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진심일 필요는 없으니까
모두와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세상에 나쁜 사이는 없다고 생각했다.
깨진 그릇도 다시 붙일 수 있고, 쏟아진 물도 다시 담을 수 있다고 믿던 순진한 생각과 희망으로 가득찬 시절이었다.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보이던 그때는 지금과는 정 반대로 웃음이 헤프다고 할 정도로 많이 웃었었다.
늘 웃고 진심을 다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럴 줄 알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언제부터인지 웃음을 감추고 함부로 정을 주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많은 사람들이 다가올 수 있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내가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에게만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춘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아무에게나 농담하지 않으며 내 바운더리 밖의 사람에게는 정성을 쏟지 않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첫인상이 좋다는 말보다는 어두워 보인다는 말이 많이 들렸고,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라는 말보다는 알고 보니 좋은 사람이라는 평이 더 많아졌다. 처음에는 그렇게 변해가는 자신이 싫었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바빠지고 챙겨야 할 것들이 많아질수록 이런 삶이 이질적이기보다는 효율적으로 느껴졌다.
서른이 지나기 전까지는 진심이 아니면서도 웃고 겉으로만 잘 지내는 것이 가식이고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양한 곳에서 사회생활을 해 나가며 어떤 곳에서는 얕게, 또 어떤 곳에서는 깊게 관계를 맺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내 마음을 진심으로 쏟지 않으면서도 모두와 잘 지내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화목하고 즐겁게 지내더라도 정이 깊어지지 않고 의지하지 않게 되는 얕은 관계도 있었고, 모여서 특별한 것을 하지 않아도 즐겁고, 항상 의지하고 싶은 관계도 있었다. 다양한 관계와 사회생활 속에서 사람들에게 웃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마음을 주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웃는 연습을 시작했다.
꼭 웃는 것이 마음을 주는 것이 아닌 것처럼 웃지 않는 것이 마음을 주지 않는 것이 아니기에,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오해하지 않고 좋은 인상을 가질 수 있는 밝게 웃는 얼굴과 적당히 높은 톤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연습했다.(뒤늦은 사회화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얕고 넓더라도 갈등 없는 관계 속에서 평안함을 느꼈고, 진심이 아닌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해도 점점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느 사람들처럼 이제야 다른 사람들과 얕고 넓으며 좋아 보이는 관계들을 형성해 간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도불장군이나 스크루지처럼 사람들을 배척하며 살아온 것은 아니다. 나름 "핵"까지는 아니지만 인싸의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꼭 온전한 내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더라도 갈등 없이 잘 지내면 그만인 것을 30대씩이나 되어 어렴풋이 깨달았다.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다면 좋았을 인생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지 않았을까.
훌륭한 사람들은 모두에게 진심으로 행하면서도 본인의 마음에 대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 인간관계의 완성이라고 한다. 나는 훌륭한 사람까지는 되지 못하기 때문에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삶까지는 살지는 못하겠다. 다만 누구에게나 웃고, 섭섭함은 흘려보내는 정도의 삶은 실천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제나 진심으로 치열할 필요는 없다. 나를 지키고 웃으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건강한 마음을 지키며 나를 위해 집중할 것에 집중하고 흘려보낼 것을 흘려보내는 개인주의자가 되려고 한다.
어쩌면 그런 개인주의적 삶이 역설적이게도 더 사회적인 삶이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