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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살려면,
미학이 죽어야 한다?

파리의 우버운전사

매일 일을 시작할 때면,  바흐의 미사곡을 듣는다.

Bach Mass in B minor, BWV 232

매일 들어도 질리지 않는 바흐의 음악이 놀라웠다.

처음 한동안 들은 버전은 유튜브에서 우연히 다운로드한 네덜란드 악단의 연주였다

'네덜란드 바흐 소사이어티'라는 이름의 악단의 연주는 나쁘지 않았다.

전문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냥 듣기에 편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흐르고 우연히 유튜브에서 다른 버전을 찾게 되었다.

존 엘리엇 가드너 경이 지휘한 실황연주였다.

다운로드하고 첫 소절을 듣곤 금방 멈추었다.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강력해 보이는 첫 소절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1년간 들은 네덜란드 악단의 연주에 내가 익숙해져 있었다.


며칠이 지나고,

다시 가드너 경의 연주가 떠올랐다.

그래서 그날은 멈추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하며 한번 들어보았다.

그날 이후, 나는 다시 네덜란드 악단의 연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렇게 돌아가지 못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날 이후 이젠, 매일 가드너 경의 연주를 듣는다.

간혹 두 번째로 듣게 될 경우 네덜란드 악단의 연주를 듣긴 하지만, 여러모로 식은 애정을 부인할 수 없었다.

왜일까? 난 왜 그렇게 느껴졌을까?


논쟁적인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서양예술과 미학에 대해 쓴 책이 한 권 있다.

제목은 '내용 없는 인간'.

호모 사케르라는 논쟁적인 주제로 철학계의 화제를 모았던 그가,

이민자 문제를 비롯한 사회적인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이전인 30대의 나이,

그러니까 42년생인 그가 1970년, 28세에 내놓은 책이다.

참고로 그는 베네치아 건축학교의 디자인 예술학과 교수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우리 시대의 예술이라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를 원한다면

아마도 미학의 파괴보다 더 시급한 과제는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한 부분이었다.

읽을 당시엔 이해가 가지 않았던, 단순히 미학을 파괴한다는 말이 충격이었던 이 말을,

나는 바흐의 경우를 통해 (내 방식으로) 이해했다.

'예술을 살리려면 미학을 죽여야 한다.'라고...


네덜란드 악단의 연주는 흠잡을 곳이 없어 보였다.

악단도 솔리스트들도 성악가들도 모두 아름답게 연주하고 노래했다.

더구나 이 악단은 '바흐'전문 악단이었다.

처음부터 듣기에 편했고, 다른 연주를 찾을 생각이 나지 않게 해 줄만 틈 그 음악엔 '안락함'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안락함'이 문제였다.


가드너 겨의 연주를 처음 듣고 첫 소절에서 멈추어 버린 것은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지휘자의 의도가 읽히는 강조점이 분명한 시작이 '불편'했다.

그런데 며칠 뒤 그 연주가 다시 생각나고 한번 제대로 듣고 난 뒤엔, 

네덜란드 악단의 안락한 연주로 돌아갈 수 없어진 것은, 

가드너 경이 연주한 버전의 '작가의 의도'가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비정형으로 보이기도 하고, 무언가 알 수 없는 '끌림'이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었다. 

그것이 '예술'로, '더 예술적으로' 느껴졌다.

더 일상적으로 표현한다면, '더 재미있었다.'


때론 과해보이기도 하고, 부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 어딘가 어긋나 있어 보이는 그 구도가 좋았다.

(사실 말로 무어라 설명하기가 애매하다.)

네덜란드 악단의 연주는 '아름다웠다'.

'균형'있게 아름다웠고, '과'한 부분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것이 전부였다.

그 아름다움 말고 다른 어떤 상상을 불러일으켜주는 요소가 없었다. 

네덜란드의 연주는 완벽하게 미학적이었고, 그 이후가 없었다.

아름다운 미학적으로 잘 다듬어진 '명품백'같은 '명품 연주'였다.

그러나 그 이후가 없었다. 거기서 멈추어 있었다.

그때 아감벤이 말이 떠올랐다.

'예술'을 다루려거든 '미학'을 먼저 '파괴'해라.


네덜란드 악단의 연주는 바흐 음악 소사이어티라는 이름답게, 바흐를 충실하고 '재현'하고 있었다.

다만 가드너 경의 연주는 다른 것이었다.

불안전해 보이고 긴장되어 보이지만, 무언가 다른 말할 수 없는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것이 앞을 알 수 없는 것이었고, 앞을 알 수 없는 우리의 삶처럼, 생명처럼,

예술이 살려면, 그렇게 멈추지 않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아감벤은 그의 책에서 말한다. 

이 시대의 예술의 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시'의 위기라고,

그것은 무엇이 만들어질지 모르는 행위가 되어야 하는 '시'가,

모두 무엇이 만들어질 것인지 알게 되는 상황, 그런 상황이 예술의 위기라고 말한다.

결과를 알 수 있는 무언가는 흥미롭지 않다.

넘쳐나는 콘텐츠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넷플릭스건 디즈니건 쏟아지는 시리즈의 대부분은 '처음'을 보면 '끝'을 알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성형미인이 생명력 없는 아름다운 조각만은 맞추어놓은 결과물인 것처럼,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이라면,

그것은 표면적인 아름다움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어야 했던 것이다.

바흐 덕분에,

아감벤의 말을 이해했다.


1) Netherlands Bach Society

네덜란드 바흐 소사이어티의 연주

https://www.youtube.com/watch?v=3FLbiDrn8IE


2) 존 엘리엇 가드녀 경의 연주

https://www.youtube.com/watch?v=CT6vRpmyiW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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