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현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김강현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⑱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지루함
오토바이 한 대로 수많은 도시와 수많은 나라를 달렸던 282일, 1만 8000km의 이야기.
잠시 한눈을 팔기에도 버거운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삶은 딱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 힘들고, 그래서 다른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숨만 쉬며 살아가는 데도 많은 돈이 들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숨 쉬는 시간 빼고 일을 해야 하는 과노동 사회에서 여행은 누군가에게 꿈이자 낙이 되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 지쳐있던 나는, 진짜 내 모습을 찾기 위한 긴 여행을 다녀왔다. 남미 대륙을 여행했던 20세기의 체 게바라처럼 바이크에 몸을 맡기고 유라시아 대륙을 여행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말과 낙타가 뛰어다니는 초원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막에서, 눈이 잔뜩 쌓인 산 위에서 수도 없이 자신을 마주했고, 그 안에서 자아를 찾고자 노력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해 몽골과 중앙아시아, 유럽을 거쳐 다시 중앙아시아까지, 1만 8000km의 거리를 282일 동안 바이크 한 대로 누볐던 내 무모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⑱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지루함
자리가 너무 좁아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랐다. 영화 ‘설국열차’의 실사 판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긴 거리를 달린다는 그 유명한 열차. 여행을 하면서 도로 옆으로 지나가는 열차는 수도 없이 봤지만 직접 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리는 좌석이 아니라 침대로 돼있고, ㄷ자 형태로 마주보는 침대 두 개와 통로를 사이에 두고 벽에 붙어있는 침대가 있다. 내 자리는 벽에 붙어있는 침대 2층. 얇은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려야하고, 딱 누울 수 있는 만큼 아주 좁다. 천장이 낮아 앉을 수도 없고, 겨우 몸을 구겨 침대 위에 누우면 옆으로 돌아눕기도 불편하다. 말 그대로 성냥갑 안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전날 술을 많이 먹은 데다 하루 종일 무거운 짐을 들고 돌아다니며 고생했기에 일단 좀 쉬기로 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에 기차 안은 시끌시끌하다.
핸드폰을 충전할 곳도 마땅치 않아 배터리를 최대한 아껴야 했기에 꺼뒀다. 내 뒷자리에 있는 일행에게 인사를 하고 핸드폰과 지갑 등 중요한 물건을 가방에 넣어 꼭 끌어안고 잠들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잠에서 깼다. 사람들은 곳곳에서 빵과 차로 아침을 먹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로 내려왔다. 찌푸둥한 몸을 조금 풀고 주변을 보니 앉을 곳조차 없다.
통로는 굉장히 좁았는데, 짐이 있어서 겨우 한 사람이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만 남아 있다. 배가 고파 어제 미리 사둔 빵을 통로에 서서 먹었다.
화장실은 안 그래도 깨끗하지 않은데, 씻는 사람들 때문에 이미 물바다다. 조금 돌아다녀 봤지만 갈 곳이 없어 그냥 다시 자리에 돌아와 누웠다.
정말 할 게 없어 가만히 누워 있다가 또 다시 잠이 들었다. 두어 시간쯤 자고 일어나니 일행도 일어나서 배가 고프단다. 이번에는 빵 만으로는 끼니를 때울 수 없을 것 같아 컵라면을 꺼내 자리에서 내려오니, 1층에 있는 아저씨가 자기 자리에서 먹으라며 자리를 비워준다.
객실 사이에는 온수기가 있다. 위생 때문인지 정수나 냉수는 없고 뜨거운 물만 졸졸 나오는 아주 낡은 쇠로 된 온수기다. 라면에 물을 받아 1층 아저씨의 자리로 왔다.
1층은 가격이 더 비싸기 때문에 2층을 선택했는데, 너무 불편하다. 1층은 침대에 걸터 앉아있을 수도 있고, 벽에 접혀진 간이테이블을 펴고 음식을 먹을 수도 있다.
‘이 성냥갑 같은 열차에서 하루를 어떻게 더 버티지’ 하며 라면과 빵을 먹었다. 아무래도 먹는 자리가 불편하고 누군가 양보해줘야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배가 잔뜩 부를 때까지 최대한 많이 먹었다.
정거장 음식을 놓칠 순 없지
밥을 먹은 후 기차 칸 사이의 통로로 나왔다. 그나마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공간이 있다. 벽에 기대 창밖을 보니 기차는 아주 느린 속도로 초원을 지난다. 창밖으로는 초원과 자작나무 숲이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바이크로 달리면 정말 좋았을 것 같은 풍경이지만 달리는 기차 안에서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배터리를 아끼려 꺼놨던 핸드폰을 켜고 음악을 들었다. 화장실을 오가는 사람들과 칸을 넘나드는 승무원 말고는 사람이 지나가지 않아 노래와 함께 들리는 기차소리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한참 노래를 듣고 있자니 또 지루함이 몰려온다. 그때 기차에서 안내 방송이 나왔다. 아마 어떤 역에 정차하는 듯한데, 정차할 때마다 그 앞에 음식을 파는 사람들이 나와 있던 것을 본 적이 있었기에 일행에게 내려서 먹을 것을 사오자고 말하고 짐을 챙겨 나갈 준비를 했다.
몇 분이나 정차하는지 알 수 없어 승무원을 잡고 손짓 몸짓으로 설명해 몇 분간 멈추는지 알아냈다. 승무원 말로는 15분간 멈춘다고 했는데, 혹시 여기서 기차를 놓치면 큰일 난다는 생각에 10분 안에 먹을 것을 사서 돌아오기로 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만큼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을 계산하면 더 빠르게 움직여야한다.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서자 길가에 음식을 파는 사람들이 보인다. 기차가 멈추기 전에 우리는 각자 갈 곳을 정했다. 나는 샤슬릭을 사기로 했고, 친구는 양념된 고기가 들어있는 빵을 사기로 했다.
기차가 멈추길 기다리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나가 음식을 주문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그동안 숙달된 바디랭귀지는 의사소통에 부족함이 없다. 계획했던 10분보다 훨씬 빨리 자리로 돌아왔다.
샤슬릭을 꼬치에서 빼 비닐봉지에 양파 슬라이스와 함께 담아줬는데, 냄새부터 입에 침이 고이게 한다. 빵은 큰 군만두처럼 얇은 밀가루 피 속에 고기와 채소 등이 들어있는 것을 튀긴 것인데, 기차가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튀겨놓은 건지 손으로 잡기 뜨거울 정도다.
기차 칸 사이 통로에 서서 우리의 바디랭귀지를 칭찬하며 음식을 먹었다. 이대로 러시아에 살아도 큰 불편함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면서.
사진첩 속에서 추억을 꺼내다
배부른 상태로 자리에 돌아와 과자까지 한 봉지 먹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또 잠들엇다. 몇 시간이나 잤을까. 소곤소곤하는 말소리를 들으며 깼다. 일어나보니 다른 사람들은 잘 준비를 하거나 자고 있는 시간이다.
일행은 아직 자고 있고, 주변은 조용하다. 화장실에 가서 양치와 세수를 했다. 낮에는 다른 사람들도 다 씻느라 자리가 없었는데, 밤이 되니 비어있어서 겨우 씻을 수 있었다. 다시 돌아와 자리에 누워 꺼놨던 핸드폰을 켜고 사진첩을 열었다.
사진 몇 천 장 속에는 지난날 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함께 찍은 사람들과의 추억, 그때의 분위기가 선명히 떠오르는 사진부터 ‘이건 언제 찍은 거지’ 하는 사진까지. 사진을 보고 있자니 또 그리움이 몰려온다.
사진을 다 보고나서 여행을 떠나기 전 친구들이 써준 롤링페이퍼와 편지를 읽다 눈물이 났다. 이 여행에서 느낀 가장 큰 감정 중 하나는 그리움이다.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돌아가서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지’ 하는 다짐과 맞물려 계속 커진다.
무언가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고 하지만, 나는 이미 소중한 것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행을 시작한 지 2주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모든 순간들이 그립다. 사진 속 웃고 있는 그 때의 내가 부러울 정도로.
여행을 떠나오며 친구들에게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는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 바이크를 고치면 부지런히 달려 얼른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은 외롭고 길다. 통로로 나가봤지만 창밖은 캄캄한 어둠만 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지루함이 깊어지다 못해 해탈의 경지에 오른 느낌이다.
지루하다는 감정을 느낀 게 언제인지 헤아려본다. 고등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공장에 취직해 비정규직 노동자로 하루에 12시간, 길게는 17시간씩 일했고, 대학에 입학해서는 학생 대표자를 했다. 학교를 나오고 나서는 또 공장에 들어가 하루에 12시간씩 일하며 여행자금을 모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긴 어렵겠지만 참 바쁘게 살았다. 그래서 지금 느끼는 지루함이 낯설다. 아무것도 할 게 없고,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 나는 지금 인생의 쉼표를 찍고 있다. 조금 쌀쌀해져 자리에 누워 이불을 덮고 일기를 쓰다 잠들었다.
이르쿠츠크의 첫 느낌은 ‘회색’
다음날 아침, 이제 내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기차 안에서 편하게 신고 있던 샌들을 벗고 부츠를 신었다. 꺼냈던 짐을 다시 가방에 넣고 내릴 준비를 마친 후 빵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잠시 후 안내방송이 나왔고 창밖으로 도시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르쿠츠크다. 루슬란이 치타보다 더 큰 도시라고 한 것처럼 사람도 차도 많다.
기차가 멈추고 우중충한 날씨의 이르쿠츠크를 만난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본 하늘이 그래서였을까, 갑작스런 도시의 모습 때문이었을까, 이르쿠츠크의 첫 느낌은 ‘회색’이었다.
일행과 함께 배낭을 메고 역을 빠져나가기 위해 플랫폼을 걸었다. 그 전에 헤어진 일행들이 지금 이르쿠츠크에서 숙소를 잡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기에, 그 숙소까지 택시를 타고 갈 생각이었다.
역을 빠져나가는데 우리처럼 짐을 잔뜩 들고 있는 여행자들이 보인다. 혹시나 해서 가까이 가보니 한국 사람들이다. 방학을 맞아 횡단열차를 타고 여행하고 있는 대학생들이다.
오랜만에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 이르쿠츠크라는, 이름도 몰랐던 도시에서도 비슷한 또래의 한국 사람을 만났다는 게 신기해 한참 이야기했다.
그들은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까지 갔다가 동유럽을 여행하고 한국에 돌아간다고 했다. 내가 갈 방향과 비슷했기에, 연락처를 받고 좋은 숙소나 맛있는 식당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하고 헤어졌다.
이제 택시를 타고 일행들이 있는 숙소로 가는 일만 남았다. 바이크는 화물로 보냈기에 아마 며칠 더 걸릴 것이다. 역 앞에 대기하고 있는 택시기사들과 흥정하고, 가장 싼 가격의 택시를 잡아 일행들이 있는 숙소의 주소를 말했다. 택시기사도 그곳을 알고 있는 듯, 주소를 듣자마자 출발했다.
택시를 타고 도시를 통과하면서 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큰 도시다. 도시는 아름다웠지만, 내 머릿속에는 오직 ‘이곳에서는 내 바이크에 맞는 부품을 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가득했다.
비가 내리는 이르쿠츠크의 오후. 이곳에서는 내 바이크가 다시 살아나길 간절하게 바란다. 이틀간의 지루한 시간이 끝나고 이제 다시 여행을 시작할 순간이다.
자투리 여행 정보 18. 이르쿠츠크
이르쿠츠크는 2006년 기준 인구 약 60만명이 살고 있는 러시아 동부의 대도시다. 동 시베리아의 행정ㆍ경제ㆍ문화가 집중돼있고, 시베리아 횡단열차 역과 이르쿠츠크 국제공항이 있는 교통의 중심지다. 기계 제작업과 식료품공업, 경공업과 제조업 등이 발달한 공업 도시이기도 하다.
이르쿠츠크는 몽골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때문에 예로부터 중국ㆍ몽골ㆍ중앙아시아와 모피나 금 등의 거래가 활발했다. 도시 가운데로 안가라강이 흐르고, 북쪽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호수라는 바이칼이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 지역이다.
이르쿠츠크국립대학ㆍ이르쿠츠크국립언어대학ㆍ이르쿠츠크국립공과대학ㆍ바이칼국립경제법률대학ㆍ이르쿠츠크철도기술대학 등 교육시설도 잘 갖춰져 있다.
규모가 크고 발달한 도시이기에 유명 브랜드의 옷이나 프랜차이즈 음식점 등 익숙한 간판을 많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