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편지: 쓰라
당신의 편지에는 나로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감각이 있습니다. 마치 장미 정원에서 모퉁이를 돌았더니 여전히 환한 낮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때처럼 뭔가 예상치 못한 그런 것이 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 (p248)
없다. 언제부터 편지를 쓰지 않았는지 아니 누구에게 언제 편지를 썼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편지라는 단어가 기억에서 사라졌다.
멀리 떨어져 지내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해야 할 말이나 하고 싶은 말을 전화로 하고 전화로 미처 못한 말은 톡이나 문자로 보내면서 종이에 글자를 써서 내 마음을 표현하는 형식의 편지는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해야 할 말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쓸 필요가 없어진 종이로 주고받는 편지는 그렇게 서서히 내 기억 속에서 잊혀갔다.
그러다 어느 날 연락이 끊어졌던 대학 친구와 우연히 손이 닿았다. 갱년기의 긴 터널에서 힘겹게 빠져나오고 있던 중에 닿았던 손이라 더없이 반가웠다.
그 친구와 대학 때부터 결혼 초기까지 무던히도 많이 주고받았던 편지를 다시 찾아 읽으며 이십 대의 나를 다시 들여다보는 추억여행을 했다. 편지를 꺼내 읽으며 혼자만의 추억여행을 하면서 친구와 만났던 시간보다 떨어져 만나지 못했던 시간이 몇 곱절 많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쉽게 생각했다. 겨울날 우연히 닿은 손이 따스해서 할 말이 많을 것이라고, 하고 싶은 말이 끝이 없을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 실수였다. 연락이 닿지 않아 보지 못함으로 서로 할 말이 줄어들고,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지는 것으로 서로 주고받았던 편지가 사라진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가 갱년기의 시간을 힘들게 보내는 동안 친구는 갱년기보다 더한 배신의 고통과 상실의 아픔으로 인한 고난의 시간을 더 힘겹게 견뎌내고 있었다. 헤어지고 돌아와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친구에게 내가 선물했던 책과 짧은 글을 쓴 엽서는 위안과 위로가 되지 못했다.
몰랐다. 아니 생각이 없었다. 빈 둥지 증후군으로 시작된 나의 갱년기의 시간처럼 친구의 시간도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치유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선의의 말이 친구에게는 약이 아닌 독이 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미안했다.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몰라 헤매고만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흘렀고 봄이 오고 여름이 왔다. 푸르던 잎들이 단풍이 들어가는 가을 초입에서야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친구의 편지에 오랜만에 답장의 편지를 썼다.
친구야! 미안했어.
너의 고통의 시간을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해서 미안해. 아픔의 시간으로 산산조각 나서 깨져버린 너의 마음과 그 긴 세월 동안 네가 들였던 노력의 시간이 다 바람처럼 날아가 버린 허무의 그 시간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네가 얼마나 힘든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내 아픔에 취해서 너의 아픔을 아는척하며 이겨내 보라고 쉽게 말해서 너무 미안해.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너의 손을 잡고 그저 꼭 안아주었어야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헛된 말로 상처 난 너의 가슴에 또다시 상처를 입혀서 정말 정말 미안해.
아픈 너를 내가 또 아프게 해서 진짜 진짜 너무 미안해. 사과하고 또 사과할게.
그러니 친구야!
지금 네가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고 치울 것들을 치우는 힘듦의 과정을 견디며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너에게 내가 아무런 도움이 안 되겠지만 그래도 그날처럼 생각나면 언제든 전화하고 또 편지해.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감정을 부여잡으며 억지로 참지 말고 울고 싶을 때 울고, 네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서 서운했다고 말하고, 내 말에 상처받아서 아팠다고 화가 난다고 네 마음이 풀릴 때까지 말해줘.
너의 아픔을, 너의 고통을 지레짐작으로 아는척했던 무심한 나를 부디 용서해 줘. 나는 지금 네가 이렇게 힘들지만 어렵게 견뎌내며 나에게 너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해줘서 정말 고맙고, 상담을 받으면서 너를 지켜내는 지금의 네가 자랑스러워. 그러니 친구야! 언제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전화하고 편지해. 다 받아 줄게. 아무 말 없이 안아줄게.
힘듦의 시간을 견디는 친구와 다시 소통할 수 있는 편지의 존재가 고마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