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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우영 May 07. 2023

건축가의 꿈에서 모두의 꿈으로

양평 하이브마인드 프로젝트 - 설계의 기록 3편

정확히 1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6시에 일어났다.

휴일이었던 그날 아침도 윗집에서 들리는 알람소리에 잠을 깼다. 아기코끼리 동요에서 부터 "일어나, 일어나!" 외치는 사람의 목소리까지 알람소리는 다양하게 울렸다. 내가 먼저 잠을 깨고 5분쯤 후에 알람소리가 멈추곤 했다. 아마 알람이 울리자마자 침대 밑으로 던져두었을 것이다. 아파트 단지에서 자주 보고 친했으면 모닝콜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고3이었던 그 학생은 원하던 대학을 갔다고 전해 들었으니 1년간 나의 아침도 뭔가 기여를 한 기분이었다.
  

‘테라스가 있는 빌라’, 그 시작을 더듬어


테라스가 있는 빌라의 상상은 그때부터였다. 매 층마다 똑같은 단위세대가 차곡차곡 쌓인 주택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공간들이 윗집, 아랫집에 있다면 어떨까?


활동하는 시간이 다르고 쓰임새가 다른 공간이라면 말이다. 10년 전에 비해 놀랍게 발전한 건축기술로도 층간소음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 부분은 건축시장을 주도해 가는 대형 건설사의 수익구조와 관계가 있어 단순히 건축기술만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층간소음의 문제는 다음기회에 좀 더 다른 시각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고3 수험생은 내게 주택설계에 힌트 하나를 던진 셈이었다. 층간소음의 문제로부터 시작한 상상력은 순식간에 아파트 거실의 테라스로까지 퍼져나갔다. 담뱃갑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지그재그로 올려 보았다(하루종일 흡연이 일상이던 때도 있었다). 서로 다른 매스가 겹치지 않는 어떤 부분이 매 층마다 생겨났다. 그곳으로 걸어 나오면 매 층마다 거실 앞으로 테라스가 생겨났다(그 시절 ‘레종’이라는 담배였는데 고양이 얼굴이 빼꼼 보이던 케이스가 지금도 생각난다).


하지만 지어질 땅이 없는 건축의 컨셉스케치는 자칫 만화 한편에 지나지 않는다. 땅이란 건축물의 수많은 제약조건인 동시에, 다른 땅에는 없는 그곳만의 유일한 매력을 반드시 갖고 있기 때문이다. 땅 위에서 그리는 스케치 한 장이, 상상력만으로 그리는 컨셉스케치 수백 장보다 어려운 이유다.
  

하나의 시행착오와 배움을 보내고


그즈음 동호인 주택의 설계를 의뢰받았다.

선후배로 구성된 6명의 건축주였다. 직업도 다르고 취미, 가족구성원 등 무엇보다 집을 대하는 태도가 서로 달랐다. 주택이 밀집한 과천 어디쯤에 2개 동의 다세대주택을 짓는 설계였다.


고민하지 않았다. 스케치를 꺼낼 타이밍이었다. 담뱃갑을 지그재그로 겹치지 않게 쌓아 올리며 이미 수백 번도 더 그림을 그려본 터였다. 책상 뒤 벽면에 붙여진 채 꼬깃해진 스케치가 이제 세상에 나올 수 있으니 이런 행운이라니.


매 층마다 서로 다른 주택을 설계해 주겠다고, 여러분의 서로 다른 요구를 모두 맞춰보겠다고 호기롭게 선언했다. 하지만 그 선언이 미친 짓이란 걸 아는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6*2=12명, 몇 번의 설계미팅은 12명의 건축주 모두의 서로 다른 요구조건을 받아 적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상상력만으로 만들어진 설계 컨셉은 수많은 미팅을 더해갈수록 갈려나가고 희미해졌다. 공사 완성도를 위한 시공 디테일까지는 갈 수도 없었다. 12명의 건축주도 나도 모두 지쳐가고 있었다.


결정적인 패인 중 하나는 공사비에 대한 사전 검토를 명확하게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의지가 앞선 탓이었다. 그들의 예산은 빠듯했고 어렵게 만들어진 설계 제안은 내역 검토를 하는 순간 결국 무너졌다. 1층부터 4층까지 서로 다른 평면으로 이루어졌으니 똑같이 올리는 여타의 빌라에 비해 공사비가 상승하는 건 당연했다. (당시 5% 미만의 상승분으로 기억하지만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 진행하는 것과 모르는 것은 차이가 크다)


결국은 두 개의 똑같은 단위세대를 각 동에 쌓아 올리는 것으로 프로젝트는 마무리되었던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테라스가 있는 다세대주택, 본편의 시작


이번 양평프로젝트는 분명 실패에서 나왔음에 틀림없다. 전편에서 이야기했듯이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 컨셉은 '수직형 테라스하우스'다. 일반적인 테라스 하우스는 사선형이다. 산등성이처럼 비스듬히 테라스가 계단식으로 위치하고 윗집에서 아랫집의 테라스를 내려다보는 구조다. 수직형 테라스는 아래 그림처럼 담뱃갑을 겹치지 않게 올려놓은 모양으로, 각 세대의 독립적인 면적을 보장하고 각 세대의 층간 소음도 구조적으로 해결한다.


양평 프로젝트 수직형 테라스 하우스 Mass Concept과 Section Concept (c)윤우영 건축사.

이제부터는 분양을 목적으로 하는 다세대주택의 건축관계자들, 그들 각각의 입장에서 이번 프로젝트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컨셉 스케치가 기어이 땅 위에 지어지는 도면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자 필요조건이다.


첫째, 땅을 사고 집을 짓고 파는 발주처(건축주)의 입장에서 정리해 보자.


금융권의 도움으로 토지를 매입했으니 사업의 시작부터 시간은 곧 돈이다. 하지만 그 신속한 사업전개보다 중요한 것은 분양성이다. 주변에 비슷비슷한 주택들이 널려있다. 이들의 분양가에 비해 더 나은 조건을 가져야 한다. 일반적으로 발주처는 이 부분을 ‘사업 용적률’을 높이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사업용적률이란, 발코니 등 법적 면적에 포함되지 않는 부분까지 계산한 용적률을 말한다. 등기부등본에 표시되는 용적률에는 이들이 포함되지 않으며 발코니, 테라스 등과 같은 면적은 서비스 면적이라고 부른다. 즉 ‘법적 용적률 + 서비스 면적 = 사업 용적률’로, 입주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상품가치가 된다.


그런데 다세대주택에 숨겨져 있는 면적, 그것도 테라스라니. 이 부분이 있다면 충분히 다른 주택에 비해 월등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간단하게는 "다른 주택에는 없는 테라스를 우리는 덤으로 드립니다"가 된다.


둘째, 시공자의 입장이다. 여기서는 문제가 조금 복잡해진다. 테라스가 생긴다는 것은 그만큼 외부에 접하는 부분이 많아지고(거의 모든 건축물의 하자는 여기서부터 기인한다), 접해보지 않은 새로운 시공방법을 익혀야 한다. 매 층마다 다른 평면이라면 설비, 마감 등 전문분야의 시공자들에게도 부담이다.


시공의 완성도는 항상 최종 작업자의 손끝에서 결정되기 마련인데 작업자의 교육이 별도로 필요한 부분이다. 공사비 상승 부분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발주단계의 준비가 여느 현장보다 치밀해야 한다. 다행히도, 여러 차례의 미팅 끝에, 시공자는 이 프로젝트의 경험이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하게 되었다.


셋째, 사용자 즉 입주자다. 이렇게 되면 분양받는 사람의 입장은 간단해진다. 도심을 벗어난 서울 근교, 관리지역의 주택을 매입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가격이다. 주변에 형성된 빌라의 분양가와 크게 차이 없는 주택이라면 선택의 고민도 그만큼 단순해진다. 현실이 그렇다. 그런데 같은 가격에 다른 곳에서 보지 못한 거실 앞의 테라스가 있다면 어떨까. 이미 비슷한 가격으로 빌라를 선택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일상을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만의 테라스가 그 역할을 할 테니까.
  

건축주와 시공자, 사용자의 시선에 서서


아파트와 단독주택 사이, 빌라를 바라보는 건축가의 시선은 바로 그곳에 있다. 아래는 각 층별 평면 컨셉 스케치다.


양평 프로젝트 수직형 테라스 하우스 설계도 (C)윤우영 건축사.



각 층마다 거실과 안방의 위치가 조금씩 어긋나게 배치되어 있다. 그곳에 테라스를 설계하는 제안이다.

2층과 3층의 평면을 들여다보면 거실은 좌우로 2미터가량 서로 다른 곳에 그려져 있고 안방은 위아래로 위치를 바꿔가며 그려져 있다. 벽식구조(기둥 없이 벽면이 힘을 받는 구조)의 주택에서 벽이 같은 자리에 없으니 구조기술사도 더 고민해야 하고 안방의 화장실도 같은 자리에 없으니 배관 덕트도 고민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테라스의 방수와 단열, 거실의 전력인입 등 고민해야 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도 이제 건축주, 시공자, 사용자의 입장을 모두 담은 설계가 비로소 시작 준비를 마쳤다.
  

한 방향을 바라보는 약속, 출발점에 다시 서서


양평 프로젝트는 현재 개발행위 허가(임야로 되어 있는 땅에 건축행위를 해도 좋다는 허가)를 득한 상태다. 본격적인 건축 설계를 눈앞에 두고 있다. 드디어 제대로 첫발을 디뎠다며 전투복 차림으로 현장을 오르던 건축주는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아파트와 단독주택의 중간, 그 지점의 매력을 다세대주택에서 찾을 것이다. 이 시도가 성공적으로 결론지어지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은 많다. 최대한 사전 제거해야 할 시행착오들도 수없이 많다. 갈 길은 멀다. 하지만 나는 오늘 301호의 거실 테라스에 앉아 있다. 맞은편 다동의 복층주택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다. 중앙 마당에는 아이들이 놀고 있다.


늦어도 다음 주는 그 여정의 출발을 알리는 깃발을 꽂고 첫 단추를 끼우기로 했다. 모두가 '한 방향'을 바라보고 성장하는 프로젝트, 그래서 성공하는 프로젝트로 가기 위한 첫 관문, 계약서다. 수없는 설계도면 변경과 시행착오, 그로 인한 공사기간의 연장과 결과물은, 모두 한 방향을 처음부터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전 글에서 고백한 대로 나는 이 첫 관문을 제대로 통과한 적이 없다. 계약서는 항상 일이 한참 시작된 후에야 형식적으로 체결되었고, 스스로 늘 어려운 위치에 놓이는 것을 자처해 왔다. 그러니 열정과 열심은 매우 다르게 해석되거나 이용되기 쉽기도 했다. 어려운 숙제, 그 땅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나는 좋았다. 그래서 좋은 건축물보다 수익보장을 원하는 건축주를 설득하기 위해, 비용을 더 받는 것도 아니면서,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참 많이 뛰어야 했다. 결과는 너덜너덜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서로를 존중하는 건축주와의 새로운 출발이기도 하다. 제대로 된 권한과 책임, 보상에 대한 약속 없이는 성공적인 프로젝트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다. 나에게 어쩌면 설계도면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지만 이제는 회피하지 않을 작정이다. 이 프로젝트를 끝까지 동반하기 위해 필요한 채비를 먼저 꼼꼼히 할 것이다. 독자들과, 팀과, 나 자신과의 약속이다.


지난 2022년 10월 11일에 발행했던 글, ‘나에게 건축은 무엇인가?'에서 묻고 답했던 글의 실천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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