 Goldsboro Books에서 사 온 <음유시인 비들 이야기>는 아직도 내 책장 한 켠에서 자리를 빛내며 소중히 꽂혀있다. 한 권의 책을 이렇게 비싸게 산 건 처음이어서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히 느껴진다. 그리고 그때 사지 않았으면 아마 지금 100배는 후회했을 거라는 것도.


그래서 내 고민이 담긴 인스타 스토리에 응답해주신 분들께 감사하다. 7대 3이라는 한쪽으로 확 쏠린 결과가 아니라 단 한 명의 ‘산다’만 있었어도 아마, 아니 분명히 다시 그 책방으로 돌아가서 ‘비들 이야기’를 소중하게 꼭 쥐고 나왔을 거라는 건 나도 알고 우리 모두도 아는 일. 다만 그때 내게 부족했던 건 아주 약간의 용기, 그리고 아주 약간의 지지였다.


아, 역시 가끔은 이미 마음은 먹었지만 내 용기만으론 부족할 때, 누군가의 한 스푼의 응원이 필요할 때가 있다.
















덧.) Goldsboro Books가 있던 골목이 롤링 작가님께 ‘다이애건 앨리’ 의 영감을 줬던 곳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물론 저도 그중 한 사람이고요!


집에 와서 찾아 본 ‘해리포터 지도’






Goldsboro Books
23-27 Cecil Ct, Covent Garden, London WC2N 4EZ 영국
매거진의 이전글 멀리서 보면 백화점, 가까이서 보면 책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