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니어에서 시니어로 성장하는 과도기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업무 경험을 작성합니다.
2022년을 마무리하던 어느 날, 회사 Product Owner에게 DM이 왔다. 본인의 연차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물어보는 내용이었다. 평소에 깊이 생각을 하지 않고 살다가 새삼스럽게 되돌아보니 벌써 4년 차였다. 아무것도 모르던 신입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그새 한번의 이직을 거쳐, 수 없이 많은 프로젝트를 참여한 디자이너가 되어있었다. 그럼 나는 정말 4년 차에 걸맞은 성장을 했나? 생각해 보면 잘 모르겠다.
신입 시절에는 '모르는 것이 뭔지 모르는 상태'였다. 열정도 패기도 넘쳤기에 끊임없이 스터디와 사이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강연을 들으러 다녔다. 지식이 있으면 다 그대로 흡수하는 스펀지였다. 3년 차쯤 되었을까, 이제는 프로젝트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강연의 내용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자연스레 성장은 멈췄다. 이제는 어떤 새로운 인풋이 들어와도 뇌가 익숙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시니어라고 말하긴 애매하고, 주니어라고 말하긴 부끄러운 4년 차 UX디자이너는 과연 무엇으로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내가 느낀 포인트들을 되짚어보기로 했다.
이전에는 준비된 기획서를 받으면 바로 어떻게 디자인할지 고민했다. '왜'에 대한 건 빠져있었다. 우리가 이 프로젝트를 왜 해야 하고, 왜 이화면을 개선해야 하며, 우선순위는 왜 이렇게 선정했는지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 하지만 '왜'에 대한 질문이 없으면 좁은 시야에서 디자인을 하게 된다.
입사 초반, 출석 기능에 관한 디자인을 진행한 경험이 있었다. 당시에는 주어진 기획을 빠르게 작업하는데 급급해서, 이유를 모른 채 작업을 진행했다. 그렇다 보니 디자인은 빨리 할 수 있었지만, 내가 왜 이 일을 하는가에 대한 동기부여가 없었기 때문에 마치 남에게 손만 빌려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 후, 동일한 기능을 고도화하는 작업을 맡았다. 이번에는 왜 이 작업을 해야 하는지, 우선순위가 높은 이유는 무엇인지, 왜 정보를 이렇게 보여주어야 하는지 (개발스펙 때문인지, 파트너사 요구사항인지)에 대해 관련자들과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앞에서의 많은 논의 덕분에 서로 프로젝트의 당위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시작할 수 있었고, 충분한 동기부여와 함께 좋은 협업 경험을 남길 수 있었다.
부끄럽지만 예전의 나는 회의에 들어가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미 정해진 내용을 수용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회의는 내가 기회를 펼칠 수 있는 장이었고, 내용이 확정되기 전 나의 의견을 어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였다. 깨달음 이후, 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기획서를 읽어보고 미리 질문과 디자인을 준비해 가는 습관이 생겼다. 예리한 질문으로 기획서를 수정한 적도 여러 번 있었고, 오히려 역으로 디자인이 괜찮아 기획서를 엎는 일도 있었다. 점점 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자, 일로만 느껴졌던 작업들도 '내 것'이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모든 프로젝트는 이어져있다. 예를 들어, 우리 회사 서비스의 온보딩 화면을 제작한다고 생각해 보자. 화면에는 서비스의 로고, 서비스의 원칙, 톤 앤 매너, UX writing 등 수십 개의 정보가 필요할 것이다. 만약 모든 디자이너가 본인의 작업을 할 때마다 위 요소들을 새롭게 만들면 어떻게 될까? 그 회사는 아마도 중구난방의 브랜딩을 하는 곳으로 인식될 것이다.
이렇기에 신생 스타트업이 아니고서야, 대부분의 회사는 이전의 히스토리가 있고, 현재의 서비스가 있으며, 내가 하고 있는 미래의 디자인이 있다. 따라서 새로운 일이 주어지면, 반드시 관련된 맥락을 파악해야 한다. 이전 작업은 어땠는지, 비슷한 온보딩을 했던 회사 내 다른 서비스가 있는지, 또는 우리 회사가 추구하는 방향은 무엇인지 아는 것은 나의 디자인에 근거를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일을 잘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한다.
위 3가지의 기술은 결국 업무에서 '자기 주도성'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내가 나의 서비스를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본인의 능력과 상관없이 과정과 결과가 아쉬울 수밖에 없다. 좋아하는 서비스에서 일하는 것도 물론 동기부여에 중요하지만, 이왕이면 내가 다니고 있는 지금 이 회사에서부터 주도적으로 해보는 건 어떨까. 어떠한 곳에서든 열심히 일하는 인재는 눈에 띄기 마련이고, 언젠가는 나의 '자기 주도성'이 나를 원하는 곳으로 데려가 줄 구두가 될지도 모른다.
네 가지 기술은 모두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데 도움이 되었던 방법들이다. 이전까지 단편적이고 수동적으로 일을 해왔다면, 요즘은 맥락 안에서 주도적으로 일을 하고 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이제는 적어도 내가 무엇이 부족한지 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