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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제 Apr 29. 2016

홀로 여행을 떠나는 이유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100가지도 넘지만 홀로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일 것이다. 혼자 여행을 떠나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결심하는 것은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후쿠오카로 여행을 떠나려고 결심했을 때, 나는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 성격과 맞지 않는 일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는 업무년차와 비례하여 심해져갔고 퇴근하고 나면 아무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연소되어있었다. 여행지를 선택하는 기준은 간단했다. 비행시간이 5시간을 넘지 않을 것과 조용하게 휴식이 가능할 것, 그리고 어느 정도는 현지 사람들과 대화가 통할 것이라는 단 세 가지 기준이었다. 이 기준에 맞는 곳은 일본이었고 온천이 있는 료칸에 가보고 싶었던 나는 후쿠오카로 가는 티켓을 끊었다. 


입국 심사를 하던 도중 나는 내가 왜 그렇게 떠나고 싶었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말'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일을 하면서 상대하는 사람들과 서로 속고 속이고 불만 가득한 목소리의 클레임들을 처리하면서 나는 상처받고 있었다. NGO 단체에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가는 일을 꿈꿔왔던 나는 지금 어느 누구에게도 행복을 주지 않는 일을 하며 살고 있었다. 내가 집에 돌아와 나를 걱정하는 가족에게 날 선 태도를 보여왔던 것도 내가 이런 말들에 너무 지쳐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입국 심사의 긴 줄에서 사람들에 밀려가듯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나는 그 모습이 굽이질러 가로 된 강물 속 자갈들이 부딪히며 수많은 소리들을 뱉어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소리들은 긴 대기시간에 대한 짜증이었고 다른 사람의 옷차림에 대한 비난 이었으며 한국 사회와 본인들의 생활에 대한 불만들이었다. 귀를 막고 싶었지만 내 휴대폰 속에는 음악이 없었다. 


유후인에 도착하니 가슴이 탁 트인 기분이 들었다. 말로부터 해방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일본 사람들의 말들은 마치 노랫소리처럼 주변을 온화하게 감싸고 있었고 시원한 바람소리와 졸졸졸 흐르는 강물의 소리는 내 귀를 깨끗하게 씻어주는 것 같았다. 잠시 개천가에 홀로 앉아 많은 생각을 하였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 그리고 내 인생에 대해 누구의 방해도 없이 혼자 생각해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나서 다시 역으로 돌아와 자전거를 빌렸다. 허름해 보였지만 관리가 잘 된 자전거는 무리하게 힘을 주지 않아도 안정적인 속도로 골목을 달렸다.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본 것도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와 집을 반복하는 일상에서 보이는 풍경은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모습뿐이거나 핸드폰 화면 밖에 없었다. 목적지도 해야 할 일도 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그저 순간순간 느끼는 모든 것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던 그때의 나는 어디로 갔을까?


여행을 한다는 것은 완전히 말 그대로 사는 것이다. 현재를 위해 과거와 미래를 잊는 것이다. 그것은 가슴을 열어 숨을 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즐기는 것이다 -알렉상드르 뒤마-


다음날 오전부터 온천을 즐기고 료칸을 나섰다. 아무런 계획이 없이 왔지만 유일하게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샤갈 미술관으로 향했다. 다음 숙소로 가는 버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발길을 서둘렀다. 일본의 시골길은 한 명이 걸어가기에도 좁은 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 발짝만 옆으로 가도 찻길이라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리저리 사람들을 피해 추월하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걸까? 도심의 속도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이 곳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었다. 사실 서두를 이유는 별 것 아니었다. 버스 시간을 미루기로 하고 천천히 걸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자를 쓴 귀여운 신호등 표시와 길가에 수많은 꽃들,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샤갈 미술관은 생각보다 많이 작았다. 몇 평 되지 않은 투룸에 샤갈의 작품이 30~40점 정도만 있을 뿐이었다. 서커스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 몇몇 작품들이 내 눈길을 끌었다. 샤갈은 러시아에서 태어나 러시아의 토속 신앙적인 요소가 그림에 많이 녹아있다고 한다. 초현실주의적인 샤갈의 작품들을 보고 있으니 그가 그린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어쩐지 부처의 얼굴이 떠올랐다. 종교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인종과 국가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어떠한 공통분모가 있는 것 같았다. 


샤갈 미술관에 다녀온 후, 후쿠오카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비가 주척주척 내리기 시작했다. 비 오는 버스 창밖으로 비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외국인들이 많이 가는 관광지가 아니라 일본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그 날의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현지인들이 찾는 공간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고, 인터넷을 검색해 호텔 근처에 있는 한 라이브클럽을 찾게 되었다. 



이곳에 한국인이 찾아온 것, 아니 외국인이 온 것은 정말 오래간만이라고 하였다. 비 오는 날 혼자 이곳에 찾아온 내가 신기했는지 직원 두 명이 바 앞에 앉은 나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무슨 일로 일본에 왔는지 이곳은 어떻게 알고 왔는지를 물어보았고 나는 짧은 일본어로 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한눈에 보기에도 나이가 많지 않아 보이는 그 직원들은 밴드를 하고 있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일본도 경기가 좋지 않아 많은 젊은이들이 꿈을 포기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들 또한 유명한 밴드가 되는 건 이미 포기했지만 그저 하루하루 즐겁게 지내고 싶다고 말했다. 


다음날 나는 바다가 보고 싶어 모모치 해변으로 향했다. 해변 근처의 식당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길게 이어진 산책로를 걷다 해변 끝 방파제에 홀로 앉아있는 한 여성을 보게 되었다. 너무도 쓸쓸해 보이는 모습이 마음에 걸려 고민 끝에 다가가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잠시 여기에 앉아도 될까요?


그녀는 놀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가벼운 농담을 건네었다. 한국에서 온 평범한 직장인이고 취미로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여러 사람들의 삶 속 이야기들로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설명하고 이곳에 혼자 앉아있는 이유를 물었다. 그녀는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혹시 기다리는 친구가 남자친구인지 물었다. 그녀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바다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술을 움직여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녀와 그가 만난 건 4년 전 친구와의 술자리였다고 한다. 그와 깊은 사이가 되었을 때쯤 그가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그녀는 그 이야기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와 헤어지고 고향을 떠나 다른 곳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전 우연히 다시 그를 만났다. 그녀는 그를 보는 순간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날 함께 시간을 보내고 다시 그와 만나게 되었다. 그와는 그가 출장을 갈 때만 만나는 사이가 되었고 그의 출장지에서 시간을 맞춰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전부일뿐 평소에는 연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방파제에 앉아 바라보던 맞은편 건물이 결혼식장이라는 걸 문득 깨닫고 마음이 아파왔다. 조금 전 내가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결혼식장을 누군가는 반대편에서 이런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우리가 바라보는 풍경들은 결국 자신의 눈으로 재해석되고 수만 가지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홀로 떠난 이 여행에서 나는 다른 눈으로 무언가를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 - 마르셀 프루스트-


저녁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무렵 식사를 하고 야경이 보고 싶어 나카스 다리로 향했다. 다리 양쪽으로 조그만 강물을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분위기의 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분위기 있는 팝 음악에 맞춰 잘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춤을 추고 있는 펍들이 즐비해 있었고 왼쪽으로는 양복을 입은 회사원들이 목청을 높여 대중가요를 부르며 맥주를 마시는 포장마차들이 있었다. 



나카스 밤거리를 걷다 여러 개의 다리 중 한 곳에서 버스킹을 하고 있는 인디 밴드를 보게 되었다. 일본의 가수들은 모두 비음을 섞은 목소리로 멜로디가 중심이 된 팝 음악을 부른다고 생각했던 나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재즈음악을 하는 이 밴드에 금방 빠져들었다. 한적한 다리 위에서 앰프 없이 기타 한대로만 많은 음악들을 연주하였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맥주를 건네기도 하고 가볍게 인사를 하는 등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공연을 즐겼다.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곳은 아니었기에 공연을 보는 사람이 많지 않아 그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언젠가는 큰 공연장의 수많은 관객들 앞에서 노래하고 싶다는 그들의 말이 곧 현실이 될 것 같이 느껴졌다. 




말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혼자 여행을 떠나왔지만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결코 나는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는 정말 깊은 속 마음을 털어놓고 살지 못하는 건지 모른다. 모모치해변의 그녀는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처음 만난 나에게 털어놓았고, 나는 라이브클럽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뤄지지 못할 꿈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나는 말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게 아니라 내 말과 꿈이 거절당하고 그로 인해 혼자 될까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진심을 다해 부딪히지 않고 적당히 넘어가거나 말을 피해왔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집에 돌아가는데로 가족과 함께 이번여행에 대한 이야기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야 겠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 세계를 여행하고 집에 돌아와 그것을 발견한다 -조지 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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