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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미노 Feb 12. 2024

[프롤로그]하트 114

두 번째 산티아고를 준비하며

15년 전쯤이었다. 내 심장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때가.


갑자기 식은땀이 흘렀다. 수업 중에 강력한 청소기로 내 기운을 쑥 빨아드린 것처럼 갑자기 힘이 쪽 빠지면서 쓰러질 거 같아 앉아 있는 아이의 의자 등받이에 급히 손을 뻗어 짚었다. 그 동작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수업을 듣는 아이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수업이 없을 때 보건실에 찾아갔다. 위와 같은 일이 수업 시간에 있었다고 말하니 우선 혈압을 재보자고 했다. 혈압이 약간 높기는 하나 그렇다고 약을 먹을 정도는 아니란다. 다만 심장이 일반적인 성인 기준보다 많이 느리게 뛴다며 그게 질병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 더 정확한 거는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보는 게 좋겠다는 말을 보건교사는 덧붙였다. 그 이후로도 아주 드물게 비슷한 증상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금세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병원에 갈 정도로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아 15년 넘게 ‘다른 사람보다 늦게 뛰는 심장을 가진 자’라는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


이 느린 심장이 최근에 두 배 빨리 뛰게 되는 일이 생겼다. 심장에게 갑자기 평소보다 두 배 빨리 뛰라고 혹사하는 거 같아 미안하고 걱정되기는 하지만, 한 편으로는 내 심장도 이렇게 빨리 뛸 수 있다는 것에 놀라는 중이다.


두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을 준비하고 있다. 첫 번째 순례길은 너무나 급작스럽게 결정해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떠난 길이라 준비할 시간적 여력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순례길 초기에는 몸이 적응하느라 무척 힘들었다. 이제는 그때보다 5살 더 많은 신체의 나이와 겨울이라는 점이 떠나기에 앞서 두려움으로 먼저 다가온다. 물론 순례길에 접어드는 순간 대부분은 거기에 맞게 다들 적응하면서 걷는다. 그러니 첫 출발지인 생장피드포르(St. Jean Pied Port)까지만 잘 도착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준비 없이 떠났다가 혹시라도 중간에 순례길을 포기하거나 말도 안 통하는 먼 타국에서 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어 몸을 어느 정도 만들어 가려고 한다.


그래서 11월 2일부터 자전거로 출퇴근하던 기존 방식을 걸어서 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실제로 순례길 걸을 때 멜 배낭에 가져가서 쓸 침낭, 세면도구, 슬리퍼, 등산스틱, 500ml 물병, 우의, 옷가지 등등을 넣었다. 아직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넣지도 않았는데 꽤 무게가 나간다. 해가 뜨기 전에 순례길을 나서기에 이것도 적응하기 위해 어둠이 가시지 않는 6시쯤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선다. 평소 신던 운동화보다 10mm가 더 큰 등산화를 준비했다. 등산화 안에는 얇은 발가락 양말과 두꺼운 울 양말을 덧대서 신어야 물집이 잡히는 걸 막을 수 있다. 또, 장시간 걸었을 때 몸에 전해지는 피로감도 줄일 수 있다.


지금 계획상으로는 하루에 대개 30km 이상의 순례길을 걸어야 일정을 예정된 기간 안에 소화할 수 있다. 특히 출발하고 1주일 후에 로그로뇨라는 곳에서 헝가리 친구를 만나기로 약속한 터라 그곳까지는 무조건 그 기간 안에 걸어야 한다. 하지만 비수기(11월부터 다음 해 3월 말까지)인 겨울철에는 순례자가 적어 문을 닫는 숙소가 많다. 성수기에는 예정된 목적지가 아니어도 그날의 몸 상태에 따라 작은 마을에서라도 묵어갈 수 있었으나 이제는 큰 마을이 아니면 숙소도, 식당도,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바르(BAR)도 열지 않기에 일정 잡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어느 날은 20km 조금 넘게 걷고 멈춰야 할 때도 있고, 어느 날은 문 여는 숙소를 찾아 40km 넘게 걸어야 하는 날도 생기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미리 몸을 만들어놓지 않으면 첫 1주일 사이에 탈이 나서 걷기를 멈춰야 할 수도 있기에 이번 순례길은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지금 걷고 있는 출퇴근 길은 편도 7km 정도 된다. 자전거로는 20여 분 소요되는데 걸어보니 70분이 넘게 걸렸다. 1km를 걷는데 대략 10분 정도. 첫번째 산티아고 이스까지 끌어올리는데 시간이 좀 걸릴 듯싶다. 왕복 14km를 이제 이틀 걸었을 뿐인데 벌써 오른쪽 발바닥에 통증이 올라온다. 흔히 말하는 족저근막염 초기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시간 날 때마다 발바닥을 주물러 보는 데 딱히 증상이 나아지지 않는다. 몸이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약을 처방받아 먹어야 하는지는 일주일 정도 더 걸어보고 최종 판단을 해보려고 한다. 내일 출근길은 많은 비가 올 것으로 예상된다고 하니 새로 산 우비를 입고 우천 시를 대비해 걸어봐야겠다.


자전거를 타고 쌩쌩 달렸던 그 길에 등산화 자국을 남기며 걷는 기분은 또 다른 맛이 있다. 마치 배속을 느리게 하여 슬로비디오로 영상을 보는 것처럼 만나는 사람도, 추수가 끝난 들판도, 물오리가 떼지어 놀고 있는 장현천도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감상만 하면서 천천히 걸을 수만은 없어 다리에 힘을 주며 빨리 걷고 있다. 이때 왼 손목에 차고 있던 스마트 워치가 킬로미터마다 소리로 알려준다. 현재 몇 km를 걸었으며, 소요 시간은 얼마, 현재 심박수는 어떻게 되는지. 그런데 첫날 2km 걸었다고 알려주는데 심박수가 평소보다 2배가 넘었다.


‘심박수 114’


아직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는 것도 아닌데 연습만으로도 평소보다 두 배 이상 빠르게 심장을 뛰게 만든다. 두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뒤로 무너질 듯 찾아온 몇 번의 위기의 순간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까미노를 걷고 있는 내 모습을 떠올리며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 내가 걷게 될 순례길은 약 900km. 하루도 쉬지 않고 꼬박 한 달여를 걸어야 하는 고생이 뻔히 보이는 길이다. 일상이 낯선 타국에서 한 달여를 걸으며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깨닫게 될까? 앞으로 한 달 보름 후면 직접 그 길에 서서 물을 것이다.


‘나는 왜 이 길을 걸으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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