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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Aug 09. 2020

월급쟁이, 부캐는 작가입니다


7월 21일 화요일.

마지막 제출한 공모전 결과가 발표되는 날.

업무 중에도 핸드폰을 만지락, 만지락.

하지만 기다리는 연락은 오지 않는다.

대신,


땡그랑! 하고

은행 문자가 통장 잔고의 변동을 알린다.

그래,

오늘은 월급날이지.


복직과 함께 1년 만에 받아본 월급.

전에는 그렇게 초라해 보였는데,

오늘은 어쩐지 공허함을 채워준다.


이번 달에는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주제넘은 미안함이 사족처럼 따라붙는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막연한 꿈 따위를 쫓아서였다. 죽기 전에 꼭 한 번쯤은 해보고 싶은 일들의 목록을 뜻하는 '버킷 리스트'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던, 그 말조차 처음엔 '리스크'로 잘못 볼 정도로 회사일에 시달려온 어느 시절이다. 이렇게 힘들게 일을 하는데 과연 무얼 쫓고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손가락 다섯 개는커녕 한 개를 접기 조차 쉽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공허한 직장 생활의 연속, 나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고 어디 마땅히 물어볼 곳조차 없었다. 뭐라도 생각해내자 쥐어짜 보자. 후보는 두 개로 압축되었다.


하나는 전 세계 모든 내륙에 있는 나라들을 하나쯤은 여행해 보자는 생각이었고, 그중 한 번은 반드시 딸아이와 단 둘이서 떠나는 여행으로 계획해 보자는 것이었다. 세계 지도를 펼쳐 놓고는 언제쯤, 어디로 가는 게 좋을지 상상하고는 아내에게 "우리 딸이랑 나랑 둘이,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들어가기 전 유럽 여행을 가보면 재밌지 않을까?"라고 물었다. 아내는 "그래. 둘이 가면 좋지. 나도 혼자 좀 쉬자."라고 싱거운 동의를 해주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캄캄한 암실에 좁쌀만 한 구멍 하나를 뚫어 놓은 듯, 나를 둘러싼 세상이 선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친김에 하나 더, 작가라는 이름이다. 아마추어스런 교내 문집의 한 페이지가 아닌, 백날 써봐야 누군가의 의사 결정에 짤막하게 소비되고는 버려지는 회사 보고서가 아닌, 책 표지를 넘기면 보란 듯이 내 약력이 소개되고는 한 권을 꽉 채울 글들의 목차가 이어지는 그런 책 말이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겠다는 거창한 꿈은 아니었다. 그저 나에겐 내 이름이 지은이로 기재된 책 한 권이 세상에 나온다면 고급 외제차보다, 명품 시계보다 더 큰 만족을 줄줄 알았다.


작가. 이 작가.


몇 년 묵혀온 꿈을 실행에 옮길 기회가 온 것은 우연히, 혹은 운명처럼 찾아온 휴직 기회에서 비롯되었다. 여전히 회사일은 지루하고 지치는 일들의 연속이었지만 생계라는 명분 하에 15년이라는 긴 세월 쉽게 끊어낼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월급은 딱 나를 이 회사에 잡아둘 수 있을 정도로만 교묘하게 계산되었기 때문이다. 마약 같은 월급이라나, 해본 적 없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그 중독성을 알 법도 하다. 하지만 이제 가족들 돌본다는 좋은 명분이 생겼을 때, 글을 쓰며 이제라도 나다움을 찾아갈 수 있으리란 기대감이 부풀어 오를 때, 지금이다. 막연함으로 돌진해 본 첫 경험이었다.






나의 색깔을 찾는 글을 써나가고 싶은,

마흔 살의 휴직 직장인입니다.


작가들이 모여있는 공간에 제안을 했고,

덜컥 답장이 날아왔다.


작가가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아직 쓴 게 없는데,

그래도 고마웠다.


심호흡 크게 하고 한 발을 번쩍 들었지만,

어라?

닿지 않는다.

분명 저 어디 즈음인 것 같은데.






같은 맥락이었다. 꾸역꾸역 글을 쓰고는 출간 제의를 하는 대신 플랫폼을 이용한 것도, 자꾸만 떨어지는 공모전에 줄기차게 응모한 것도, 알림을 꺼놨지만 간간히 확인해본 반응에 기분 좋아한 것도, 한 차례 출간 제의를 받고도 노력 끝에 찾아올 무관심이 두려워 정중히 거절한 것도, 그러다가 후회한 것도,


그에 앞서 회사에 입사한 것도, 몇 차례 결정적인 고비를 맞았음에도 쉽게 관두지 못한 것도, 1년 만에 돌아온 지긋지긋했던 회사에서 다시 만난 사람들이 너무나도 반가웠던 것도, 개중에는 나를 고깝게 보는 선배나 옆 부서 직원들까지 포함해 빼곡하게 식사 약속을 잡아가는 것도, 간만에 불이난 단톡방에 일일이 답하느라 똑같은 얘기를 하고 또 하지만 지치지는 않는 것도, 오랜만에 들어온 월급 계좌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 것도, 그것에 만족하고 만 것도 다 같은 맥락이었다.


거절당할까 봐 묻지 못하고, 잃게 될까 봐 얻기를 꺼려한 비자발적 무욕의 경지는 구두 밑창에 달라붙은 껌딱지마냥 나의 걸음을 끈적하게 만들어 버린다. 돌고 돌아 눈을 떠보니 제자리, 하지만 사람들이 웃는다. 다시 일할 시간이라고. 월급이 들어왔다. 전에는 숨이 턱 막혔는데, 이제는 숨통이 확 트인다.


처음으로 용기 내어 도전해 본 작가라는 이름. 생각만큼 결과가 좋지는 못해도, 괜찮다 위로해도 괜찮지 않음을 너무 잘 알지만, 상관없다. 면역이 생기진 않아도, 아주 작게나마 내성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처에 바르는 연고마냥 내 피부에 스며드는 "땡그랑!" 문자 한 통. 발목을 잡고 있는 줄만 알았검만, 사실은 내 가냘픈 발목을 지탱해주던 월급은 한동안 들어올 예정이고, 버티는 힘이 되어, 움츠렸던 부캐가 다시금 재기할 수 있도록 물밑에서 떠받들어 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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