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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뭄씨 May 31. 2023

16주차. 임산부라도 가녀리고 싶어

생 로랑(Saint Laurent)의 엣지를 동경해야 해



  새벽 어스름이 햇살에 뒤꽁무니 빼기 시작하는 시간. 휴직으로 인해 오늘도 별다르게 할 일은 없지만, 아침이 밝았으니 또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다. 느릿느릿 잠자리를 물리는 데 몸이 천근만근. 아니 근데 오늘은 실로 몸이 무거워 진 것 같습니다.


  ‘52.9kg’

  괜히 체중계 따위에 상처받고 싶지 않아, 실오라기 남기지 않고 올라섰습니다. 그럼에도 냉정한 이 녀석은 발바닥에 닿는 냉기만큼이나 냉정하게 숫자를 제 몸에 찍어냅니다. 발꿈치를 살짝 들어보기도 하고, 숨을 잠시 참아도 봅니다. ‘좀 깎아주세요’ 값싼 적선을 바라는 심정으로 말이지요. 앗, 근데 꼬물꼬물 움직이니까 53이라는 숫자가 언 듯 비쳤습니다. 혼쭐난 아이처럼 비루한 몸부림을 급히 중단합니다. 그렇습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전, 어제보다 0.5kg 만큼 이 세상에 존재감을 키웠습니다.






  ‘품는다는 것. 둥글어지는 것. 

  둥그런 것을 지키기 위해 둥근 자리를 만들고 둥글어지는 일. 

  - 허은실 〈내일 쓰는 일기>’


  허은실 시인은 임신을 직선의 팔을 구부려 둥글게 만들고, 슬픔도 물리쳐 밀어두며 ‘둥그런 둥지를 짓는 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위험과 미혹을 물리치기 위한 모성의 모습으로요. 그래, 나는 ‘숭고한’ 일을 하는 과정을 수행중입니다. 얼마 전 필사를 통해 만난 이 문구를 매만지며 스스로를 다독여 보지만 마음은 쉽사리 추슬러지질 않습니다. 아니, 평소처럼 먹었을 뿐이고, 야밤엔 살찔까봐 자제하기까지 한 기특한 마음을 모르고 +0.5kg의 수치는 너무한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 조금의 영양소 손실도 놓치지 않을 거라는 제 세포의 눈물겨운 모성애! 증가하기만 하는 몸무게의 비가역적 굴레에 마음이 멍들며 설움이 번집니다.       



  관리를 해야겠습니다. 몸무게 증가가 ‘모성의 자연스러움’이라는 건 핑계라고 확신합니다. 우리 엄마를 비롯한 혹자는 임산부가 체중조절이나, 다이어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자격’을 운운하며 날을 세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철딱서니 없다’고 나무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얼마 전 ‘열달후에’라는 앱의 산모체중관리를 통해 진단한 저의 몸무게 증가량은 예비맘 100명 중 5등 안에 드는 높은 수치였습니다. 평균치보다 2.5kg 높으며, 이는 해외 ‘kidspot’란 사이트의 결과와도 동일했습니다. 몸무게 증가가 모성애를 발현하는 척도라면 저는 이미 ‘임계치’를 넘은 겁니다. 






  인스타그램에는 이번에 저보다 먼저 임신의 사실을 알린 나이어린 회사동료가 ‘만삭’ 인증사진을 올렸습니다. 팔, 다리 사지는 발레리나 같은 평소 그녀의 모습과 다름없네요. 볼록한 배만이 ‘만삭’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무뎌지고 흐려지는 외곽선이 임산부의 모범답안이거나, 살찌는 것이 외적인 자기희생으로 여겨지지 않는 시대입니다. 저의 알고리즘이 생성한 다른 임산부들만 살짝 훑어보아도 요즘 임산부의 모습이 달라졌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제 심리적 방어기제, 또는 무의식에게 외칩니다. “살찌는 데 핑계대지 말라!”고요. 매일 나다움을 조각하려는 노력, 몸매관리를 위해 갈고 닦은 모서리가 아이를 향하지는 않을 거라고요.      



  ‘에르메스도 부드러워, 어쩌면 생 로랑(Saint Laurent)의 엣지를 동경해야해.’ 

  1시간 웨이팅을 무릅쓰고 애월에서 사가지고 온 랜디스도넛을 단호히 물러내고, 오늘 아침 끼니로 바나나를 입에 물면서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단호해져야 할 때. 확실히 둘째가 되니 배가 불러오는 속도도 남다릅니다. 첫째 때는 만삭 때 최종 8kg증가로 마무리했지만, 둘째는 4개월 남짓 지난 시점에 벌써 5kg나 찍어버렸네요. 이때 필요한건 자극이 될 만한 이미지. 생 로랑의 중성적이고 날렵한 턱시도라인의 이미지가 좋겠습니다. 일단, 시작은 블랙핑크 로제의 생 로랑 화보 이미지를 구해다가 거실에다 붙여두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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