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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피스토 Feb 16. 2021

한(恨) 맺힌 사랑의 시대

영화 콜드 워(Cold War, 2018) 리뷰




영화 콜드 워(Cold War, 2018)의 공식 포스터


영화 '콜드 워(Cold War, 2018)'의 사랑은 차가워졌다 뜨거워졌다를 반복하는 고장 난 온도계처럼 느껴진다. 주인공 줄라와 빅토르는 파리의 무더운 여름 햇살이 무색할 만큼 열정적으로 교감을 나누지만, 하루아침에 혹독한 시베리아 벌판의 추위와 같은 냉혹한 현실을 마주한다. 서로가 없이는 살지 못할 것처럼 애틋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항상 이별을 택하는 선택을 이어간다. 천성을 예술가로 태어난 주인공들에게 부족함, 결핍과 같은 심리는 떼어낼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들은 한(恨) 맺힌 자신을 위로하며 이를 원동력으로 평생을 살아간다.


주인공들의 사랑에서 드러나는 '한'이란 영원히 메꾸어질 수 없는 그리움의 감정이자, 욕구나 의지의 좌절과 그에 따르는 삶의 파국, 또는 삶 그 자체의 파국과 그에 처하는 편집적이고 강박적인 마음의 자세와 상처가 얽힌 복합적인 감정을 일컫는다. 줄라와 빅토르의 만남을 단순히 애정과 증오, 혹은 사랑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휘몰아칠 정도로 격정적으로 서로를 마주하는 주인공들을 이해하는 데 사랑이라는 말은 어쩌면 부족한 단어일지도 모른다.



줄라와 빅토르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
공산주의 이념을 노래해야 하는 빅토르의 합창단


영화 '콜드 워(Cold War)'에서는 냉전시대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두 남녀의 사랑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장치로 기능한다. 하지만 둘은 서로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면서도 정치적 갈등을 피하지도, 이로부터 도망가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만들어낼 인생의 항로를 받아들일 뿐이었다. 공산 정권이 들어선 폴란드에서의 첫 만남부터, 동서로 분단되어 있던 베를린, 마지막 자유로운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까지 이어진 줄라와 빅토르의 헤어짐에는 그들 각자의 자유로운 의지가 반영되어 있었다. 사랑을 지킬 수 있었음에도 떠나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는 애틋한 그리움을 예술적으로 승화하고자 했던 주체적 선택이 있었다.




<서편제>에 드러난 한의 정서


영화 서편제(1993) 속 장면


본래 예술가에게 한(恨)이란 항시 마음속에 지니고 다니는 은장도와 같다. 영화 <서편제>에서 떠돌이 소리꾼인 유봉이 수양딸인 송화에게 한을 만들기 위해 독을 먹여 눈을 멀게 하는 장면이 그러하다. 송화는 유봉이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눈치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스승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좋은 소리를 하려면 가슴속에 한이 있어야 한다고, 한에 파묻히지 않고 한을 넘어서야만 득음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유봉으로부터 배우며 스스로 단련시켜왔기 때문이다. 송화는 가난과 아버지의 핍박에 견디다 못해 떠나는 동생 동호를 붙잡지 못하고 평생 기다린다. 아끼던 동생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면서도 한의 정서를 통해 자신이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예술적 경지를 완성하고자 했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줄라와 빅토르도 그리움과 설움으로 덩어리 진 감정을 쉽게 놓지 못한다. 민속음악단의 성공적인 초연 이후 베를린에서 줄라는 같이 파리로 도망가자던 빅토르를 바람 맞히는가 하면, 그 후 몇 년 뒤 어렵게 파리에서 재회한 두 주인공은 서로의 음악적 가치관이 맞지 않아 갈등을 빚는다. 폴란드 민요가 아니라 프랑스어로 재즈를 노래하는 줄라의 모습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이 어색하고 불편해 보인다. 영화 초반부 오디션 장면에서 보여줬던 당찬 모습과 달리, 빅토르에게 뜨거운 사랑을 노래하던 목소리는 점점 식어 들기 시작한다. 감격적인 해후의 시간 끝에 마음이 찰랑찰랑 차오르려는 찰나, 처음 겪어보는 행복감에 적응하지 못하고 끝내 다시 자신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은 것이다.



파리에서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은 줄라


빅토르 역시 자신의 음악을 이해해주지 않는 줄라의 모습에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음악관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망명을 택한 예술가다. 고국에서의 명예로운 생활을 저버리고 낯선 땅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려 했던 빅토르는 누구보다 음악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었다. 여기에 줄라를 만나고 싶어 하는 애달픈 마음은 파리에서 예술가로 자리 잡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밤마다 건반을 따라 들려오는 슬픈 선율은 파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딱 한 명, 줄라의 마음은 좀처럼 메워질 수 없었다. 더 이상 둘은 음악적 교감을 더 이상 나눌 수 없었으며, 결국 서로의 마음속에 이전보다 깊은 상흔을 남기고 줄라는 폴란드로 다시 돌아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폴란드로 돌아와 자살을 기도하는 줄라와 빅토르




영화 콜드 워(Cold War)는 사랑을 한다는 것이 한을 쌓는 일이며, 한을 쌓는 것이 곧 사랑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타고난 예술적 기질을 끌어안고 살아가야만 했던 주인공들의 운명적 사랑을 잘 드러내는 것은 타이틀곡 ‘두 개의 심장, 네 개의 눈(Two hearts, Four eyes)’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변주되어 등장하는 이 폴란드 음악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랑이 떠안아야 할 사무치는 슬픔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처음부터 줄라와 빅토르는 서로의 마지막을 예견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없는 세상의 끝, 마지막 순간에 다다르고 나서야 일평생 뿌리칠 수 없었던 한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을.



'두 개의 심장, 네 개의 눈'을 노래하는 줄라


마지막으로 영화에서 끊임없이 변주되어 흐르는 OST '두 개의 심장, 네 개의 눈(Two Hearts, Four Eyes)'를 첨부하며 글을 끝맺고자 한다.





https://youtu.be/IxFsK7xKRPM

        

*위 글은 2019 씨네21 영화평론상에 기고된 바 있습니다. 무단 복제 및 유출을 엄중히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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