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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야매 Apr 16. 2019

4월 16일, 그 날은

잊어서는 안 되는 그날을 잊던 날

출처: Pixabay

그 날은, 깨어났을 때부터 정신이 없었다. 아마 전날 과하게 마신 술 때문인가 보다. 언제까지 마시다 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뇌가 통째로 알코올 속에 잠겨 있는 기분이다. 오늘 저녁에는 부산에서 일본 가는 배를 타야 한다. 그러려면 점심 즈음에는 서울역에서 부산행 기차를 타야 하는데 지금 같아서는 아무래도 늦을 것 같다. 일단은 씻기로 한다. 어서 이 지끈한 숙취를 벗어나고 싶다. 


씻는 동안 TV에서 소식이 흘러나온다. 수건으로 머리에 물기를 털어내며 뉴스에 귀를 기울인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던 여객선이 침몰했다는 것 같다. 다행히 전원 구조라는 이야기가 뒤따라 들린다. 그래도 기분 나쁜 소식이다. 오늘 배 타는데 을씨년스럽게, 괜히 한 마디 던지며 물기를 마저 턴다. 그리고 머리 속에서도 이 소식을 털어내 잊으려 한다. 지금은 서울역에 늦지 않게 도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가까스로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이전 소식이 오보였음을 전하는 뉴스가 역 안 TV에 가득하다. 아까 괜히 던진 한 마디가 마음에 켕긴다. 사람들은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바라본다. 나 또한 비슷한 표정으로 스크린 속 앵커와 눈을 마주친다. 눈은 무감정하게 비참한 소식을 전달한다. 앵커에게는 슬픔보다 뉴스를 전달해야 하는 그의 임무가 더 중요한가 보다. 복잡다단한 감정이 머리 속을 스친다. 나도 이내 그 눈을 피하고 부산으로 가는 일에 집중하기로 한다. 


KTX는 순식간에 나를 부산으로 쏘아 보낸다. 열차가 바다와 가까워질수록 사망자 수가 점점 늘어나는 것을 실시간으로 확인한다. 멀리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무기력한 방관자의 스탠스는 어느 것이 바람직한지 알 수 없다. 숙취는 여전하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억지로 감은 두 눈 뒤 어둠으로 어쩌면 아직 감기지 않았을 그들의 눈이 떠오른다. 나는 그들의 고통을 상상하고 어설픈 공감에 빠진다. 동시에 이기적이게도 내가 곧 타야 하는 배를 걱정한다. 지금 나는 슬픔에 잠기는 것이 맞는지 걱정에 빠지는 것이 맞는지 헷갈린다. 나는 스마트폰만 애꿎게 뒤적인다.


바다 내음이 여객선 선착장 주변을 맴돈다. 어두운 구름이 스산한 날씨는 바다를 한 없이 깊어 보이게 한다. 그들을 삼킨 검은 물 위로 거대한 배가 떠있다. 나도 어제의 그들처럼 선착장을 지나 배에 몸을 싣는다. 싫어 안 탈래 무서워, 앞에서 줄을 서던 아이가 떼를 쓴다. 일고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그 아이의 손을 아버지쯤 되어 보이는 어른이 붙잡고 함께 선창다리를 건넌다. 이 배는 괜찮다는 그 목소리만 믿고 아이는 배를 타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그 아이도, 그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오늘의 소식을 떠올리면 괜히 겁이 난다. 하지만 우리는 가야 할 곳이 있기에, 더 이상 그 소식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배는, 마치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는 듯이, 시간이 되자 뱃고동 소리를 우렁차게 울린다. 배는 출항하고 바다를 가른다. 이어 기상이 좋지 않으니 갑판으로 나가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안내가 선내에 퍼진다. 그 안내를 믿어도 되는지 의구심이 든다. 문 위치를 확인하고, 일본 배는 다를 것이라 대강 짐작하며 마음을 놓으려 노력한다. 


일본 배의 가장 큰 장점은 맥주자판기가 있다는 점이다. 맥주를 한 캔 뽑아다 마신다. 숙취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일단 마셔야 할 것 같다. 맥주를 마시는 나를 쳐다보는 눈이 느껴진다. 이 배에도 수학여행을 떠나는 고등학생들이 있다. 자꾸 눈이 마주친다. 평소 같으면 금새 눈을 피했겠지만, 오늘은 괜히 말이 걸고 싶다. 수학여행 가나 봐요, 네. 고등학생이에요, 맞아요. 한 두 마디 건네다 못내 어색해 그만둔다. 학생도 나도 지금 떠올리고 있는 그 소식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그 소식은 대신, 마주친 두 눈 사이를 맴돈다.


빈 캔이 점점 늘어난다. 화장실을 몇 번이나 다녀오면서도 그만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정신이 아득하게 마취되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내일은 할 일이 있다. 하지만 숙취를 걱정하기에는 잊어야 할 것이 많다. 그러지 않으면 나도 내일을 살아 낼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의 눈을 잊는다. 죄책감도 함께 잊는다. 뇌 기억 중추가 서서히 알코올 속으로 잠겨 들어간다. 그렇게 나는 잊을 수 없는,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되는 그 날의 소식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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