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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피스토 Mar 02. 2021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영화 해피투게더(Happy Together, 1997) 리뷰

영화 해피투게더(Happy Together, 1997) 공식 포스터


우리 여기서 헤어지자


홍콩에서 사랑에 빠진 두 주인공 아휘(양조위)와 보영(장국영)에게 아르헨티나는 사랑을 끝내기에도, 다시 시작하기에도 알맞은 장소였다. 언어도 문화도 떨어진 거리만큼이나 통하지 않는 이역만리의 땅. 지구의 정반대에 위치해 있다는 물리적 거리감 때문일까, 아니면 모국을 떠나온 것에 대한 그리움일까. 호기롭게 잠시 고속도로 길가에 차를 멈춰 세운 채 보영은 연인 아휘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우리 여기서 헤어지자고 말이다. 그리고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건 운명에 맡겨두자고. 보영에겐 만남과 헤어짐이 너무나도 쉬웠다. 아휘는 납득할 수 없었지만 일단은 그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알았다고 한들 아르헨티나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보영과 아휘의 얇고도 질긴 인연은 시작된다.



보영과 헤어진 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탱고바에서 일하는 아휘
아휘가 일하는 바에서 재회하는 둘


연인의 만남을 은유하는 빛


왕가위는 '만남'을 영화적으로 표현하는 데 귀재인 감독이다. 사람들 사이의 인연이 결단코 쉽게 끊어지지 않음을 왕가위 감독은 다양한 방법으로 변주해서 보여주며, 이는 영화 화양연화(In the Mood for Love), 중경삼림(Chunking Express)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화 해피 투게더(Happy Together)에서 등장하는 도시의 불빛들은 아휘와 보영의 불안한 심리적 상태를 은유한다. 술에 취한 채 매일 밤 전화하는 보영에게 시달리다가도 걱정되어 밤거리를 나선 아휘의 뒤를 쫓는 핸드헬드(hand-held) 카메라의 불빛, 술에 취한 보영을 데리러 가는 아휘를 태운 택시의 굽이치는 불빛, 모두가 잠든 새벽을 틈타 탱고를 추는 둘을 내리쬐는 환하고 서슬퍼른 조명까지. 실로 현대 도시를 살아가는 연인의 고독감과 불안감을 유려하게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번 영화를 4K로 복원하는데 5년이 소요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영화관에서 이번 리마스터링 판본을 보면 감독이 도시의 빛을 복원하는 데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술에 취한 보영을 데리러 온 보영
아휘의 공동주택 거실에서 춤을 추는 둘



세상을 집어삼키는 물


우여곡절 끝에 다시 재회한 둘은 불안한 관계를 이어나가야 했다. 보영은 손의 부상이 낫자 다시 밤에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고, 아휘는 그런 보영을 보며 불안해한다. 보영이 다시 새로운 연애 상대를 찾아 훨훨 날아가버림으로써 홀로 남겨질 자신이 두려웠기 때문일까. 아휘는 보영이 담배 하나조차도 사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급기야는 보영의 여권을 훔쳐 돌려주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보영이 아휘의 집착에 지쳐 집을 나가게 되면서 둘은 다시 헤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아휘는 보영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곧 세상의 끝으로 여행을 떠날 거라던 동료 장의 녹음기에 자신의 설움을 풀어내는 한편 다시 홍콩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휘는 비행기표를 사기 위해 밤낮이 바뀐 도살장에서 일하며 시차를 맞추고 돈을 모은다. 또 보영이 다시 찾아와도 자신을 볼 수 없게 세를 들던 방의 계약을 종료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았다. 바로 언젠가 보영과 같이 가고 싶었던 이과수 폭포였다.


사실 둘이 아르헨티나에 온 이유는 랜턴 속에 그려진 이과수 폭포 때문이었다. 랜턴에 그려진 세찬 물줄기 아래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둘을 감응시키기에 충분했다. 세상의 모든 풍파를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이들의 강인함과 독립심과 더불어 이과수 폭포의 경이로움은 아휘와 보영을 압도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말에 이르러 폭포에 간 것은 결국 아휘 혼자였다. 아르헨티나에서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생활하던 내내 랜턴에 그려진 이과수 폭포를 보던 것도 철저히 아휘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실제 이과수 폭포에 마주하고 나서야 아휘는 깨달은 것이다. 그동안 자신의 영혼이 시들어갔음을 말이다. 이윽고 아휘는 폭포라는 자연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살아갈 원동력을 흡수시킨다. 뒤늦게 아휘를 찾은 보영이 텅 빈 방에 앉아 랜턴을 들여다보지만, 이미 아휘는 이과수 폭포와 함께 자신의 과거를 씻겨 내린 후였다.


"이과수 폭포에 도착하니 보영 생각이 났다. 슬펐다.
 폭포 아래 둘이 있는 장면만 상상해 왔기 때문이다."

영화 <해피 투게더(Happy Together, 1997)>



보영과의 관계에서 불안을 느낄 때 마다 이과수 폭포 랜턴을 보는 아휘
보영과의 관계를 끝내기 위해 이과수 폭포를 찾아온 아휘


우리 다시 시작하자


극의 후반부에 이르러 아휘는 대만을 경유하여 홍콩에 돌아가려다  예전 식당 동료 장(금성무)의 부모님이 하는 시장 가게에서 우연히 밥을 먹게 된다. 그러다가 장이 집으로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속 장의 얼굴을 보고 미소 짓는다. 대만 야시장에 오면 장을 다시 만날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아휘가 다시 대만에 오게 될지, 온다면 장을 만날지, 아니면 보영을 만나기 위해 아르헨티나에 다시 돌아갈 것인지 우리는 다만 아휘의 향후 행보를 추측할 뿐이다.


어쩌면 사람 간의 만남에 있어 시작이 있을지언정 끝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 다시 시작하자"는 보영의 말은 소리 없는 메아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가족을 비롯한 친구들, 연인과 수도 없이 깊은 관계를 맺고 짐짓 끊은 체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마치 폭포의 물줄기가 세차게 밑으로 떨어지지만, 다시 올라가며 순환하듯, 인간은 만남과 헤어짐의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렇듯 영화 해피투게더(Happy Together,1997)에서 감독 왕가위는 사람간 만남의 순간을 포착하고 이를 이어 붙여 우리에게 영화라는 형태로서 보여준다. 주인공들이 동성연애를 하는지, 배경이 아르헨티나인지 홍콩인지 대만인지는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은 설정이었다. 다만 우리는 영화를 보는 동안 명멸하는 빛에 감춰진 삶의 진실을 발견하고, 왕가위가 심어놓은 태곳적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삶을 추적해나가며 반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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