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렛 미 인>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창문을 열면 옆집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여자가 종종 눈에 띄었다. 눈이 마주칠 때면 얼른 커튼 뒤로 숨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동요 없는 빈 눈으로 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창문을 열 때마다 그녀와 또 마주치지 않을까 짐짓 두려웠다. 주말 낮에는 이웃의 싸우는 소리로 잠이 깨곤 했다. 얇은 벽을 타고 남자의 두터운 목소리와 여자의 신경질적이고 얇은 목소리가 뒤엉켜 새어 나왔다. 싸움의 원인은 잘 모르겠다. 자신의 음역대를 빗나간 목소리에는 조절할 수 없는 감정들이 묻어있다. 그리고 나는 삐죽하게 튀어나온 그 감정을 무던하게 흘러 보내지 못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빨리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 창 밖에서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은 뉴욕 거리의 티파니 상점과 주인공 할리(Holly Golightly)의 아파트로 시작한다. 화려한 옷차림의 할리는 크루아상을 먹으며 티파니 상점의 창 밖에 서 있다. 이른 아침, 아직 오픈 전인 컴컴한 매장 안을 들여다본다. 새벽의 차가운 도시 공기가 그녀의 뒷모습을 더 쓸쓸하게 만든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반짝이는 안대와 귀마개를 하곤 우연히 자신의 방에 찾아온 폴(Paul Varjak)에게 이렇게 말한다. “원하는 집을 얻기까지 아무것도 소유하고 싶지 않아요!”
아직 소유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책임지고 싶지 않다는, 언제나 이곳을 떠날 수 있는 상태, 유예하고 싶은 바람과 비슷하지 않을까? “유예하고 싶은” 마음은 내가 지금의 집을 대하는 마음과 맞닿아 보였다. 할리의 방은 내가 지내는 곳보다 훨씬 키치하고 자유분방했지만 닮은 구석이 있었다. 한시적인 텐트와 같은 방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녀의 아파트는 흡사 잘 꾸며진 은신처와 같다. 방에는 원래의 기능을 수행하는 가구가 드물다. 반으로 자른 욕조가 소파를, 트렁크로 보이는 커다란 상자가 테이블을 대신한다. 각종 옷과 구두, 장신구들이 넘쳐나지만 공간 안을 뒹굴 뿐이다. 좌표를 잃은 사물들은 침대 밑이나 과일 바구니 안에서 발견된다. 항상 어수선하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그녀는 공간 위를 떠도는 사물들과 피차 같은 처지다. 방은 일상과 멀어진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자신을 꾸며야 하는 곳으로 기능하거나 떠들썩한 파티와 훨씬 친숙하다. 그렇다면 할리가 마음 둘 곳은 어디일까?
우울한 그녀가 향하는 곳은 다시 티파니다. 그녀에게 티파니란 조용하고 고고한, 불행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향과 같은 곳이므로. 화려한 파티 뒤에 찾아오는 공허와 쓸쓸함을 티파니가 달래 줄 것을 바라며 크루아상과 커피라는 지극히 평범한 음식을 삼킨다. 자기 자리에 그대로 진열되어 있는 각종 장신구들, 흐트러짐 없이 정돈되어 있는 보석들에서 그녀는 안정감을 찾았던 것일까? 안전하고 동시에 완벽하고 싶은 욕망은 언제나 끓어오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부정하기도 한다. 나는 아직 완벽하지 않다면서. 완전하기 때문에 누구에게 비난을 받지도, 평가를 받지 않는 정돈된 세계. 완성형의 세계. 그녀가 원하는 것의 집합이 가시화된 곳이 티파니다.
할리가 창 밖을 서성이는 또 다른 곳은 위층으로 이사 온 폴의 방이다. 그녀는 남자의 주정을 피해 그의 방 창가에서 폴을 엿본다. 힐끔 바라본 그의 방은 할리의 방과는 다르다. 이사 온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폴의 방은 앤틱한 가구와 샹들리에, 반짝이는 황금 전화기까지 갖춰져 있다. 언뜻 그녀가 바라던 티파니와 비슷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조용하고 고고한 삶, 제 자리에 반듯하게 놓여있는 생활품들. 할리가 폴에게 끌리는 이유는 멀끔하고 단정한 모습 때문이었을까? 옷깃을 여미고 그녀가 창 밖에서 훔쳐본 것은 침대에서 곤이 잠든 폴을 두고 정부가 테이블 위에 300달러를 우아하게 올려놓고 떠나는 광경이다. 그녀는 문득 동질감을 느낀다. 그리고 창 안으로 성큼 들어선다.
할리와 폴이 생활을 지탱하는 방식은 닮았다. 할리는 화장실을 갈 때마다 남자들에게 50달러씩 받고, 폴이 자는 사이에 정부는 테이블 위에 300달러를 올려두고 떠난다. 그녀가 그의 창문을 넘는데 서스름 없었던 것은 자기와 비슷한 세계라고, 익숙한 곳이라고 느꼈던 것일까? 그렇게 들어선 폴의 자판기 안에는 먹줄이 없고, 할리는 그녀가 할리인지 룰라메이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없다. 비슷한 결핍은 끌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와 같은 결핍을 가진 상대를 바라보는 것은 끔찍한 일일지도 모른다. 할리는 폴을 계속 밀어낸다.
│ 누군가 창을 두드릴 때
영화 <렛 미 인(Let The Right One in)>의 오스칼과 이엘리는 사정이 다르다. 오스칼은 칼로 누군가를 베고 싶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다. 그의 칼은 바지 주머니 속에 숨겨져 있다가 아무도 없을 때 튀어나온다. 애꿎은 나무를 찌르고 위협한다. 이엘리는 으슥한 곳에 조용히 숨어있다가 거침없이 사람의 목덜미를 덮친다. 피를 빨아먹는다. 그는 사람을 죽여야 살 수 있다.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과 사람을 죽여야만 사는 이 이종의 존재들은 다른 외로움을 가지고 정글짐 위로 덩그러니 모인다.
오스칼은 엄마에게는 얼버무렸던 이야기를 이엘리에게 털어놓는다. 얼굴에 난 상처의 원인이 무엇인지. “자신의 결핍과 외로움을 누구에게 드러내는지”는 그 관계를 내밀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시작은 문을 통해 출입하는 것이 아니라 창문을 통해 이루어진다. 밤의 창문은 반사하는 성질이 있어 창을 보는 자신과 창 밖의 세상을 오버랩시킨다. 서로를 연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 서로가 더욱 다른 공간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의 외로움을 드러내기까지 주저하고 입술을 오므렸다 피고 손바닥을 창에 데었다 뗀다. 망설임의 과정들, 오스칼이 창 밖의 이엘리를 바라보는 장면이 유독 많은 이유는 그 주저하는 시간들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이제 누군가를 겨누던 칼은 오스칼이 이엘리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는 데 쓰인다. 창을 바라보며 주저하던 손바닥으로 그는 피의 서약을 하길 원한다.
한편 이엘리는 자신이 어떻게 오스칼과 다른지 스스럼없이 보여준다. 결국 토를 하면서까지 사탕을 먹어 보이고, 초대받지 않은 이가 남의 공간에 들어섰을 때 사그라드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가감 없이 보여준다. 이엘리가 오스칼에 대한 마음을 증명해 보일 때마다 오스칼은 이엘리가 그녀를 안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엘리는 그리고 그렇게 너와 내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너는 나를 좋아해 줄 것인지에 대해 묻는다. 오스칼은 열 두해하고 여덟 달을 살았지만, 이엘리는 열두 해쯤을 살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열두 해쯤을 살 것이다. 그러니 시간이 흐른 후에는 이엘리에게 목을 내어주던 남자처럼 이엘리와 오스칼의 시간은 점차 벌어질 것이다. 무한한 시간 앞에서 지금의 외로움이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졌을 때, 이엘리는 수영장 속을 주저 없이 들어가 물속에서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닌 오스칼을 위해 살육을 저지른다. 그를 거침없이 구해낸다.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너무나 명확하게 안다.
창 밖의 여자들은 창 밖을 서성대다가 창 안으로 들어가기를 시도한다. 옷깃을 여미며 추위에 떨다가 혹은 담배를 피우며 한숨짓다가, 창으로 거침없이 날아올라 살며시 노크를 하며 창 안에서의 초대를 기다리기도 하면서. 이야기 속의 여자들을 보면서 내가 어느 창 밖을 서성대고 있는지, 어떠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지 생각했다. 그 창에 대고 입김을 불고 흔적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다가 또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창 밖을 서성이는 또 다른 이에 놀라 숨곤 하는지, 혹은 창 밖을 빼꼼히 바라보며 무엇을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 표지 이미지 :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 블레이크 에드워즈, 1961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 블레이크 에드워즈, 1961
<렛 미 인(Let The Right One in)>, 토마스 알프레드슨,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