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울(Soul, 2020) 리뷰
나의 영화 메이트 K와 소울(Soul, 2021)을 관람했다. 가히 코로나 시대의 영화라고 칭할 만하다는 주변의 절찬을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에 부푼 기대를 안고 오랜만에 마스크를 쓰고 영화관을 방문했다. 결과는 대만족. 영화의 마지막 20분 동안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 어느덧 20대의 중반을 건너 진로를 찾아 방황하는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기 때문일까. 단지 귀여운 파란색의 생명체들이 기억에 오래 남아서일까. 영화를 보고 나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남았다. 이에 인간의 생(生)과 사(死)과 사를 가장 귀엽게, 또 섬세하고 짜릿한 재즈의 선율에 담아 묘사한 작품 소울(Soul)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주인공 조 가드너는 뉴욕의 무명 재즈 피아니스트다. 그에게는 현업인 중학교 선생님이라는 안정적인 직업보다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재즈 피아니스트로의 열망이 더 컸다. 어느 날 우연한 기회로 유명 재즈 음악가인 윌리엄스의 밴드에 채용될 기회를 얻게 되지만, 뜻밖의 사고로 집에 가던 길에 웜홀에 빠져 죽기 직전의 상황에 이른다. 곧 완전한 죽음에 이르는 사후세계로 가는 길목에 떨어진 조는 평생의 꿈을 이루려던 날에 벌어진 사건과 자신의 죽음을 도무지 믿지 못한다. 이에 운명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고자 한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사자(使者)들을 헤집고 필사적으로 그곳에서 벗어나려 애쓰다가 떨어진 곳은 태어나기 전의 세계, 다시 말해 '생전 세계'였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 귀여웠을지 몰라
솜사탕을 연상시키는 몽실몽실한 외양. 한 입에 넣으면 달큼한 향이 훅 풍겨져 나올 것 같은 색감과 촉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천진난만함이 느껴지는 위 사진 속의 캐릭터들은 우리 인간의 본질이자, 영혼(Soul)으로서 등장한다. 영화 소울(Soul)은 귀여운 영혼들과 함께, 텔레토비가 나올 것 같은 낙원의 모습을 배경으로 인간의 생전 세계를 묘사한다. 인간의 영혼 본성은 이 낙원의 생전 세계에서 습득된다. 자아도취의 집, 냉정의 집, 기쁨의 집으로 일컬어지는 공간을 차례대로 통과하며, 인간의 기본적인 성격들로 이루어진 슬롯(slot)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슬롯을 모두 채워야지만 '지구 통행권'을 교부받아 지구에 가서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
슬롯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한 영역은 한 때 이름을 날렸던 인간 멘토들에 의해 채워진다. 그 영역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영혼 스스로 찾아서 채워야 한다. 멘토들은 영혼들을 돕기 위해 인간 삶의 의미에 대해 설파한다. 이들은 죽기 전에 노벨 문학상을 탔거나, 불치병을 치료했거나 인류의 역사에 큰 공헌을 했던 사람들이다. 대개의 영혼들은 멘토들의 도움을 받아 나머지 영역을 채워 곧 떠나지만, 그중에서 유일하게 탈출하지 못한 영혼이 있었다. 바로 영혼 22번이다. 22번은 영역을 전부 채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수 백 년, 수 천년 동안 생전 세계에 갇혀있었다. 그 억겁의 시간 동안 아리스토텔레스, 마더 테레사 그리고 저명한 심리학자였던 구스타프 칼 융까지 수많은 인간세상의 위인들이 멘토가 되었지만, 22번의 슬롯을 완전히 채우지 못한다. 오히려 22번을 두고 '너 같은 아이는 정말 구제불능'이라고 비난할 뿐이었다.
하지만 22번에게 다시는 오지 못할 기회가 찾아온다. 생전 세계 관리자의 실수로 인해 조가 새로운 멘토로 낙점되었기 때문이다. 22번은 새로 온 멘토 조가 그저 낯설 뿐이었다. 지금까지 만난 위인들과 달리, 조의 인생이 성공하지 못한 사람의 우울함을 가득 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는 다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못다한 꿈을 이루고자 했다. 22번은 궁금해졌다. 그가 왜 이렇게 생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 말이다. 이에 조가 인간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는데 협조하기로 한다. 자신이 왜 태어나야 하고, 왜 인간으로서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알려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산다는 게 도대체 어떤 건데?
다행스럽게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헤매는 영혼들을 구조하는 문 윈드의 도움을 받아 22번과 조는 지구에 가게 된다. 하지만 조가 원하던 방식은 아니었다. 22번이 조의 몸에 들어오고, 조는 고양이로 태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에게는 그날 저녁 7시에 꿈꿔왔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어떻게든 빨리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했다. 어렵게 찾아온 재즈 피아니스트로서의 데뷔 무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조는 22번을 설득하여 자신의 모습을 되찾아 무대에 오를 방법을 강구하려 한다.
하지만 22번은 달랐다. 마침내 자신이 꿈꿔온 인생을 맛보고 있었다. 생전 세계에서 맛보던 무색무취의 피자는 천상의 맛이었다. 조가 걸어 다니던 뉴욕 거리의 풍경, 길거리 버스킹의 선율, 조의 주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꿈과 열망. 이 모든 것이 22번이 생전 세계에서 배우지 못했던 진짜 삶이었다. 대단한 업적을 세운다거나, 인류를 구한다거나, 특별한 공식을 발견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맛있는 저녁을 먹고,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하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 이것이 인간이 태어나서 죽기까지 경험하는 인생이었던 것이다.
'살아내는 삶'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코로나 19 이후 더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세상을 살아가는 20대 중반의 졸업유예생이다. 대학교에서 인문학을 전공했고, 경영학이나 경제학 같은 학문이라고는 몇 개의 개론 수업을 들은 것이 전부다. 문학에 파묻혀 살다가 호기롭게 도전한 구직활동은 뉴욕의 밤거리만큼이나 차가웠다. 쓰라린 결과들을 무수히 마주할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내가 당장 내일 죽는다면 이 직업을 택할까? 나에게 돈은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가?라는 순수한 고민들 말이다. 누군가는 단순한 패배자의 변명이라고, 혹은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의 고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질문일 수 있지 않을까?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질문. 필자는 학창 시절 배우지 못했다. 그저 남을 이기는 데에만, 좋은 직업을 가져서 돈을 버는 데에만, 명문 대학교에 가는 것에 대해서만 골몰해 왔었다. 삶을 만들어가고, 스스로 삶을 만들어나가고 살아내는 방식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결과는 지금 눈덩이처럼 불어나 나에게 찾아왔다. 너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거냐고, 무엇을 이루고 싶냐고 말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어떠한 해답을 얻었다는 궁색한 변명은 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주인공이 보여준 용기로 인해 내 삶을 180도 바꾸겠다는 것도 쉽게 단언하지 않겠다. 나는 그저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았고 눈물을 흘린 관람객 A로서 말을 전할 뿐이다.
소울(Soul)은 필자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인은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할 공간도, 사람도, 시간도 없는 바쁜 도시의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영화는 단시간 안에 인간의 삶과 고민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이로부터 영화를 보는 우리는 티켓값을 지불하여 온기를 얻는다. 따뜻함을 곱씹고 위로를 받는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구태여 조가 되려는 강박을 느낄 필요는 없다. 내가 원하던 삶은 아닐지라도 살아내는 삶에 대한 찬사를 보내는 것. 하루하루의 소중함에 대해 반추하고, 나의 삶을 살아내는 것에 대한 중요함을 설파하는 것이 바로 이 영화의 목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