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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에 대한 문화적 접근

by 기록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은 다양합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을 원하는 경향성은 보편적이며 일관성을 보입니다. 이는 사회적 학습 경험이 성인보다 적은 아이들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사회적 아름다움에 대한 학습 경험이 적습니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 매력에 쉽게 빠집니다. 그래서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바라보거나 다가갑니다. 이런 인간의 본성 때문에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에서 공개된 전시물에 손을 데지 말라는 문구로 경계를 합니다. 아이는 이런 상황에서 부모님께 '전시물을 잡으면 안 된다'란 욕구를 억제하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배웁니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서도 작품을 보고 '예쁘다, 신기하다, 아름답다'는 이유로 작품을 직접 만져보고 느껴보려는 성인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런 경험을 떠올려 본다면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는 조절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즉, 사라지게 만들 수 없는 본능적인 영역인 것입니다.


이런 미적 욕구를 절제하기 어려운 어린아이 시기, 친구와 함께 만들기를 하는 미술 시간을 생각해 봅니다. 아이는 친구의 작품이 너무 예뻐서 자신도 모르게 가져갈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이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까요? 친구의 물건을 허락 없이 가져갔으니 사과하고 돌려주라고 할 것인가요? 아니면 잠깐 가져간 것으로 소란이냐고 작품을 만든 아이에게 한 마디를 하실 것인가요? 아마도 다수는 아이가 갖고 싶다는 욕구에 이끌려 친구의 허락을 받지 않고 가져간 것에 대해 문제 삼을 것입니다.



하나 더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자신의 생각을 밖으로 보였던 경험은 언제였을까요? 누군가는 머리와 가슴에 있던 무언가를 그림으로 표현했을 수 있고 누군가는 글로 썼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이야기(말)로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싶어 세상에 처음 내놓을 때, 그 순간에는 무엇인가를 나누겠다는 생각보다 오롯이 자신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을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입니다. 표현하는 힘이 부족하지만 조금씩 글로, 그림으로, 흥얼거림으로 또는 주변에 재료가 있다면 재료들을 사용해 구체적인 형태로 만들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자연스럽게 가장 가까이 있는 친구, 부모님, 선생님께 보여드렸을 것입니다. 그 후에 자신의 결과물에 대한 주변의 이야기(평가)를 들으며 공유하고 함께하는 즐거움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공통적인 경험을 근거로, 머리에서 떠오르는 것들을 표현하고 나누고 싶은 것 또한 어렸을 때부터 누구에게나 있는 공통적인 특성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갈하게 표현하는 것이 어른답다는 기준과 마주하게 됩니다. 표현하는 기쁨보다는 표현한 결과물에 대한 주변의 평가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주어진 기준에 맞춰 자신을 표현하는 기회를 스스로 줄이고 검열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침묵을 미덕으로 삼게 됩니다. 예를 들면, 제 경우는 그림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유아기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린 것은 아마도 중학교 미술 수행평가가 노력을 담아 그림을 그려본 마지막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저만의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성인이 된 후에도 미약하게나마 본능의 욕구, 어렸을 때 자유롭게 쓰고 노래하고 그리면서 나눴던 그 즐거움에 대한 마음은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이 된 시기에는 이런 욕구를 대리 충족하기 위한 대상물들을 찾아다닙니다. 구체적으로는 표현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감상을 하고 결핍된 욕구를 충족하는 대가로는 자신의 시간과 맞바꾼 돈을 지불합니다. 생존과 관련된 영역이 아님에도 다양한 작품들이 책 또는 전시회라는 모습으로 사회 속에서 소비됩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 저만이 이런 표현에 대한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어려움은 학생 시절과 사회생활을 하면서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편 창작을 위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사상을 세상에 내놓는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방송으로 종종 접합니다. 아티스트가 지금의 화려한 생활 이전에 빈곤했던 이야기를 토크쇼에서 밝히고 시청자들의 공감을 받습니다. 나민애 교수님 강연(나태주 시인의 따님)을 통해 나태주 시인이 한 편에 2만 원 밖에 안 되는 시를 계속 쓰기 위해 교단에 계속 계셨던 것은 아닐까란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많은 노력과 경우에 따라서는 희생도 필요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노력과 희생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은 우리의 반복되는 일상에 작은 변화를 줍니다. 반복되는 일을 할 때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고단함을 잊고 화장실에서 갑자기 만난 시를 보고 생리 현상을 해소하는 중에 잠시나마 일상을 벗어날 시간을 얻기도 합니다. 이런 다양한 형태의 작품들은 우리가 단순히 노동만 하는 기계가 아니라 생각과 감정이 있는 인간임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닻의 역할'을 합니다. 잠시나마 접한 작품으로 현실의 고단함, 지루함, 무감각에 대해 경계할 수 있습니다. '너는 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야'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자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마운 작품들은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게다가 세상에 나왔다고 하더라도 이전 작품과 비슷하면 표절이라며 배제되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요구받고 작가들은 조금이라도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자 노력합니다. 이런 상황에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을 유지하는 일, 그것은 작가 혼자 힘으로 대응하기에는 당연히 버거울 것입니다. 따라서 작품을 제작한 권리에 대한 보호는 물론이고 사회적 차원의 보호를 제공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른 사람의 노력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이유는 그것이 문제인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는 교육과 홍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다른 사람의 노력을 허락 없이 가져다 쓰는 이유는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작품에 대해 갖고 싶다는 본능과 경제적 대가를 통해 할 수 있는 일들 사이에 대한 고민 문제일 것입니다. 작품을 감상하는 비용이라면 생활하는 데 필요한 물건을 더 구할 수 있습니다. 한 끼의 식사 비용과 미술관 전시회 표를 구입하는 가격, 책 한 권을 구입할 수 있는 가격 중에서 한 끼의 식사 비용을 선택하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당연한 선택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작품들에 대한 향유와 보호 문제를 관점을 바꿔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관점으로 문화 차원에서 작품을 제공하거나 감상할 수 있는 경제적 지원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방식은 젊은 작가들을 지원해서 공공 작품을 만들고 그것을 보고 관심 있는 학생들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또한 현재 저소득층에 문화생활을 할 수 있게 바우처가 제공되는 것처럼 저작권을 보호하면서 관련 비용을 지불할 수 있도록 일정 수준의 문화비 지원을 하는 것입니다. 전자가 국가에서 선택한 작가에게 저작권 비용을 지원하는 관점이라면 후자는 이용자에게 저작권 비용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특히 후자의 경우 개인의 선호도와 선택권을 부여하기에 국가에서 지정한 작가만 지원하는 것과 비교해 더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원과 발전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이 우리의 삶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을 다수가 인정합니다. 그래서 과거와 달리 토요일과 일요일에 밖으로 나가면 어딘가에서 지원을 받은 공연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작품의 문화적 영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면 이렇게 세금으로 지원을 받고 시민들이 즐기는 상황은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작품과 생계를 위한 비용의 선택에 있어서 생계가 어려울 경우 당연히 작품 감상에 대한 비용 분배는 점차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면 여유로운 사람들은 지금도 일반인들이 접하기 어려운 오페라나 뮤지컬과 같은 문화를 지속적으로 향유할 것입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은 문화 향유가 지속적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마치 과거에 많이 가던 영화관에 대하여 비용 문제를 가지 않는 1순위로 제시하듯이 점점 문화에 대한 소비가 줄어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작품에 대한 감상 기회의 축소는 작품을 생산하는 환경을 어렵게 만들고 있음을 영화 제작자나 관람객이나 모두 공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작권에 대해서 문화적 접근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저작권이 저작자의 지속적 활동을 위한 보호라는 협소한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본적 욕구의 충족이자 문화적 경험에 대한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앞서 제시한 방법처럼 공공기관의 예술가들의 사회 참여를 독려하는 한편 더 바람직한 방법은 일정 비용에 대한 지원 금액을 공통적으로 측정해 필요할 때 문화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저작권에 대한 보호 방법이며 작가가 문화의 변화에 영향을 줄 결과물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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