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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뭄씨 Jul 05. 2023

필사(筆寫)를 두 달간 매일 하고 달라진 점

초보 필사가의 개똥철학



 물기 머금은 아침, 덕분에 날카로운 창밖 풍경이 조금은 낭만적입니다. 쌉싸래한 커피를 떠다가 옆에 두고 주백색 스탠드를 켠 다음, 좋아하는 책 한 권 그리고 필사 노트 한 권을 펼치는 것으로 저의 아침 일과는 시작됩니다. 필사는 5월 초부터 이어온, 저의 아침 습관입니다.      


 “손가락 끝으로 고추장을 찍어 먹어보는 맛” 안도현 시인이 생각하는 필사입니다.

 “화분에 물을 주듯이 눈길을 붓는 것이며, ET와 소년처럼 손끝을 맞대는 것” 

은유 작가는 또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사(筆寫), 베껴 쓰는 것을 말합니다. 몇 차례 글쓰기 수업을 들어보니, 강사님들이 이 필사에 대해서만은 꼭 한 번씩 언급하시더라고요. 하지만, 또 이처럼 논쟁적인 주제도 없습니다. 작가 지망생에게 가장 적극적인 독서 방법이라는 의견에서부터, 필사는 필사적으로 반댈세, 하는 의견까지.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좋은 문장을 수집하는 데 의의가 있다는 의견도 있고, 전체적인 글을 관통하는 흐름을 써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팔랑귀로 태어난 저는 그때그때 강사님의 입김에 따라 다양한 필사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시는 완결된 형태로 전체를 필사하고, 산문은 먹음직스러운 문장을 낚아 씁니다. 소설은 팔이 아프니 키보드 타이핑 필사를 하고, 나머지는 육필로 활자의 참맛을 느낍니다. 

 또, 선천적으로 끈기 없이 태어난 저는 혼자 매일 해낼 자신이 없었기에 ‘챌린저스’라는 앱(APP)을 통해 ‘책 필사하기’ 인증미션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두 달 동안 필사 습관을 기를 수 있었던 비밀이지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돈(money)기부여의 승리입니다.      









 그렇다면 필사가 과연 어떤 것이기에 설왕설래가 이다지도 많은 걸까요. 

 담백하게 그 특징을 추려보자면 이런 것 같습니다. 


1. 필사는 비효율적인 독서입니다. 

 신은혜 작가님은 처음 필사할 때 콩나물 키우는 기분이었다고 합니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하염없이 부어대는 듯 세상 무용한 일 같았다고요. 확실히, 필사로 한 권을 읽어내려면 느립니다. 저는 김이나 <보통의 언어들> 책을 필사하는데 2주가 걸렸습니다. 그냥 읽으면 하루면 다 읽었을 텐데 말입니다.     


2. 만족감을 주는 독서입니다.

 착각일지도 모릅니다만, 필사하면 쓰는 것만으로 그 책이 내 것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허은실 시인은 작가의 글이 스며들어 핏속을 떠다니다 나를 이루는 성분이 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나를 이룬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필사 노트란 ‘결과물’이 있으니, 책을 야무지게 읽은 것 같은 보람이 듭니다.      


3. 작가의 리듬감, 사고방식을 습득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행간에, 조사에, 구성 방식에 은밀하게 숨겨둔 작가의 의도를 찾을 수 있는 원 앤 온리(One and Only), 유일한 방법이 필사라고 합니다. 이는 웬만한 눈썰미가 있지 않고서야 일반적인 독서 방법으로는 파악하기 힘듭니다. 아마 문학 수업에서 이를 권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테지요. 필사를 통해 단번에 습득하고, 배울 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필사를 통해 작가의 의도를 짐작이나마 해보자는 시도겠지요.      







 그렇다면 매일 필사를 꾸준히 하니 제 살림살이가 좀 나아졌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전 필사 2달 차에 접어드는 초보 글쟁이, 글린이일 뿐입니다. 필사의 효용성을 논하기엔 기라성 같은 작가님들 앞에서 번데기 주름잡는 꼴 같아 민망해집니다. 다만, 다음 달에도 전 필사를 할 예정이고 개인 일정이 허용하는 한 이 습관을 지속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소박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제게 필사는 글쓰기로 향하는 가장 빠른 입구입니다. 

 뭔가를 매일 꾸준히 글쓰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어떤 날은 귀찮고, 또 무엇을 써야 할지 막막해서 외면하고 싶습니다. 괜히 손톱도 다듬고, 휴대폰도 보고 하면서 뭉그적거리게 됩니다. 하지만, 필사해야 하기에 전 매일 책상에 앉습니다. 앉아야 합니다. 하지만 일단 책장을 넘기고 관절을 움직이다 보면 글쓰기에 심적 거리감이 확 가꿔집니다. 또, 영롱하고 보드라운 문장들을 주워 담다 보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반짝할 때가 많습니다.      


2. 책을 가까이 두게 되었습니다. 

 전 소인배라서 보통 듣기보다 말하는 걸 좋아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독서보다는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필사를 한 뒤 좋은 글, 문장을 발견하는 재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또 매일 뭔가를 써야 하니 자연스럽게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아래는 2달 동안 필사를 통해 읽었던 독서목록입니다. 


- 허은실 <내일 쓰는 일기>,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 김이나 <보통의 언어들>

- 은유 <글쓰기의 최전선>, <쓰기의 말들>

- 타이핑 필사: 김영하 <당신의 나무>, 김애란 <건너편>, 레이먼드 카버 <깃털>     


3. 레퍼토리가 풍성해집니다.

 필사하는 시간 동안, 천천히 관절이 글자를 따라 움직이고 글의 내용과 나만이 온전히 무념무상의 세계로 빠져듭니다. 그렇기에 필사는 몸으로 익히는 일이라고 하지요. 확실히, 몸으로 배운 것은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그냥 머리로 읽었다면 금방 휘발되었을 지식도 조금은 유효기간이 길어짐을 느낍니다. ‘아 이런 내용이 있지 않았나?’ 생각해 필사 노트를 뒤적이면, 보석 같은 문장이 짠! 하고 나타납니다.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전, 사각사각 펜이 종이를 스치는 마찰음이 좋습니다. 초성, 중성, 종성 하나씩 활자를 더듬어 가며 천천히 마음속에 결을 만들어 내고 좋아하는 작가님의 숨결을 그 속에 투영시켜 보는 체험 자체가 맘에 듭니다. 2달여 필사의 계절. 노트 한 권을 그렇게 채워내고, 오늘 또 그렇게 새로운 노트를 꾸렸습니다. 그리고 그게 퍽 만족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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