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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성실 Nov 06. 2023

'2인자' 네임택 떼고 메이저리그의 'KING'이 되다

2023 ML 유틸리티 골든글러브 -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김하성

고교 시절 후배에게 밀려 주전 유격수 자리를 내주고 2루수로 뛰었던 선수가 있다. 고교야구 최고의 유격수라고 불리던 유망주와 함께 프로에 입문했고, 하필이면 그가 뛰게 된 팀에는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고 중 하나로 뽑힐 20대 중반의 키스톤 콤비가 있었다. 이 '2인자'의 커리어는 어떤 방향으로 풀려나갔을까? 글쎄, 그 선수가 9년 뒤 세계 최고의 야구 선수들이 모이는 메이저리그에서 포지션별 최고 선수에게 주는 골든글러브를 받았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는가?




● 20-20 클럽 가입해도, 역대 3번째 100타점 유격수 돼도 '만년 2인자'

데뷔 2년 차의 김하성. 사진은 자신의 커리어 첫 끝내기를 굿바이 홈런으로 장식했던 2015년 6월 6일 목동 두산전.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당사자인 김하성의 기대감은 1년 전보다 더 떨어졌다. 김칫국을 제대로 마셨던 지난해의 악몽 탓일까. 그는 더욱 조심스러웠다. 김하성은 시상식에 앞서 가진 인터뷰에서 “오늘은 마음을 비우고 왔다. 지난해 수상소감까지 준비했다가 못 탔는데 오늘은 하나도 준비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 [골든글러브] 아~김재호…올해는 ‘빈손’ 촉 맞힌 김하성, <MK 스포츠>, 2016.12.13 

'만년 2인자', '무관의 제왕'. 커리어 초기의 김하성을 가장 잘 설명하는 수식어다. 신인 시절의 김하성은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유격수라고는 믿을 수 없는 활약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신인왕부터 골든 글러브까지 어떤 상도 받지 못했다. 어쩌면 그 시절의 경험이 지금의 김하성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2014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넥센 히어로즈(現 키움)에 2차 3라운드 지명을 받았던 김하성은 당시에만 해도 차세대 2루수로 기대받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고교 시절에는 1년 후배인 박효준에게 밀려 2루수로 뛰었던 데다가, 1차 지명을 받았던 입단 동기 임병욱이 고교야구 최고의 유격수라는 평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프런트와 키움 팬들은 임병욱이 강정호의 뒤를 잇는 거포 유격수로, 김하성이 서건창이 뒤를 잇는 교타자 2루수로 성장하는 그림을 기대했다. 그마저도 서건창이 겨우 20대 중반의 나이었으므로 한참 이후의 미래라고 생각했다.


고졸 신인 김하성은 구단과 팬들의 기대를 완벽히 배신했다. '포스트 서건창'으로 성장하는 대신 '포스트 강정호'가 된 것이다. 2014년 시범경기에서 도루 중 부상을 당한 임병욱을 대신해 2군에서 유격수로 나선 김하성은 14경기서 3할 6푼 2리의 고타율과 안타 17개 중 7개를 장타로 만드는 펀치력, 그리고 빠른 발(6도루)을 뽐냈다. 1군에서는 비록 1할 타율에 그쳤으나 공·수·주 모든 면에서 5툴 플레이어로서의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렇게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드름투성이의 야구 소년은 구단의 계획을 완전히 어그러뜨렸다. 실력으로써 자신에 대한 구단의 기대치를 '미래의 교타자 2루수'가 아닌 '다음 해의 거포 유격수'로 수정시킨 것이다.


고졸 2년차였던 2015년부터 해외로 진출한 강정호의 빈자리를 차지하고 주전 유격수가 되었다. 그리고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2인자 생활'도 시작됐다. 2015시즌에는 3할에 근접한 타율을 기록하면서 19홈런 22도루, .851의 OPS(On Base Plus Slugging, 출루율+장타율)을 기록했다. 타율과 도루를 제외하면 리그 내 유격수 중 김하성의 타격 성적이 가장 좋았다. 김하성 또한 자신의 골든글러브 수상을 예감하고 수상소감까지 준비해 시상식에 참석했다. 하지만 황금 장갑의 주인공은 그가 아닌 '3할 베테랑 유격수' 김재호의 몫이었다. 신인왕 또한 1군 데뷔와 동시에 리그 최고의 타자로 거듭난 구자욱에게 밀려 받지 못했다.


풀타임 2년차 시즌이었던 2016년에는 유격수로서 역대 세 번째로 20-20 클럽에 가입했다. 세부 지표는 다소 아쉬웠지만 전년도에 골든글러브를 받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인 '상징성'을 채웠다는 데서 의의가 있었다. 팀 동료인 서건창은 아예 "내가 아닌 하성이의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시상식에 참석했다"라고 인터뷰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해에도 김재호에게 골든글러브를 내줬다. 2017년에는 커리어 첫 3할 타율은 물론 겨우 스물하나의 나이에 유격수로서 역대 3번째 단일 시즌 100타점 기록을 달성하는 등 흠잡을 데가 없는 성적을 올렸다. 그러나 '타격왕' 김선빈에게 밀려 3년 연속 득표 2위의 고배를 마셨다. 




● '봐, 누가 살아남았지?' KBO리그의 1인자로 올라서다

2020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3년 연속 유격수 골든글러브 수상 소감을 밝히고 있는 김하성.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김하성은 강정호(피츠버그) 김재호(두산) 등에 밀려 늘 ‘2인자’로 불려왔다. 이날 시상식장에 참석한 두산 김재호도 “성적으로 따지면 (김)하성이도 충분히 자격이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받지 못하더라도 마땅히 축하할 일이다. (김)하성이가 받으면 2인자 설움을 날릴 수 있어 남다른 의미로 다가갈 것”이라며 진심어린 축하를 보냈다. - 히어로즈 김하성 골든글러브 수상으로 버킷리스트 완성, <스포츠서울>, 2018.12.10

꾸준히 성적을 개선했지만 득표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2015년에는 110표를 받으며 김재호(188표)에게 78표 뒤처진 2위의 성적을 냈으나, 2017년에는 86표에 그치며 김선빈(253표)보다 3배 가까이 못 받았다. 센세이셔널한 활약을 펼침에도 놀라우리만치 상복이 따르지 않으니 스포츠 언론에서는 그를 동정의 대상으로 조명하기 시작했다(정작 표는 그들이 안 줬다). 정작 김하성 본인은 3년째 무관에 그친 것에 대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언젠가는 받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이듬해에 더 잘하겠다는 말을 남길 뿐이었다.


꾸준히 성적을 유지한 김하성은 풀타임 4년차 시즌이었던 2018년에 드디어 생애 첫 골든글러브를 품에 안았다. 사실 개인 성적만 놓고 보면 커리어 로우 시즌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수비 시 포수 다음으로 체력 소모가 큰 유격수로 뛰면서도 3년 연속으로 20홈런을 기록하면서 꾸준함을 입증한 점,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 게임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주전 유격수로 뛰며 좋은 성적을 올렸다는 점에서 좋은 평을 받았다. 당시 김하성은 "개인 성적은 부족하지만 많은 것을 이룬 1년"이라며 "앞으로는 놓치지 않고 계속 황금 장갑의 주인공이 되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김하성은 메이저리그로 진출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골든글러브 수상을 놓치지 않으면서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냈다. 2019년에는 KBO리그에 만연하던 타고투저 풍조가 상당 부분 해소되며 타자들의 타격 성적이 전체적으로 하락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커리어하이를 기록했다. 타자로서 가장 높은 승리기여도(sWAR* 7.22)를 기록하면서 2년 연속 골든글러브 수상에 성공했다. 포스팅 자격을 얻기 전 마지막 시즌이었던 2020년에는 KBO리그 역사상 세 번째 30홈런 유격수, 두 번째 30홈런-100타점 유격수가 되었다. KBO리그의 38년 역사를 통틀어서 봐도 2020년의 김하성과 비교할 수 있는 유격수가 손에 꼽힐 정도였던 셈이다.


첫 풀타임 3년 동안의 김하성은 자신보다 한 발자국 앞서 있는 경쟁자들에게 골든글러브를 내주며 '미래가 기대되는 영건' 포지션에 만족해야만 했다. 해외 진출 직전 2년 동안 그에게 감히 유격수 골든글러브 경쟁자라며 도전장을 내밀 수 있는 선수는 없었다.




● 빅리그 최고의 내야진에서 거머쥔 '메이저리그 최고의 내야수' 타이틀

(사진 출처 :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공식 SNS)
"저는 좋은 선수들과 같이 경기를 뛰고 싶었어요. 되든 안 되든 최고의 선수들과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제 야구를 발전시키고 싶어요. 그래서 샌디에이고를 선택한 거예요. 우승에 가까운 전력이니까요. 멀티 플레이어든, 플래툰이든 제가 가서 직접 부딪쳐서 이겨내야죠." - [DUGOUT People]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김하성, <더그아웃 매거진>, 2021.03.08

KBO리그를 완벽히 폭격하고 메이저리그로 떠나게 된 김하성이었지만, 막상 그의 미국행을 바라보는 팬들의 시선은 복잡 미묘했다. 그가 이적하게 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는 2루에 김하성보다 겨우 한 살 많은 '전년도 신인왕 공동 2위'의 제이크 크로넨스워스가, 그리고 3루와 유격수 자리에는 MVP급 타자인 매니 마차도페르난도 타티스 주니어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의아해했지만 김하성만은 "되든 안 되든 최고의 선수들과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내 야구를 발전시키고 싶다"고 샌디에이고행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세계 최고의 야구 리그에서도 손에 꼽히는 선수들과 전력으로 부딪히면서 주전으로 살아남았다. 1년차에는 타격면에서 아쉬운 성적을 거뒀으나 2루와 3루, 유격수 자리를 오가며 유틸리티 플레이어로서 최상급의 수비 능력을 뽐내며 생존에 성공했다. 2년차였던 지난해에는 기존에 좋은 수비에 더해 타격에서도 메이저리그 평균 급 성적을 올리면서 주전으로 발돋움했다. 올해는 정규시즌 개막 전 '거포 유격수' 잰더 보가츠가 영입되면서 2루 포지션에서 승부를 봐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하지만 아무런 문제 없이 주전 2루수 경쟁에서 승리했다. 2할 6푼의 타율과 17홈런 30도루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한 덕분이었다.


김하성은 금일(한국시간) 열린 MLB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내셔널리그 유틸리티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자로 선정됐다. 사무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2023년 한 해 동안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수비수 중 한 명이었다는 인증을 받은 것이다. 이제 김하성을 '고교 야구부 후배에게 밀려 유격수 자리를 내준 2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식의 만년 2인자', '타티스, 크로낸스워스보다 한 수 아래인 샌디에이고의 백업 내야수' 같은 이미지로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야구선수 중 하나다.


커리어 첫 '메이저리그'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김하성은 "개인적으로 대단한 기쁨을 느꼈다기보다는 아시아의 야구 꿈나무들에게 내야수로 메이저리그 진출을 꿈꿔도 된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게 더 행복하다"라는 소감을 전했다. 아시아 출신의 내야수가 메이저리그에서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처음부터 최고는 아니었으나 펫코 파크의 한가운데에서 'KING'이라고 불리게 된 김하성이 그 주인공이기에 더욱 찬란한 희망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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