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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Oct 04. 2017

나홀로 6일 울릉도 여행 - Day 3

울릉도에서의 조난

또 문어다.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소리에 잠에서 깬다. 또 문어를 잡았단다. 여기는 통발을 담그기만 하면 그냥 문어가 올라오나보다. 3일째 연달아 문어라니, 이거 쉬운건가?

어제 늦게 자서 낮잠을 자고 싶지만 이미 눈을 뜬데다 문어도 궁금해서 거실로 나와본다. 문어는 이미 손질이 끝나 있다. 이번에는 남편 혼자 두고 온 여인이 손질을 배우겠다고 주방에 들어가 있다. 그거 내가 어제 봐서 아는데 본다고 따라할 수 있는게 아닐텐데… 어디 한번 해보그라.


원래 작은 경훈이 일행이 떠나면 통발을 내가 인수하려고 했는데 이놈들 며칠째 가지를 못하고 있다. 내일도 배가 못 뜬다는 것 같던데… 이러다가 결국 나와 같이 울릉도를 떠날 기세다. 그런데 왠지 못 떠나서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문어는 가볍게 대치고 저녁에 전을 해먹자고 쟁여놓는다. 국물로는 라면을 끓여서 아침으로 먹는다. 냥꼬네에서는 기본적으로 토스트를 아침으로 제공하는데 한번도 못 먹고 있다. 맨날 문어를 잡으니 다 같이 라면을 끓여먹게 된다.

라면을 먹으며 오늘 저녁은 뭐해먹을지 자연스럽게 고민이 시작된다. 언제부터인가 저녁은 같이 해먹는 것이 기본이 되어 버렸다. 얘기를 하다 보니 판이 갈수록 커진다. 내일 추석을 기념하여 오늘은 결국 3가지 메뉴로 정한다. 문어파전, 삼색전 그리고 돼지수육을 하기로 한다. 이거 이러다 내일은 신선로 해먹는거 아닌가 모르겠다. 수육은 내가 콜라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제안했다는 얘기는 결국 내가 해야 한다는 말이겠지. 가장 어려운 삼색전은 강과장이 한다고 하니 수육쯤이야 해야지.


말 나온 김에 울릉도에서 가장 큰 도동으로 간 사장님에게 작은 경훈이가 전화를 한다. 우리가 호박 막걸리를 너무 마셔대는 바람에 빨리 동나버려서 막걸리를 리필하려고 사장님은 도동으로 갔다. 돼지고기를 부탁하더니 지금 바로 다 해결한다며 일행들과 함께 하나로마트로 간다. 작은 경훈이 역시 이름답게 실행력 하나는 죽여준다.


나는 잠시 누워서 오늘 뭐할지 고민을 해본다. 바깥 바람이 예사롭지 않아서 관음도까지 걸어가기로 한 다짐이 살짝 무너지려고 한다. 그렇다고 멀리 나가기도 귀찮고… 일단 좀 쉬다가 점심 먹으러 천부까지 걸어가볼까 한다. 날 좋으면 관음도까지도 그냥 걸어가버리지 뭐.


돼지고기까지 운 좋게 하나로마트에서 득템한 작은 경훈이 일행들은 득이양양한 표정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강과장, 오늘따라 샬랄라한 원피스를 입고 나왔기에 예쁘다고 엄지 척 칭찬을 해줬는데 잠시 나갔다 오더니 결국 등산복으로 갈아입는다. 그래 오늘 원피스 입고 나갔다가는 무슨 불상사가 생길지 모르지. 그렇게 시끄럽게 한바탕 소동이 있더니 떠난다.


남편 두고 온 홀로 여행자는 근처에 멍 때리기 좋은 장소를 찾았다며 기분 좋게 떠난다. 사장님 내외도 아직 안돌아오셔서 결국 게스트하우스에 나 혼자다. 어제 커플은 따개비 알러지가 있다며 오늘 다른 곳으로 떠났고, 외국인 커플은 아침 일찍 어딘가로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나도 슬슬 나가볼까?


때마침 사장님이 돌아오셔서 바톤터치하며 울릉도의 바닷길로 나간다. 나서자마자 매서운 바람이 강하게 나의 의지에 태클을 걸지만 이 정도에 좌절하면 내가 아니지. 내가 가는 길은 어렵기에 의미가 있는 법! 남자의 길을 가리라!

허세 가득한 마음으로 길을 나서지만 진짜 바람이 생각보다 장난아니다. 해안가에 부딪친 파도가 찻길까지 들이칠 정도다. 그럼에도 이 길을 홀로 걷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도 양말은 신을걸 그랬나? 역시 이번 여행도 크룩스 하나에 의존하고 있는데 바람이 매서우니 발이 좀 시려온다.

버스를 타고 갈때는 순간적으로 지나갔던 풍경들이 천천히 걸어가니 한층 더 깊게 들어온다. 목적지를 갈때는 빠르게 가는게 편하지만 그 길 자체가 목적일 때는 가능한 천천히 가는 것이 좋다. 필요에 따라 빠른 것, 편리한 것 보다 느리고 불편한게 더 의미가 있을때도 있다. 순간순간을 느끼고 즐겨야 하는 여행은 특히나 그렇다.

아 저 바위가 코끼리 바위구나.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형상이라 그렇다네. 송곳 바위라는 곳도 있네. 울릉도에도 전시를 대비해서 진지를 만들어놨구나. 낙석위험이라더니 진짜 돌이 떨어진 흔적도 있군. 위험하겠어. 돌마다 전설이 다 있군. 아무리 그래도 할아버지에 대한 전설은 인간적으로 너무 성의없다.

아무것도 없는 길을 위험할까봐 음악도 듣지 않고 걷고 있지만 심심하지 않다. 사방이 다 의미다. 여행은 큰걸 보는게 아니라 작은 것을 보는거이기도 하다. 이렇게 걷고 있으니 비로서 울릉도에서 나의 여행을 하는 느낌이다. 아예 울릉도 한바퀴를 돌아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이 빌어먹을 바람은 좀 멈추면 안될까.

가끔 좋은 스팟에서는 허세 작렬한 사진도 찍고 인스타에도 올린다. 부모님에게도 생존 신고를 하고 친구들과도 대화를 나누며 걷는다. 홀로 걷지만 혼자가 아니다.

한시간 좀 넘게 걸으니 멀리 천부가 보이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걸을만했다. 여기서 배를 채우고 관음도까지 이 기세로 걸어가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어차피 오늘은 다른 일정도 없다. 아직은 쓸만한 다리가 있음에 새삼스레 감사해한다.


처음 나타나는 식당에 무작정 들어가본다. 나는 무작위의 힘을 믿는다. 인연을 믿고 예고 없는 놀라움을 원한다. 여행에도 스포가 있다고 믿기에 오늘 가는 관음도는 사진마저도 일부러 피해서 안봤다. 식당도 마찬가지다. 맛집을 찾아가면 실패하지 않을 것 같지만 오히려 내 경험상 아무런 생각 없이 끌려서 들어간 식당이 성공한 경우가 더 많다. 모두의 맛집이 아닌 나만의 맛집이기 때문이다.


울릉도에는 이름만 들어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꽁치물회라는 것이 있다. 이걸 먹으려고 마음 먹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오징어물회를 시키기에 나도 그냥 따라서 시켜본다. 키보드를 펴고 밀린 글을 쓰면서 식사를 기다린다.


애피타이저로 나온 나물반찬을 먼저 한번 먹어본다. 아, 역시 울릉도의 맛은 나물에 담겨 있는 것이 확실하다. 이 섬에 와서 나물을 먹고 맛이 없다 여긴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가지무침을 내가 더 달라고 할 줄이야. 반찬이 맛있으니 메인 요리에 대한 기대도 커진다.

오징어 물회가 곧 나왔는데 물이 없다. 왜 물회지? 사장님이 내가 답답했는지 그릇을 가져가더니 열심히 이리저리 비벼주신다. 그러더니 물을 넣는다. 뭔가 이 음식을 먹는 방법인가보다. 자 이제 먹어볼까?

울릉도 와서 처음으로 별 5개를 준다. 맛있다고 연신 감탄사를 내며 그릇을 들어 한방울 남김 없이 싹 비운다. 사장님이 그런 나를 보더니 꽁치물회가 더 맛있다고 자부심을 담아 얘기해주신다. 오케이, 내일은 다시 꽁치물회를 먹으러 오겠어.


자 이제 배를 채웠으니 또 다시 움직여볼까나. 연료를 채우니 확실히 힘이 다시 돌아온다. 그런데 관음도가 어느 방향이지? 일단 지도를 한번 본다. 그리고 출발하기 전에 양말을 신어준다. 나라는 남자, 그래도 한번 겪으면 개선은 해준다.

여기서부터 한 5키로라고 한다. 평소 내가 조깅하는 속도로 가면 30분이면 충분히 가겠지만 천천히 유유자적하면서 가면 그래도 한시간은 넘게 걸릴거다. 아직 시간도 이르니 천천히 가보자.

울릉도의 아름다움은 거칠고 험하다. 바다에서 불쑥 불쑥 솟아 있는 돌기둥과 이 기둥들에 쉴틈 없이 부딪치는 파도의 험한 함성이 이곳의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제주도의 아기자기함도 좋지만 이곳의 이 거친 아름다움도 매력이 넘쳐 흐른다. 이 섬에 곧 공항이 들어설 수도 있다는데 그렇다면 여기도 제주도 못지 않은 휴양지로서 이름을 날릴법하다.


냥꼬네 사장님에게 듣기로 여기는 땅을 사고 싶어도 사기 힘들다고 한다. 원래 섬이 가지고 있는 배타성도 있지만 여기도 제주도 못지 않게 땅값이 오르면서 투자 목적으로도 다 지니고 있다고 한다. 역시 사람들 돈냄새 하나는 기똥차게도 잘 맡는다.

울릉도가 더 개발된다면 해안길에 올레길 같이 걷는 길을 만드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지금 나는 걷고는 있지만 이 길은 도보를 위한 길은 아니다. 가끔은 차도 양쪽으로 못 다닐만큼 좁은 곳들이 나타나니 걷는 사람에게는 더 안좋다. 그럼에도 이 길은 걸을만하다. 누가 나한테 울릉도에서 하나를 추천하라고 하면 이 길을 홀로 걷는 것을 추천하리라.


이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 웅장한 매력에 계속 홀로 "우와"라는 감탄사를 뱉어내지만 직접 와보지 않은 사람에게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도 없는 길에서 바다를 보며 함성도 질러보고 길을 걸으며 노래도 크게 부르면서 천천히 한걸음씩 앞으로 내딛는다.

오늘은 특히나 바다가 무척 화나 보인다. 성난 파도는 해안을 두드리는 거에 만족하지 못하고 차길까지 엄습한다. 옷 달랑 2개 있는데 젖지 않게 조심해야겠다. 내일이나 모레 이틀 중에 하루는 독도를 가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런 날씨가 지속되면 가능할까? 이런 날씨에는 해변에서 수영하는 것은 꿈도 못 꾸겠다. 조금 안전하게 해놓으면 요즘 한창 인기 있는 서핑의 명소로는 날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힘들긴 하지만 한걸음 한걸음 즐기다 보니 저 멀리 관음도가 드디어 보이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2시간은 걸었다. 이제 관음도를 한바퀴 둘러보고 돌아갈때는 버스를 타야겠다.

관음도로 들어가기 전에 그 앞에 카페가 하나 보이기에 들어선다. 바람이 차긴 하지만 호박 식혜를 하나 주문해서 마당에 나와서 앉는다. 관음도를 배경 삼아 이렇게 앉아 있으니 이 추운 와중에도 마음의 여유가 느껴진다.


나도 많은 여행을 하긴 했지만 이번 울릉도 여행은 뭔가 새롭다. 게스트하우스 하나에 자리 잡고 이렇게 오래 있는 것도 처음이고 그곳을 집 같이 삼고 다니는 것도 처음이다. 거기다 울릉도가 주는 묘한 매력까지 더해져 이번 여행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지 싶다. 나중에 여자친구랑 다시 한번 오고 싶지만 올 수 있을까? 모든 여행지에서는 다시 오기로 마음 먹지만 실제로 가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기약이 아니라 지금을 더 즐기는 마음가짐이다. 아직 반도 채 가지 않은 이번 여행, 마지막까지 원없이 즐기고 가리라.

이 추운 날 밖에서 차가운 식혜를 혼자 먹고 있는게 안쓰러워 보였는지 사장님이 뜨거운 차를 한잔 타서 갔다주신다. 날씨 좋은 날은 여기 앉아서 책 보며 멍 때리기 딱 좋아보인다. 오늘 점심 먹은 곳도 다시 가봐야 하고, 여기도 한번은 더 오지 싶다. 짧은 여행이지만 그 안에서 단골을 만들때 그 여행은 더 의미를 갖는 법이다.


멍 때리기, 다르게 말하면 아무것도 안하기, 난 이런 시간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사람을 살다보면 여러 상황에서 알게 모르게 많은 것들을 보고 깨닫고 저장하기 마련이다. IT용어이지만 데이터와 정보는 구분된다. 데이타는 그저 여러 경험의 나열이라고 하면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 이를 정리한 것이 정보다. 우리는 데이타는 수없이 우리 안에 쌓아두지만 막상 이걸 정보로 만들지 못한다. 그 데이타를 정보로 만드는 시간이 난 멍 때리는 시간들이라고 믿는다. 생각을 하려면 그 동안은 다른 데이타가 들어오지 못해야 한다. 멍 때린다는 것은 데이타의 인입을 막고 이를 정보화 시키는 시간인 셈이다. 아 누가 공대 출신 아니랄까봐 설명이 이렇게 밖에 안되네.

차를 다 마시고 이제는 조금 지친 몸을 끌고 다시 한번 걸음을 내딛어 본다. 멀리서 보이는 모습에 살짝 들뜬 마음도 든다.




"와… 좋다…"


4천원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긴 다리를 건너 관음도를 돌다 보니 자꾸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저 말이 나온다. 사실 당연한 얘기지만 관음도에서는 관음도를 볼 수는 없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다른 주변의 섬과 바다의 전경이다. 무심하게 툭툭 튀어오른 울릉도의 봉들과 살짝 내려가는 구름에 가려진 해가 절경을 만들어낸다. 울릉도 이렇게도 아름다운 곳이었다니. 사람들이 울릉도에 한번 오면 모두 매니아가 되는 이유를 알겠다.

섬 둘레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찬찬히 돌아본다. 주변의 경관도 좋지만 길 자체도 풀들과 어우러져 편안한 느낌을 준다. 울릉도에서 3일 지내면서 느낀 점은 울릉도는 자연을 해치지 않으면서 인간과 공존하려는 노력이 보인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많아지면 이런 노력도 쉽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지금처럼 오기 힘들어서 이 자연스러움을 유지했으면 하지만 그건 또 어려운 일이겠지.

햇살 잘 드는 벤치를 하나 잡고 앉아서 키보드를 펴고 잠시 멍을 때려본다. 여기서 잠시 머물러야겠다. 여기 진짜 좋은데?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있는지 왜 지금까지 몰랐지?

앉아 있으니 사람들이 계속 들어와서 기념 사진을 계속해서 찍는다. 사람 구경을 하다가 헤드폰을 꺼내서 머리에 쓰고 '어바웃타임 OST'를 튼다. 외부와 격리되면서 나만 이곳에서 다른 공간에 있는 느낌이 든다. 나만 슬로우모션인 기분이다. 번잡함 속에 이런 여유가 좋다. 어지러움 속에 이런 평온함이 좋다. 이곳에 앉아서 지금을 즐길 줄 아는 내가 좋다.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남을 좋아할 수 없으며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남이 자기를 좋아하길 바라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사람은 모두 사랑 받을 가치가 있으며 그 어떤 사람의 삶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영화와 같은 스토리가 있다. 이곳에서 헤드폰 하나 끼고 음악을 틀으니 내 삶 또한 BGM이 가미된 영화의 한 장면이 된다. 이 순간을 즐기자.

5시 반이 되어서 일어난다. 6시에 마감을 하기도 하고, 이제 가서 저녁 준비도 해야 한다. 오늘은 수육을 해야 하니 지금 가면 딱이다. 내려가는 길에는 첼로 선율의 'Spiegel im spiegel'을 선곡하고 다시 한번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 이 음악을 들으면 지금 이 순간이 마치 엔딩 장면 같이 느껴지는 마법이 생긴다.

버스는 어디서 타야 하지? 그런데 저 긴 줄은 뭘까? 조용히 가서 일단 줄을 서서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이게 전부 버스를 타는 사람이다. 지금 이틀째 배가 못 나가고 있어서 980명이 울릉도에 갇혀 있다고 한다. 현재 울릉도는 육지에서 보급도 안되서 식재료도 품귀 현상이 오고 있다. 그건 그거고, 나 나갈 수 있는걸까? 그 길을 다시 걸어간다는건 나에게도 너무 힘든 일인데.


다행히 기사님이 앞으로 나서더니 어떻게든 다 태워준다고 장담하신다. 아마 여러번 반복해야 해서 시간은 걸리겠지만 그래도 나갈 수만 있으면야 뭔 상관이랴. 애들에게 얘기를 하니 얘네 이미 전도 다 부쳐놓았단다. 내가 갈때까지 그 전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단다. 작은 경훈이 그렇게 안봤는데 이리도 의리가 없다니… 강과장도 어찌 나에게 이럴 수가… 오늘 차장 진급 시키려고 했는데 진급 물 건너갔다 이것들아. 말만 그리 하고 남겨놓겠지? 아 생각하니 갑자기 배고파지네.


버스가 한대 나가지만 나는 당연히 못 탄다. 일단 그냥 바닥에 주저앉아서 글이나 쓴다. 어차피 서두른다고 해서 바뀔 것도 없고 이 시간도 지나고 보면 결국 다 추억일테다.


여기에 앉아서 사람 구경을 하니 은근히 많은 정보가 들어온다. 지금 배가 이틀째 못 뜨면서 이 섬에 약 960명이 갇혀 있다고 한다. 내일은 배가 뜰 가능성이 크다고 하긴 하는데 이미 밀린 사람들이 많아서 독도 가는 배도 육지 가는 것으로 돌렸다는 얘기도 있다. 울릉도는 파도가 심해서인지 이런 경우가 가끔 있다. 사장님에게 듣기로 예전에 일주일 동안 배가 안뜬 적도 있는데 그때는 라면도 동이 나고 초코파이를 마트에서 박스 단위가 아닌 개별 단위로 판매까지 했다고 하니 알만하다. 그래서 울릉도 주민들은 냉동고가 원래 크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전쟁이 나도 가장 안전한 곳 중 하나가 이곳이 아닐까 싶다.


그나저나 날은 어두워지고 바람도 차가워지기 시작하는데 버스가 돌아올 기미가 안보인다. 게다가 이곳에는 현지인은 없고 관광객만 수두룩하게 있다. 슬슬 웅성거리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불안해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여행지에서의 이런 에피소드도 추억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다. 나도 뭐 정 안되면 또 두시간 걸어가지 싶어서 그냥 편하게 지켜보고 있다.


한 삼십 분 쯤 지났나? 완전 어두워진 항구에서 저 멀리 차의 불빛이 보인다. 한 여성분이 보더니 소리지른다.


"차가 와요~ 여러분 차고 옵니다!"


다들 박수를 치며 이제 됐다며 화기애애하게 웃는다. 이제 떠날려나? 하지만 이쪽을 향하던 차는 오기 전 갈래길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핸들을 튼다. 아니 여기 오는 길에 이곳 말고 다른 곳도 없을텐데 어디를 가는걸까.


이제 슬슬 사람들의 텐션이 올라가는 것이 느껴진다. 급기야 경찰서에 전화를 하기 시작한다. 옆에서 듣자하니 경찰서에 얘기해서 항의를 하는데 경찰도 지금 울릉도 전역이 이런 상황이라고 그냥 기다리라고만 얘기를 하고 있다. 추석 연휴라 인파가 몰렸고 배가 못 나가면서 이런 상황까지 온 듯 하다.


갑자기 줄 서 있는 내 앞으로 한 남자가 급하게 오더니 자기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을 획 낚아채서 옆으로 달려간다. 뭐지? 봤더니 한 차가 언제인지 모르게 와서 대기하고 있다. 아마 도민 중 누군가와 협상을 했나보다. 그걸 보더니 사람들이 다들 달려들어서 협상을 시도한다.


그러다 한 분이 얘기한다.


"임산부와 애기 먼저 보냅시다!"


아 진짜 재난 영화 수준이다. 그래도 시민의식 투철한 관광객들이다. 결국 진짜 임산부(!)와 남편 2인을 태우고 차는 떠난다. 그리고 우린 다시 어둠에 갇힌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사람이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 인간의 근본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된다. 예전에 신입사원 시절 레프팅을 갔다가 강사의 미숙함으로 한 바위 위에 실제로 조난 당한 적이 있다. 급류가 좀 심해서 뛰어내리기도 힘든 상황. 이 상황에서 헬기를 부르라며 노발대발 하고 결국 강사를 맨몸으로 급류에 뛰어들게 한 임원을 나는 그 회사 나올때까지 한번도 존중해주지 못했다.


하긴 나도 내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 되면 어찌 될까? 과연 내 목숨을 담보로 하는 상황에서도 이렇게 초연할 수 있을까? 자신없다. 그러하기에 나는 가능하면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상황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 이 상황도 사실 조금 춥고 힘들 뿐이지 생명과는 상관 없는 상황이다. 이 정도는 사실 완전 초연할 수 있을 만큼의 경험은 있다.

40분 정도가 지났을까? 이번에는 진짜 우리를 태우고 갈 그 소형 버스가 멀리서 보이기 시작한다. 다들 이제 살았다는 표정으로 언제 불안했냐는 표정으로 버스를 반긴다. 그래도 걸어서 나갈 필요는 없게 되어서 다행이다.


버스 기사가 오더니 큰 목소리로 외친다.


"이제 이게 진짜 마지막 버스에요. 모두 다! 타셔야 합니다."

여기 한 40명 있는데 이 작은 버스에 탈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또 인간의 협동심이 나오는 법. 서로 자리를 양보해가며 간신히 모두를 태운다. 마지막으로 누가 안남았는지까지 다 확인 후 정원의 두배 이상을 태운 버스는 천부로 천천히 향한다.


밤길에 버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바다가 꽤나 무섭다. 내가 이 길을 걸어왔단 말인가. 바다는 어떨때 보면 참 어머니의 마음 같이 느껴지면서 어떨때는 화난 군중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런 여러 모습이 또 바다의 매력이 아닐까.

천부에 오면 또 다를까 싶었는데 여기는 더하다. 백명 정도 되는 인파가 또 줄을 서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하 이번에는 진짜 답이 안나온다. 긴줄을 멍하니 보며 이제 진짜 걸어가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냥꼬네!"


내가 잘못 들었나? 누가 냥꼬네라고 부르는 의심스러운 부름에 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소녀 2명이 있다. 누구지? 자세히 보니 어제 왔던 그 신입사원 2명이다. 이야 여기서 만나니 또 완전 반갑다. 걸어가든 뭘하든 이제 그래도 외롭지는 않겠다.


라고 생각한건 내 착각이었다. 이 처자들은 줄에서 꽤나 앞이라 다음 버스를 타고 간다며 나를 불쌍한 눈으로 쳐다본다. 울릉도에서의 의리는 다 어디 갔다냐. 어제 밤 마신 의리의 술은 다 소화되서 배출되었더냐. 그래도 걷기는 싫어서 일단 도와달라고 하고 셋이 같이 불쌍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는다.


카톡방에 사진을 보내고 사장님의 선처를 기다려본다. 그래도 3명이나 있는데 와주시지 않을까? 조금 기다리니 작은 경훈이가 사장님이 가신다며 기다리고 있으라는 희망의 메세지를 보낸다.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일이 잘 풀린다.


천부는 현포와는 그다지 멀지 않아서 조금 기다리니 저 멀리서 사장님의 반가운 차가 보인다. 차가 긴 줄 앞에서 멈추자 갑자기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이걸 그대로 갈 수는 없지. 차를 타기 전에 한번 거만하게 사람들을 스윽 바라봐준다. 박지성이 일본에서 했던 조깅 세레모니가 이런 기분일까. 갑자기 우리 냥꼬네는 이정도입니다!라고 얘기를 하고 타고 싶어지지만 참는다. 냥꼬네부심 잔뜩 돋는다.

숙소에 돌아오니 다들 피난민을 반기듯이 소란스럽게 맞이해준다. 진짜 집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이런 여행 중에도 나를 맞이해주는 장소와 사람이 있다는 것은 굉장히 따뜻한 기분이다. 이번 여행은 그래도 잘 하고 있나보다.

씻고 나오니 이미 잔치상이 다 차려져 있다. 강과장이 진짜로 만든 삼색전과 작은 경훈이가 내가 늦는 바람에 만들었다는 수육, 남편 놔두고 온 여인이 사왔다는 울릉도 나물(이름이 뭐였더라…)까지, 한상 푸짐하다. 추석을 이곳에서, 새로운 가족들과 함께 한다.


오늘 새롭게 받아온 호박 막걸리도 다 든든하게 따라준다. 이 막걸리 정말 숙취가 없다. 모두 마법의 막걸리라며 극찬을 한다. 오늘은 특히나 다들 고생을 해서인지 얘기거리가 풍부하다. 고생한 여행은 그 자체도 하나의 좋은 추억이자 이야기거리이다. 사장님도 오늘은 잔을 들고 합류하신다. 사장님도 이런 적은 자기가 울릉도 와서 처음 겪는다며 같이 수다에 참여하신다.

오늘은 다들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는다. 사실 처음에 서로 알아가는 과정에서 알콜이 필요할뿐, 이제 3일째 같이 지내다 보니 가벼운 차 한잔으로도 대화를 할 수 있을 관계가 되었다. 내일은 배가 뜰까? 배가 뜨면 일단 작은 경훈이네 삼총사가 떠나게 되서 빈자리가 꽤나 크게 느껴질 것 같아서 아쉽기도 하다. 그래도 갈 사람은 가야지. 여기서 살 수는 없잖아.


오늘은 적당히 12시쯤 되서 정리를 하고 잠자리에 일찍 들어간다. 총 6일간의 여행 중 3일이 이제 지났다. 아마도 내일은 사람들도 많이 바뀐 새로운 모험이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아쉬움 반, 기대반으로 한껏 무거워진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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