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최성용(민주적 사회주의자 편집팀장)
정의당의 총선 전략이 구체화되고 있다. 장혜영 감독이나 이자스민 전 의원을 비롯해 여러 소수자나 부문을 대표할 수 있는 인사들을 당으로 영입하고, 나아가 총선기획단이 꾸려졌다. 더불어 ‘청년 정치’ 담론에 반응하면서 청년 후보 선출과 관련된 논의가 당 내부에서 일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당선권 20% 할당제와 가산점제에 대한 쟁점이며, 그 외에도 오픈 프라이머리 및 비당원에 대한 피선거권 부여 문제 등도 쟁점으로 남아있다. 사실 더 진지하게 검토되어야 하고 논쟁이 요구되는 사안은 당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키는 후자의 쟁점이지만, 이는 비단 청년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기에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전장의 쟁점, 즉 청년 후보를 선출을 위한 제도로서 ‘할당제’와 ‘가산점제’를 둘러싼 논쟁의 경우, 이것은 사실 기술적 쟁점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방식이야 어떠하든 청년 후보 선출에 대한 우대 조치affirmative action이 적절히 이뤄진다면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두 제도 중 하나를 택해 옹호하는 여러 청년당원들의 주장들을 들여다보면, 이 기술적 쟁점 이면에 근본적인 쟁점을 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청년 정치’에 대한 이해와 규정의 문제다.
기실 두 제도를 평가하는 기준은 ‘청년 정치’에 대한 입장과 결부된다. 두 제도에 대해 지금까지 제출되거나 표명된 입장들은 모두 그 나름대로 기존의 청년 정치에 대한 평가, 청년이라는 정치적 주체의 구성에 대한 입장 등을 전제로 하고 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두 제도 중 하나를 택일하는 식의 ‘기술적’ 쟁점을 중심으로 논의가 이뤄지고 있기에 이 근본적인 전제들을 정면으로 다루진 않고 있다. 때문에 저마다 모호한 채로 청년 정치의 내용을 규정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청년 정치’라는 말의 의미가 합의되거나 혹은 그 말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다면, 생산적인 논의보다는 서로에 대한 묵시적인 불만이나 갈등을 남겨둔 채 지도부에 의해 상황이 봉합될 가능성도 다분하다. 이런 의미에서 ‘기술적’ 쟁점 이면의 ‘근본적’ 쟁점을 짚어보는 것이 논의를 진전시키는 데 필요할 것이다.
우석훈과 박권일의 『88만원 세대』가 출간된 지 10년이 넘었다. 이 책의 의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기반한 정치적 주체로서 청년세대의 구성을 상상하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이는 호명된 청년 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청년세대론에 비평적으로 개입할 공간을 열어주고, 또 청년세대론을 기반으로 실험적인 운동을 펼쳐나가도록 만들었다. 물론 청년을 정치적 주체로상정하는 이 담론의 약점도 충분히 평가됐다. 대표적으로 청년세대는 ‘청년’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일 수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생물학적 연령에 기반한 세대 범주는 매우 그 독자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은 ‘텅 빈 기표’에 가깝다. 계급, 젠더, 인종 등의 사회적 범주들이 특정한 구조적 권력관계와 연결된 위치를 의미하는 반면, 일반적으로 세대는 독자적인 구조적 권력관계와 연결된 범주가 아니다. 물론 동일한 역사적 기억을 바탕으로 한 집합적인 세대 정체성(만하임)에서부터 생애주기에 따른 세대의 구분, 나이주의나 연공서열 등 한국사회의 구조적 권력관계, 기후변화로 인한 세대 정의 담론 등이 세대 범주를 구성하는 요인이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전통적인 사회학 범주에 비하면 ‘약한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청년 범주 내부의 이질성(계급, 젠더, 출신 지역 등에 따른)이 자주 지적되면서, 동질한 ‘청년은 없다’는 건 거의 합의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청년세대 담론과 연결되어서 운동적인 성과를 거두었던 흐름들을 짚어볼 필요는 있다. 청년세대의 당사자운동은 두 가지 정도의 흐름으로 거칠게 분류해볼 수 있다. 하나는 문화주의적 경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데, 사회경제적 약자인 동시에 문화적으로 ‘힙한’ 청년을 강조하면서 독특한 운동적 실험을 전개해온 흐름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경제적 약자로서의 청년의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받고자 노력해온 흐름이 있다. 양자가 일정하게 뒤섞여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다.
오늘날 결과론적으로 평가한다면 이 두 흐름은 각자의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다. 전자인 문화주의적 경향은 꽤 탈정치적인 경향으로 나아갔다. 사회 구조적인 힘에 정치적으로 대항해 제도를 변화시키는 방향보다는 특정한 문화적 코드를 공유하는 소수의 게토를 건설하는 데 머무른 감이 있다. 이는 서울에서 향유되는 중산층의 문화적 코드이기도 했다.
사회경제적 권리의 제도화를 지향했던 후자의 경향은 청년의 사회경제적 권리를 진전시키는 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청년세대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만들어내는 ‘보편적 불평등의 구조’를 가시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는 청년의 경제적 고통을 강조했던 청년세대 담론 그 자체의 한계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청년세대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강조하면 할수록 그 사회경제적 문제가 청년이라는 (상상된) 정체성에 귀속되는 ‘특수한 경험’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 형태는 다를지언정 불평등의 구조 아래에서 다수의 사람들은 사회경제적인 고통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고통을 만들어내는 불평등의 구조가 보편적인 ‘사회적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놓치게 되는 순간, 청년세대론은 제로섬 게임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공정성 담론이나 ‘청년 남성’이라는 자의식에 갇혀 자신의 고통만을 강조하는 안티페미니즘을 합리화하는 데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두 운동적 흐름은 제도 정치의 영역에서 중요한 성과를 남겼다. 우선, 청년들의 다양한 운동적 실험이 일정한 제도적 보장 아래에서 이뤄질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청년 허브’나 ‘혁신 파크’로 상징되는 이 제도들은 사회적인 활동에 관심을 가진 청년들이 도전하고 실험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었다. 둘째로, 현재 청년들의 사회경제적 권리 보장은 ‘청년기본법’으로 상징된다고 할 수 있다. 청년 ‘담론’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청년들에 대한 제도적 권리 보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며, 청년발전기본법이 청년들의 사회적 임파워먼트와 실험적인 활동의 기반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하다. 청년의 사회경제적 권리 보장의 흐름은 부정되기보다는 청년 정치라는 다음 번 스텝을 위한 ‘기반’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셋째, 앞의 두 흐름과 연결된 것으로서 서울시를 시발점으로 하여 청년정책을 위한 제도적 공론장을 형성한 것은 중요한 성과다. 청년정책을 위한 공론장을 통해 청년 활동가들의 정치적 훈련과 상호 네트워킹, 그리고 제도와 운동 간의 선순환 모델을 만들었다는 점은 괄목할 성과다. 특히 논의된 정책들에는 단순히 개별 사회경제적 보장만을 넘어서는 포괄적이거나 급진적인 내용이 담겨 있기도 하다.
이는 기존의 제도 정치에서 ‘청년’을 소비해온 방식에 대한 비판과 반성의 맥락을 포함하고 있다. 가령 기성정당의 ‘아재 프로듀서’들의 심사를 거쳐 비례후보 자격을 얻어낼 수 있었던 과거 민주당의 청년 후보 선출 방식은 그야말로 청년이라는 이미지를 소비하고 청년을 대상화하는 한 전형을 보여주었다. 이는 소속 정당을 막론하고 당 내 활동에 매진해온 청년들이 기성 정치의 동원부대 이상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과 맞닿아 있다. 청년당이라는 실험도 존재했지만 그 역시 ‘청년=새로움’이라는 이미지에 기댄 채 ‘청년’의 내용을 채우지 못했고, 이는 곧 기존의 대상화된 청년의 상을 그대로 수용한 것에 불과했다. 이후 청년정책네트워크의 구성과 활동은 이러한 ‘청년 정치’의 한계를 넘어 상당히 진일보한 고민과 성과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모든 성과들은 진보정당의 것이 아닌 박원순 서울시의 것이었다. 즉, 의지의 문제이든 여건의 문제이든, ‘청년’이라는 기표의 상징성은 지금까지 박원순 서울시가 주도해왔다. 진보정당은 새롭게 생겨나는 사회운동을 포용하고 그 운동을 통해 정당정치의 혁신을 추동해내지 못한 채 그 주도권을 뺏겨버렸다. 어쩌면 이로 인해 청년세대 운동이 더 왼쪽으로 급진화될 수 있었을 가능성이 약화됐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다른 정당과 마찬가지로 진보정당 역시 청년세대론을 통해 청년들을 자신들의 동원부대로 이용하고자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결과적으로, 청년세대론으로부터 청년 활동가 층이 형성됐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청년세대가 집단적인 정치적 주체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 청년들은 광범위한 대중적 동원과 조직화를 통해 독자적인 의제와 전망을 내포한 집단적인 주체가 되진 못했고, 이는 앞서 지적한 청년세대 담론의 내재적 한계 때문이기도 했다. 청년 범주 그 자체의 독자적인 내용이 없는 가운데 청년들의 사회경제적 고통의 특수성을 강조함으로써, 집합적인 정체성의 형성 대신 개인의 자아가 (상상된) 피해자 정체성으로 침몰해버렸다. 그 피해자 정체성은 적극적인 권리와 사회 변화를 요구하는 대신 개인의 ‘손해’에만 예민하게 반응해 ‘공정성’을 외치는 신자유주의적 자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청년세대론의 한계를 다소간 돌파해낸 것은 페미니즘 리부트라고 볼 수 있다. ‘영영 페미니스트’들이 청년이라는 기표를 얼마나 자신들의 것으로 인정하는가와 별개로, 기존의 청년세대론이 고대했던 청년세대 내부의 집합적인 정치적 주체의 형성이 이뤄진 것은 분명 사실이다. 청년 정치는 각 정치세력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동원부대로서 청년을 지속적으로 호명했던 기반 위에서 전개됐던 반면, 페미니즘 리부트는 아예 ‘바깥’에서부터 제도를 뒤흔들면서 스스로를 가시화했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주체화하면서도 동시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청년세대론이 처했던 딜레마적 난관을 돌파해버렸다. 나아가 최근의 몇 달간의 조국 사태는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하여 계급적 박탈감과 분노를 폭발시키는 계기였다. 이러한 계기들에서 터져나온 목소리는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되 그 내용은 청년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인 불평등과 권력관계라는 구조적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제도 정치의 차원에서 본다면 이런 목소리들은 기존의 87년 체제가 담아내지 못한 채 파열하는 지점에서 분출되고 있다. 나는 87년 정치 체제의 핵심적 성격을 제도화된 보수정당과 민주정당 사이의 ‘적대적 공존’으로 규정한다. 이는 양대 정당이 서로에 대한 적대를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함으로써 정치 체제를 재생산하고, 동시에 그러한 정치 체제가 대변하지 못하는 목소리들을 배제하면서 제도화된 영역에 속한 존재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메커니즘이다. 그리고 이 정치 체제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은 위기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더 이상 산업화 서사도 민주화 서사도 그 도덕적(헤게모니적)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두 서사를 통해 자신의 삶과 사회를 이해하는 이들은 양 진영의 적극적인 지지자들일 뿐, 두 서사 어느 쪽도 자신의 언어가 아님을 자각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다.
이 지점에서 ‘낡은 정치의 탈정치화 효과’가 발생한다. 기성의 두 정치세력 중 어느 쪽도 ‘나의 정치’가 아니며 두 서사 모두 ‘나의 언어’가 아니지만, 적대적 공존의 구도 하에선 어느 한쪽을 택하며 다른 쪽을 비난하는 것이 정치에 가담하는 방식의 ‘전부’인 것처럼 이해하게 된다. 그렇기에 자신의 언어를 찾을 수 없는 이들은 침묵, 냉소, 탈정치화를 택한다. 즉, 제도 차원에서 유력한 정치 세력을 지지하는 일과 정치의 ‘전부’를 구분하지 못한 채 두 범주를 동일시함으로써 탈정치화가 발생한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적 참여란 주류이고 기득권처럼 보이는 한쪽을 문제 삼으면서 반대편 진영에 가담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두 세력, 두 서사 중 어느 쪽도 지배 헤게모니의 지위를 확고하게 확보하지 못하고 그 정당성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우리에겐 이분법이 아니라 삼분법이 필요하다. 두 정치 세력의 언어와 서사 모두 나의 언어가 아닐 때, 제3의 대안을 구성하는 정치가 긴요해진다. 가령 그 대안의 가능성으로 주목받았던 사례 중 하나는 정치 퇴물이 되어버린 안철수다. 개인이 아닌 세력으로서 안철수의 가장 큰 한계는, 1차원의 수직선 좌표에 보수와 진보를 설정하고 그 중간 지대를 자신의 영역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삼분법이 아니라 이분법으로 대변되지 않은 정치적 열망을 가둬두는 것에 불과하다.
다른 대안으로는 진보정당이 있다. 그러나 보수 정권기부터 지금까지 진보정당은 낡은 이념과 인적 관계(패거리)로 인해 그 내적 역량을 축적하지 못한 채 기성 정치세력과 마찬가지로 그 도덕적 정당성을 상실해왔다. 그 와중에 ‘제3세력’과 ‘민주대연합’ 노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87년 체제의 ‘이분법 구도’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국사태에서 보여준 정의당의 모습은 이런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증명한 셈이었다. 그렇게 87년 체제는 위기에 돌입했는데 여전히 다른 정치의 가능성이 잘 보이지 않는 안개 같은 국면이 지속되는 중이다.
나는 정치 체제 차원의 이런 구조를 ‘과두제’로 명명하고자 한다. 정치사회학자 로베르트 미헬스는 서구의 정당과 노동조합을 분석하면서 초기의 대중적인 동원과 참여 민주주의에 의해 건설된 조직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형성된 엘리트와 관료들에 의해 그 조직의 운영이 이뤄지고 의사 결정이 주도되면서, 엘리트와 대중 사이의 거리가 벌어지고 대중이 수동적으로 변하는 ‘과두제’ 현상이 발생한다고 진단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조직에서 과두제는 피할 수 없는 철의 법칙이다. 한국의 정당과 노동조합들에서도 이러한 과두제 경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계속 관찰할 수 있다. 나아가 조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 이른바 86세대로 표상되는 민주화 세력이 정치, 학계, 시민사회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과두제’의 주인공이 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진보진영도 피해가지 못하는 문제다. 87년 체제가 지속됨에 따라 한국사회는 말하자면 노년세대(산업화)와 장년세대(민주화) 엘리트 간의 권력 경쟁이 30년 이상 이어지고 있으며, 청년세대들은 각 분야에서 주로 ‘말석’을 차지하며 여러 자원과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요컨대 ‘과두제 사회’인 셈이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낡은 것은 죽어가는 데 새로운 것이 태어나지 않는 상황”을 ‘유기적 위기’라고 명명했다. 이때 태어나야 할 새로운 것을 우리는 ‘대항 헤게모니’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람시는 유기적 위기와 대항 헤게모니 형성과 관련해 “젊은 세대의 문제”를 언급했다. 이것을 오늘날의 용어로 바꾸면 ‘세대교체’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정치 영역에서의 세대교체란 단순히 젊은 정치인들로 인적 구성이 변화하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대항 헤게모니’를 구성하는 집단의 출현을 의미한다. 즉, 세대교체는 활동가와 정치인들이 기존에 정치와 관계 맺는 방식의 변화를 바탕으로 하는 정치와 사회가 맺고 있는 관계의 변화, 역사를 이해하는 관점과 사회를 민주적으로 통합해내는 방식의 질적 변화를 포함하는 의미다. 요컨대, 정치에 대한 다른 관점과 태도를 가진 새로운 세대들이 정치를 바꿈으로써 이 세계를 바꾸어내는 것. 그것이 세대교체의 의미다. 단순히 청년이 정치인이 되는 것으로, 청년들의 삶의 문제를 개선하는 것으로 청년 정치를 받아들인다면 이는 청년 정치의 의미에 대한 부분적 이해에 불과하다. 이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청년 정치가 호출되는 맥락을 피상적으로 이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대교체의 구체적인 의미를 수없이 나열해볼 수 있고, 청년세대는 이 사회의 위기의 징후들을 살아내고 있는 중이다. 다만 여러 청년 당원들의 이념, 노선, 관심사의 차이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나는 세대교체의 내용을 독자적으로 채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여기서는 나의 개인적인 문제의식만을 언급해보겠다.
세월호 참사는 국가와 사회가 얼마나 무책임한지를 절감하게 했다. 대한민국이란 국가는 언제든 아무런 이유 없이 국민을 버릴 수 있는 폭력적인 존재이며, 개인이 위험에 빠졌을 때 국가도 사회도 그 누구도 그 개인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한쪽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그 두 세력 모두가 적당히 타협하고 재생산해온 ‘체제’의 문제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들은 계속해서 온갖 종류의 젠더 폭력에 ‘개인’으로 맞서면서 사회와 국가의 마땅한 응답 책임을 요구해왔다. 그 용감한 목소리는 기존의 정치 세력들을 포함해 이 사회가 전체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착취를 통해 성립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했지만, 그러나 여성들은 여전히 변화가 잘 보이지 않는 전쟁 같은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 이 사회의 도덕적 정당성 자체가 붕괴되고 있는데, 고작해야 ‘박근혜 수호’ 아니면 ‘조국 수호’ 따위에 집착하는 정치 세력에게 무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야말로 거대한 해일이 밀려오는 와중에 조개나 줍고 있는 중이다.
청년 정치는 바로 이런 ‘유기적 위기’의 시대에 요구되는 대항 헤게모니 구성과 관계 맺는 ‘세대교체의 정치’가 되어야 한다. 앞서 청년 문제를 넘어 보편적인 불평등과 권력의 구조를 쟁점화해야 한다고 지적한 것처럼, ‘청년’ 범주는 특수한 당사자로서의 청년이 아니라 여러 가지 구조적인 문제들을 아우르는 대항적 주체의 구심으로 설정되고, 총체적으로 연결된 구조들의 변형을 그 정치적 전망으로 갖는다. 이는 곧 ‘청년 문제’ 그 자체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불평등, 계급계층의 문제, 젠더 권력관계 등을 포함하는, 이 사회에서 배제된 이들의 목소리들이 환류되는 통로이자 결집되는 구심으로서의 ‘청년’ 정치를 제안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인적 구성의 변화가 아니라 헤게모니의 교체로서의 ‘세대교체의 정치’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보수/민주의 양분 구도 중 하나를 택하거나 보수와 민주 중간지대를 세력화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거부하며, 이런 시도들이 외면하고 배제해온 것들에 주목함으로써 새로운 정치 구도를 형성하려는 기획과 연결된다. 바야흐로 사회가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며 수많은 사람들, 제도, 문화를 낡은 것으로 만들어가는 시대다. 바로 이 시대에 대한 감각에 기초해 낡은 시대적 감각을 대체하는 정치가 등장할 때가 됐다.
그렇다면 왜 하필 진보정당, 그중에서도 정의당인가를 물을 수 있다. 이는 긴 답변을 요구하기에 상술하는 것은 힘들지만 간단하게 요약해볼 수 있다. 지금의 86세대 정치인과 그들의 민주화 서사는 아주 과잉 대표된 것이라,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싸워온 다수의 사람들은 사실 그 서사와 상당히 거리가 있는 역사를 살아왔다. 그렇게 주류의 서사로부터 밀려난 이들이 제 목소리를 드러내고자 몸부림쳐온 투쟁의 일부로서 진보정당이 존재한다. 세대교체는 어떤 기반도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서사에 배제된 사람들의 역사와 운동을 계승함으로써 새로운 서사를 발굴해내는 과정이다. 물론 이것은 기성의 진보의 한계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들은 청년 정치의 ‘내용’을 채우기 위한 나름의 시도였다. 나는 반드시 이 내용이 그대로 관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논의를 촉발시키기 위한 초안 정도로 이해되길 바란다. 오히려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나를 포함하여 정의당의 청년 활동가들이 청년 정치의 방향과 내용에 대한 일정한 합의를 형성해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합의된 청년 정치의 내용을 기준으로 삼아 청년 정치의 활성화를 위한 구체적인 전술이 제기되고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개별 청년 정치인의 의회 입성이 청년 정치의 거의 전부로 논의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것은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문제다. 청년 ‘정당정치’에 대한 장기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청년 정치인의 의회 입성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나아가 총선에 임박해서야 이런 논의가 당 내부에서 제기된 것 자체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금 이런 문제제기가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청년 정치를 청년의 의회 입성으로만 국한해온, 청년 정치에 대한 장기적 관점을 만들어오지 못한 책임을 자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총선 대응 이상으로 장기적인 청년 정치의 내용을 채워내지 못한 당 전체의 부족함을 반영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바로 지금 여기서 청년 정치에 대한 논의를 세대교체를 위한 정치의 시동을 거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2020년 총선 출마는 (우리가 앞으로 그 내용에 합의한다면) ‘청년 정치’의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어떤 후보가 거기에 적격인가. 경선 과정과 선출 제도는 어떤 방식이 ‘청년 정치’를 활성화하는 데 더 유리한가. 총선을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고 어떤 식의 기획이 총선을 청년 정치를 위한 계기로 삼는 방법인가. 청년 정치의 내용이라는 근본적인 쟁점에 대한 논의가 정리된다면 그 다음 던져볼 수 있는 물음들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