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우영 Nov 16. 2022

“나쁜 땅은 없어요”

양평 ‘하이브 마인드 프로젝트’ 설계의 기록 1편

누가 봐도 '좋은 땅'이란 게 여즉 남아있을 리 만무하다.


어차피 땅은 한정되어 있고 수요는 늘어나고 있으니 소위 좋은 땅은 누군가의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는 게 당연한 일이다. 주택단지 신축을 위해 의뢰받은 양평의 땅 역시 그 범주 안에 있었다. 수년간 사람들의 손을 거쳤으나 아직 개발되지 않은 채 매물로 나와 있고 감정평가액보다 더 높은 대출금액으로 인해 땅은 스스로의 자생력을 잃은 상태였다.


더욱이 ' 아직 개발되지 않은 채'라는 말엔 항상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예상한 분양가에 비해 지나치게 거품이 많은 토지의 상황 (설정, 압류 등)이 그렇고 긍정적이지 않은 (북향, 경사지, 입지조건 등) 토지의 주변 환경이 또 그렇다. 두 가지 모두 해당된다면 결국 건축주는 다른 땅에 눈을 돌리게 된다. 하지만 이번 일을 의뢰한 건축주는 달랐다.


  

" 나쁜 땅이 어딨습니까? 고민하면 좋은 땅이 되는 거죠" 


건축주의 이 한마디로 이런저런 검토 단계 없이 무작정 현장부터 방문했다. 건축주와 건축사로 만난 작년의 프로젝트(현재 진행형) 덕택에 서로 신뢰를 갖고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새로운 땅이 궁금했다.


왕복 4차선 메인 도로에서 40여 미터를 올라가면 현장이다. 전투복 차림의 건축주(70이 넘으셨지만 목소리는 청춘인)는 벌써 잡풀 우거진 현장에 들어설 기세이다. 다세대주택 3동이 들어설 땅이다. 


오르막 끝에, 그것도 4층 빌라 뒤에 위치한 사이트 


멀리서 본 현장의 첫인상은 유쾌하지 않았다.

현장으로 올라가는 길은 떡하니 4층 규모의 주택이 막아서고 있다.  오르막 길의 맨 끝에 숨겨진 현장은 그래서 더 갑갑해 보였다.


현장은 남북 방향 길이 약 40m x 동서방향 길이 약 40m의 경사지다. 현장의 시작점인 북측에서 남측의 끝까지는 약 7m의 높낮이로 형성되어 있다. 오르막의 끝이 북쪽이고 현장이 남쪽을 보고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현장은 정반대로 앉아 있었다. 북서향의 땅이다. 게다가 남동쪽으로의 인접지는 높이 1.5m~2m가량의 석축 옹벽으로 덮여있다. 조망과 채광은 기대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최악이다.


사이트 뒤편에 위치한 석축

그래도 석축의 건너편이 궁금했다. 별다른 기대 없이 잡풀을 헤치고 간신히 옹벽 위로 올라섰다. 그런데 여기가 반전이다. 현장을 등지고 바라본 풍경은 기막혔다. 마치 누군가 정리해 놓은 듯한 초록의 잔디부터 골조공사 중에 중단된 절의 외관, 인접지에 공사 중인 토목현장까지 그야말로 모든 게 다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풍경이었다. 이미 이 땅의 모든 조건을 알고 있었던 건축주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웃고 있었다. 


현장 남측 석축에 올라서 내려다본 풍경


갑자기 여러 아이디어와 질문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석축 위 남동 측으로 일부 열려있는 초록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혹시 절에서 나오는 소리가 주택단지까지 들리는 건 아닐까? 인접한 곳의 토목공사 현장의 용도와 규모는 무엇일까? 사계절 불어오는 바람을 예상해본다면 이곳은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의 땅이 되는 건 아닐까? 이 모든 걸 건축계획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그렇게 이 땅을 만나자마자 나는 스케치북을 꺼내 들고 따질 것도 없이 이미 현장 환경분석을 시작했다.

  

대지 경사 7미터, 북향, 극복해야 할 모든 조건


(1) 해가 뜨고 해가 지는 방향 - 대지의 정남 부분이 가장 높고 정북 부분이 가장 낮은 형태이다

건물의 배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주된 거실의 방향을 어떻게 할 것인가. 조망권과 남향, 그리고 각각의 건물에서 바라보이는 거실과의 간섭 등을 고려해야 한다.


(2) 바람의 방향 - 겨울 북서풍과 여름의 남동풍

기존 건물로 인해 남측으로의 조망권이 갑갑해지는 건 단점이지만 그로 인해 그나마 겨울바람을 직접 받지 않으리란 예측은 다행이다. 창호 계획의 단서이다. 


대지 분석 현장 스케치


(3) 주변 환경 - 건물이 들어서지 않는 자연녹지 / 언제든 다시 시작될 공사현장 / 인접한 남서 측 현장의 규모와 용도 파악 필요


(4) 진입도로에서 단지 내 출입 - 약 15%의 경사지

이번 계획안의 가장 핵심적인 조건이다. 대지의 초입부터 대지의 남측 오르막 맨 끝은 약 4미터 차이, 그 후 다시 석축 옹벽 위까지 (자연녹지 부분) 다시 3미터 높이이다. 진입 레벨과 1층 바닥 기준 레벨 등을 결정하는 조건이며 어쩌면 모든 계획안의 핵심 키의 역할을 하게 되리란 예상이 든다. 


(5) 현장에서의 조망권과 단지 레벨의 결정

남향으로 열린 조망권을 갖고 있는 땅이라면 나한테까지 올 필요가 있었겠는가. 극복해야 할 현장의 모든 요소 중에서도 가장 묵직한 부분이다. 건물이 어느 쪽으로 열리고 어느 쪽으로 닫힐 것인가. 어떤 표정과 몸짓으로 서있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조건이 될 것이다.


  

승산이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조건


건축주가 내게 설계를 의뢰한 이유를 알았다. 현장의 조건에 맞는 최적의 다세대주택(빌라) 3개 동을 짓는 것이 일단 건축사의 할 일이겠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건축주는 새로운 개념의 주택을 원했다. 그는 나를 알고 있었다. 어떤 악조건의 땅이라도 내가 상자 밖에서 반드시 무언가를 찾아내고 해결책을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주문은 훨씬 더 복잡했다.


현장의 위치가 아무리 사람들의 선호도가 있는 지역인 양평이라고 하더라도 인근의 분양가 등을 고려하면 그 지역의 주택형태와 분양시장은 얼추 결정되어 있다. 서울 근교의 관리지역(주거지역보다는 밀집도가 덜하고 기반시설, 편의시설 등도 부족하다)에 세워지는 다세대주택은 인근의 아파트 단지에 비해 낮은 분양가로 형성되어 있기 마련이다. 주거 밀집 지역에서 벗어나 있는 취약점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이런 조건이라면 적당한 공사비를 투입해서 주변 시세로 신속하게 분양하는 게 그나마 주택사업의 성공 확률이 높이는 일이겠지만 누가 봐도 쉽지 않은 조건이다. 게다가 이번 현장처럼 대지의 환경조건이 주변보다도 나쁜 상황이라면 성공확률은 더욱 낮아질 수밖에 없다. 분양가를 더 낮출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답이 나오지 않는다. 가장 평범하게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 빡빡한 다세대 빌라를 짓는다고 가정해도 승산이 없다는 뜻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평생 주택사업의 한길을 달려온 건축주는 이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될만한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 했다. 대지의 악조건을 오히려 장점으로 바꾸고 넓지 않은 땅이지만 오직 이 땅 위에만 세워질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주거 아이덴티티를 만들고 싶어 했다. 이 프로젝트가 어려운 두 번째 이유다.


  

건축주와 나, 끝까지 한 방향을 바라볼 수 있을까?


건축사 입장에서는 어려운 악조건 2개가 겹친 프로젝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직 수익만을 목적으로 하는 빌라를 짓자고 했으면 단번에 거절하고 내려왔을 일이다. 일부러 어려운 땅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그 땅이 가진 유일함을 발견하고 그 위에 설계하는 과정이 좋다. 나를 건축사로서 살아있게 하는 작업이다. 


우리는 곧바로 의기투합에 들어갔다. 프로젝트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악조건이 이중으로 있지만, 반대로 이런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한 방향을 바라볼 수 있는 건축주와의 만남이다. 이 관점에서 그는 준비가 되어 있는 건축주였다. 단순 수익만을 목적으로 하는 설계 현장이 펼쳐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프로젝트이기에, 그래서 더욱 서로 한 방향을 바라봐야만 하는 시작점에 우리는 서있었다.


논의는 길지 않았다.


첫째 수익이 날 것.

둘째 입주자들은 이곳에 사는 자부심을 갖게 될 것.

셋째 이번 사업이 끝이 아니라 앞으로의 사업에 모델이 될 것.


이렇듯 사업의 목표는 명확했다. 하지만 프로젝트의 실패를 한두 번 겪지 않았으니 이런 호기로운 출발도 불안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건축주의 의지가 아닌 외부환경 즉 분양시장, 금리, 자금조달 등으로 인해 언제든 사업은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음을 수없이 경험해왔다. 건축사도 마찬가지다. 프로젝트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설계 계약을 하지 못한다면 여러 환경 변화에 어느 순간 추진력을 잃는 순간에 직면한다. 의지만으로는 어렵다. 삶을 유지하고 좋아하고 잘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으려면 그 보상도 함께 가야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는 쉽지 않다. 결국 설계 계약의 체결까지 몇 번의 고비와 설득이 필요할 것이다. 정당한 대가 기준에 대한 합의는 또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답은 그 땅에 있다.


이 건축 일지의 첫 장을 쓰는 지금도 그 불안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불안감이 명확하다면 그 해결 방법 또한 명확해 보인다.

위 논의의 결과, 세 가지에 분명히 그 답이 있다.


이번 건축 일지 첫 장의 제목 "나쁜 땅은 없어요!"

결국 누가 봐도 악조건인 땅이니 그 기대치가 주변의 땅보다 낮다는 뜻이고 이 악조건을 다른 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긍정적인 조건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돈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둘째 이곳에 사는 자부심과, 셋째 다른 사업의 모델이 된다는 것 역시 땅의 조건을 긍정의 땅으로 바꾸면서 이뤄지는 것일 테다. 그리고 그 해결 방법에 집중하면 건축사로서, 건축주로서, 프로의 조건을 서로 장착하고 일을 시작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다음장에서는 긍정의 땅으로 바꿔가는 설계과정을 하나하나 그려나가 볼 것이다.

물론 그 이야기의 첫 구절이 "프로젝트에 집중할 수 있는 설계 계약 완료"이길 기대한다.


현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용문산 자연휴양림


작가의 이전글 한 방향을 바라보는 출발점에 서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