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 없는 세상은 올까

by 시우
KakaoTalk_20250922_185300439.jpg 건물의 기존 입면은 각 임차인들의 간판 콜라주 뒤에 숨어 사라져 버린다.


이제는 약속 장소를 “만남의 광장” 같은 곳으로 정하는 일이 거의 사라졌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나 원하는 목적지에 쉽게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가게들을 둘러보는 대신, 스마트폰으로 방문 리뷰를 검색해 목적지와 약속 장소를 정한다. 더 이상 지역의 거점이나 랜드마크 중심으로 길을 찾지 않는다. 한때 잘못된 표현의 대명사였던 ‘역전앞’이 쓰이지 않는 것도, 사람들이 이제 올바른 표현을 쓰기 때문이 아니라 ‘역 앞’ 공간 자체의 의미가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스마트폰은 길을 경험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덕분에 간판이 없어도 사람들이 잘 찾아오는 가게가 생기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간판을 건물의 새로운 입면처럼 설치한다. 건물의 원래 입면은 각 임차인의 간판이 만들어낸 콜라주 뒤에 가려져 사라져 버린다. 간판으로 가득 찬 도시의 거리는 난잡해서 어지럽다. 건축 설계를 하는 입장에서는 건물에 대한 사회적 존중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인가 절망감을 느낄 때도 있다. 한편으로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고자 분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 보여 안타깝기도 하다.


그러한 노력 끝에 모든 가게들이 자리를 잡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자영업자의 신규 창업 대비 폐업률이 80%에 달한다고 한다. 그만큼 개업과 폐업이 잦고, 따라서 간판도 빈번히 교체된다는 뜻이다. 인테리어는 이전 임차인이 해놓은 것을 그대로 쓰기도 하지만, 간판만큼은 가게가 바뀌면 반드시 새로 달기 때문이다. 간판 산업을 통한 경제적 효과도 있겠지만, 반복되는 철거와 설치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 또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제는 건물만이 아니라 간판 및 인테리어의 생애주기비용을 관리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가게를 여는 입장에서 가장 손쉬운 홍보 수단인 간판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뚜렷한 대안이 있지는 않지만 어쩌면 증강현실(AR) 안경의 등장이 그 기회 중 하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모두가 지금의 스마트폰처럼 AR 안경을 착용한다면, 물리적 간판을 없애고 가상공간에만 사이니지를 띄워 각자 원하는 정보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가게는 더 과감하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고, 시즌마다 자유롭게 디자인을 바꿀 수 있다. 소비자는 필요한 정보만 취하며 더 쾌적하게 거리를 거닐 수 있을 것이고, 간판에 드는 사회적 비용도 크게 줄어들 것이다. 증강현실 안경의 대중화가 그만큼 현실적이지는 않겠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니까 희망 섞인 상상을 해본다.


간판으로 뒤덮이는 현상은 못생기고 노후한 입면 때문에 생겨나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차피 간판으로 가려질 것이라 애초에 설계 단계에서 입면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게 되는 탓에서도 비롯된다. 여기에는 도시의 공공 자산으로서의 가치는 끼어들 틈은 없다. 간판의 난립은 단순한 시각적 혼란을 넘어, 우리가 어떤 사회적 가치와 태도로 도시를 대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도시와 건물은 임차인의 생존 경쟁을 위한 무대이기만 할 것인가. 이제는 우리 삶의 기억과 경험이 켜켜이 쌓이는 공간으로서 다 같이 가꿔야 할 대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KakaoTalk_20250922_185439175.jpg 간판 위주가 아니라 본래 입면 위주의 도시 모습이 된다면 우리 도시의 모습은 생각보다 훨씬 더 멋스러워질 것이다.



이 글은 도시관측 챌린지 활동을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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