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김창인(민주적 사회주의자 대표)
청년정치의 개념적 목표가 ‘청년을 정치적으로 재구성하기’라면, 구체적인 목표는 ‘새로운 인적구성의 정치세력화’이다. 또한 청년정치는 전략·전술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당위의 측면에서는 청년정치를 정당화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반드시 청년정치를 해야 한다’라는 명제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구속되지 않고, 중단기적 전략·전술의 차원으로 청년정치를 제안하고자 한다.
청년정치가 뜻하는 의미는 크게 3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는 청년들이 제도정치에 참여하는 것, 둘째는 청년세대를 대변하는 정치를 하는 것, 셋째는 청년들의 삶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 가지가 전부 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청년들이 제도정치에 참여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면, 굳이 청년들이 정치를 할 필요는 없다. 성소수자-노동자 등 국회가 대표하지 못하는 당사자 혹은 정체성이 한 둘도 아니고, 다른 계급이나 계층에 비해 청년이 우선적으로 대표성을 확보해야 할 이유가 마땅히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년세대를 대변하고자 한다면, 그 청년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한 규정이 필요한데, 이것이 참 어려운 일이다. 일단 나이를 기준으로 한 청년에 대한 정의는 자의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한계가 명확하다. 20대만 청년인지, 19세부터 40세까지 청년인지, 청년을 말하는 사람들마다 다르다. 또한 청년이라는 정체성이 가진 특수성도 무시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청년이 될 것이고, 청년이거나, 청년이었다. 이에 청년의 당사자성은 쉽게 주목받기 편한 만큼, 쉽게 거부되거나 중요하지 않게 치부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렇듯 단일한 정체성으로서 청년의 구성이 쉽지 않은데, 어떻게 그들을 대변할 수 있을까?
청년들의 삶을 위한 정치도 매한가지다. 청년은 약한 정체성이다. 만약 여성인 청년이라면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노동자인 청년이라면 노동자라는 정체성이, 대학생이라면 어느 학벌군에 속해있는지가 그 개인의 삶을 규정하는데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에 청년이라는 구호는 호소력이 부족하다. 대학생 청년, 노동자 청년, 지역에 사는 청년, 성소수자 청년, 이주민 청년 등 같은 청년이더라도 삶의 조건이 모두 다른데, 도대체 어떻게 이들 모두의 요구를 수용하는 정치가 가능하단 말인가. 이는 마치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기성 정치인들의 허무한 구호와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정치를 호명하고, 이를 위해 헌신할 수 있다. 청년세대의 삶의 조건이 기성세대에 비해 어려운 것은 사실이고, 현실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 또한 명백히 존재한다. 이를 바탕으로 청년인 정치인이 청년세대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면서 청년들의 삶을 개선하겠다고 정치에 뛰어들 수 있다. 하지만 이조차도 명확한 한계가 존재한다. 바로 ‘청년’정치라는 말이 가두는 틀 안에서만 기능한다는 것이다. 이는 청년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이미지에 국한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과 청년의제라고 불리는 몇 가지 사안들에 주력해야 한다는 점으로 나뉘어 이야기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청년은 주로 새로움, 신선함, 톡톡 튀는 아이디어, 에너지와 열정, 겁 없는 도전과 패기 등의 이미지로 소비되어 왔다. 그래서 정치판 안에서도 청년정치인에 기대하는 역할이 이러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형성되곤 한다. 그리고 이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청년답지 못한 것’으로 취급되며 존재의 이유가 사라지도 한다. 실제로 진보정당 안에서도 청년당원들의 역할은 오랫동안 선거 때 유세단이라는 활동을 통해 유세송에 맞춰 춤을 추는 율동을 전담하는 것에 그쳤다.
청년정치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청년의제로 국한된다는 것도 문제다. 이는 청년정치의 역할이 청년의제의 해결이라는 한계선을 그어놓고, 그 이상의 논의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소비되는 청년 이미지가 매우 제한적이고, 여타 주요한 문제들을 은폐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복합적인 사회문제를 단순히 청년으로만 대상화하여 청년문제로 둔갑시키는 경우가 있다. 소위 지옥고(반지하, 옥탑방, 고시원)에 사는 청년들의 주거문제를 해결한다고 했을 때, 이는 한국사회의 부동산 문제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런데 이를 청년세대만의 고유한 문제로 설정한다면, 본질적인 해결이 불가능해지거나 방향이 잘못되기 십상이다.
이에 ‘청년은 없다’는 논의가 등장하고 있는 시점이다. 이 또한 유의미한 논의지만, 청년이 없다는 결론이라면 청년정치는 애초에 시작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청년정치를 전제로 두고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사회적으로 구성된 청년이 잘못되었으며, 새롭게 청년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방식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미 존재하는 ‘청년이라고 부르는 넓은 범주’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을 수 있다면, 굳이 청년이라는 개념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 즉, 우리는 ‘청년을 대상화하지 말라’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청년을 대상화해야 한다. 청년정치를 청년과 정치를 더하는 개념이 아니라, 정치의 일부이자 하위 전술로 규정하고자 한다.
반드시 청년정치일 필요는 없다. 이는 선택의 문제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사회운동은 당사자 운동의 성격이 짙다. 이에 대한 비판을 제기할 수 있지만 비판한다고 해서 정치적 기반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모든 당사자 운동이 보편을 지향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본래 노동하는 존재라며 보편성을 말하고, 소수자가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 차별이 사라진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당사자 운동도 보편을 지향할 수 있다. 당사자성을 내세우는 운동은 그 당사자들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당사자성을 기반으로 삼아 정치적 기반을 만들고 이를 통해 사회 전반의 변화를 말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청년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청년정치의 특수성은 청년이라는 개념에 무엇을 담을지가 정해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각자가 원하는 내용을 청년에 담아 청년정치를 주장할 수 있다. 물론 그 원하는 내용을 반드시 청년에 담을 필요는 없다. 다만 청년정치가 대두되고 있는 현재의 주어진 사회적 조건을 활용할 순 있다. 각종 미디어와 언론, 정치권은 청년정치를 거론하고 있다. 그들의 의도가 어쨌건, 이는 활용할 수 있는 시대적 조건 중 하나이다. 청년정치를 전면에서 거부하고 맞서는 선택지보다는, 이를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방식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청년정치라는 텅 빈 상자를 무엇으로 채워 넣을 지에 대한 논의다. 청년이라는 개념을 정치적으로 재구성하여 대상화하는 것이 청년정치의 전술이라면, 청년을 무엇으로 과대 대표할 것인가가 구체적인 청년정치의 전략이 되어야 한다. 이에 대한 선례는 86세대가 이미 보여준 바 있다.
오늘날 청년에 대한 대부분의 이미지는 다름 아닌 86세대가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만들었다’이다. 무엇을 통해? 바로 ‘정치’다. 물론 그들이 오랜 기간 계획적으로 마치 ‘청년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독재와 싸우면서 6월 항쟁까지 자신들의 청년기를 하나의 역사적 서사로 구축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서 86세대는 ‘정의로운 대학생’,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대학생’ 등을 이미지화했다.(당시에는 이러한 대상화 작업이 주로 청년보다는 대학생으로 나타났다) 이는 그들이 독재와 싸우기 위해 필요한 조건 중 하나였다. 이는 지극히 상징적인 작업이었다. 87년 6월 이전까지 도서관에 있었던 대학생이 많을까, 아니면 거리에서 분투하며 감옥에 가던 대학생이 많았을까? 따로 통계를 내보지 않더라도 전자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당시 대학생을 생각하면 모두가 데모하던 대학생을 떠올린다. 이는 자신들이 원하는 청년의 모습으로 청년세대를 대표하게 하는 것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들은 전대협, 한총련 등 청년들을 대표하는 정치조직으로 더 구체화되었다. 조직화 된 개인과 파편화 된 개인은 정치적 영향력에 있어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조직들로 인해 당시 청년들은 실제로 청년세대를 대표하느냐 마느냐를 떠나서, 스스로 ‘대표’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전대협 의장은 연예인들과 맞먹을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고, 뉴스에서는 한총련의 시위를 마치 전쟁을 방불케하는 광경으로 보도했다. 당시 정치권은 청년세대를 두려워했다. 오늘날 청년들이 한없이 안타깝고 불쌍하게 다루어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아직까지도 ‘청년’을 구성하는 힘은 86세대가 가지고 있다. 88만원 세대, n포 세대, 세월호 세대 등등 모두가 86세대의 이해관계에 맞추어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소위 ‘20대 개새끼론’이라고 불리는 방식으로 청년답지 못함을 탓하고 사실관계를 왜곡하려 한다. 문재인 정권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진 20대 남성 계층을 보수화되었다며, 그 원인을 페미니즘으로 짚는 행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86세대는 한국사회에서 매우 특수한 케이스이다. 세대적 동질감을 뚜렷하게 드러내며, 이를 권력화했던 유일무이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86세대의 힘은 바로 세대적 경험을 공유하고 이를 집단화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자신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이었어도, 딱 한 번 거리에 데모하러 나왔던 기억으로 6월 항쟁이 나의 역사적 승리가 되는 경험. 부당하고 부패한 정치판에 맞선 정치인 노무현을 위해 썼던 지지선언 편지 몇 장으로 대통령을 당선시킨 경험. 그리고 이 노무현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독재의 잔존세력인 박근혜를 몰아내고 문재인 당선시킨 복수의 경험. 이 모든 것들이 86세대가 공유하는 세대적 경험이다. 그래서 2016년 촛불 때도, 2019년의 서초동 촛불 때도 집회는 86세대의 동문-동창회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와 같은 세대적 경험을 기반으로 집단적으로 움직임일 수 있는 힘이 86세대에게는 존재한다. 지금에 와선 각 개개인의 사회적 위치로 인해 기업과 관의 주요 네트워크로 그 힘을 유지할 수 있으니 그 권력은 더 강고해졌다.
오늘날 86세대는 특정한 나이대가 아니라, ‘자유주의’로 표상되는 이념적 지향과 민주당 이라는 구체적인 정치진영으로 인식되고 있다. 만약 청년정치가 필요하다면 이러한 방식으로 구현되어야 한다. 승리든 좌절이든 같은 사회적 경험을 바탕으로 특정한 이념적 지향과 정치진영을 과대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청년정치가 반드시 ‘옳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청년정치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수단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면, 필요하다면 시도해볼 수 있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86의 방식을 우리 세대에 완전히 동일하게 적용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세대적 집단의 사회적 경험이 없지는 않다. IMF부터 세월호까지 신자유주의 시대에 성장한 지금의 청년세대의 특질,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다양한 사회문화적 변화에 마주하고 있는 현상 등 집단적 경험의 소재들은 이미 있다. 이를 정치화할 수 있다면 의미 있는 새로운 세대의 구성도 불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청년정치가 운동에는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한국사회에서 청년정치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이다. ‘88만원 세대’로 촉발된 세대론적 인식으로 기성세대 vs 청년세대라는 새로운 전선을 구성함으로서, 청년정치를 통해 새로운 정치적 성과를 얻어내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이는 학생운동이 몰락하는 시기와도 맞닿아 있다. 이에 각 운동진영은 학생운동이 약화된 현실에서 청년정치라는 구호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청년정치를 학생운동의 대체재로서 사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정치의 운동적 역할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본래 운동진영에서 학생운동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다루어야 한다.
한국사회의 초기 운동진영은 운동의 내용과 형식과 무관하게 그 핵심적 주체를 ‘노동자’로 설정했다.(민족통일운동의 주체도,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주체도 모두 노동자다.) 여기에 ‘농민’을 더해 노농 2주체를 기본방향으로 정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학생운동의 지위는 1.예비 노농 주체가 될 후비대와 2.엘리트 집단으로서 운동진영에 결합에 머물렀다. 그러나 4.19 혁명, 특히 5.18 광주와 6월 항쟁을 거치면서 학생운동은 한국사회 변화에 주축에 서있게 되었다. 이른바 혁명의 3주체라 불리는‘ 노농학’의 개념이 완성된 것이다. 학생운동 특유의 사상적 급진성은 실천에 있어 학생운동을 ‘후비대’가 아니라 ‘전위’로 만들었다. “공부만 하는 학생들은 뒤에 있어”가 아니라, 집회와 시위를 비롯한 물리적 투쟁에서도 학생운동은 스스로 선봉대를 꾸려 앞으로 나갔다. 민족통일운동에 있어 학생운동은 북에 자신들의 대표를 밀입국시켜 입장을 표명할 정도로, 급진적이었고 또 선도적이었다. 또한 예비 노동자의 지위를 넘어 자발적으로 수많은 ‘학출’들이 노동현장에 투신함으로서 노동운동을 계몽하고, 지휘하는 역할을 자처했다. 이 시기 학생운동은 한국사회의 투쟁 최전선의 지위를 능동적으로 확보했다. 이러한 학생운동은 86세대를 중심을 한 특수한 경험이었지만, 이후 한국사회의 성격을 규정할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아무리 망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운동진영에서 학생운동에 대해서 가지는 막연한 기대감이나 이미지는 그 후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민정부 이후 학생운동은 급속하게 몰락하기 시작했다. 새내기 새로배움터와 해오름제, 농활, 광주기행, 국토대장정 등으로 이어지는 학생회 싸이클은 그 안에서 성실히 참여만 해도 알아서 운동권으로 자라는 시스템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회는 학생운동이 강성했을 때는 엄청난 힘을 발휘했지만, 학생운동 조직들이 무너지자 대학 내 병폐와 구습이 되었다. 소위 ‘반권’들은 이러한 학생회를 운동권들의 ‘그들만의 리그’라는 프레임으로 비판했고, 탈정치와 반운동을 기치로 기존의 학생회 질서를 파괴했다. 이 시기 대학진학율의 급증과 경제위기 등의 요인으로 ‘대학생’이라는 당사자성이 엘리트 계층에서 이탈한 것 또한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2010년대 이후 학생운동은 당사자 운동의 성격으로 전환되었다. 사회 전반의 변화를 말하는 엘리트 집단의 운동이 아니라, 대학생이라는 집단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그 성격이 축소된 것이다. 2010년대 학생운동의 중심적 의제였던 ‘반값 등록금’과 ‘대학구조조정’ 등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더불어 기존 운동진영은 대학 내 정치세력화에 실패하기 시작했다. 전성기처럼 학생운동이 전체 운동판을 주도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운동진영에 복무하는 후비대의 역할마저도 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페미니즘 등 새로운 흐름에 발맞춰 기존 운동진영과 연관 없는 소그룹들이 대학 내에서는 자생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기존 운동진영이 시도하는 정치세력화는 이들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조건에 청년정치는 학생운동의 복원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그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가지고 있다. 이에 여러 운동진영은 청년정치에 주목하고 또 집중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왜냐면 지금의 운동진영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지금의 운동진영의 위기를 해결하는 방법은 둘 중 하나다. 기존 운동진영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것 혹은 새로운 운동진영이 등장하여 이를 기존의 운동진영을 대체하는 것이다. 여기서 후자의 방식은 흔히 ‘세대교체’라고 불려진다. 그런데 기존 운동진영이 접근하는 청년정치는 전자의 의도로 구현된다. 청년정치를 통해 기존 운동진영의 재생산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청년정치의 성격과 맞지 않는다. 기존 운동진영의 재생산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청년정치와 그 목표가 알맞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청년정치는 후자의 방식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에 적합하다. 이에 우리는 청년정치를 세대교체, 즉 ‘새로운 인적구성의 정치세력화’의 측면에서 말해야 한다.
한국사회를 규정하는 여러 성격 중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87년 체제는 그 자체로 낡았다. 한 때는 의미가 있었지만 이미 유통기한이 지났다. 그런데 현재 주류적 지위를 점하고 있는 운동세력들은 그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 87년 체제의 일부이다. 이에 새로운 인적구성의 정치세력화가 요구된다. 현재 기존의 운동진영과 무관하게 각기 활동하고 있는 여러 활동단위들을 묶어낼 수 있는 큰 틀로서 청년정치의 필요성을 제기할 수도 있다.
모든 정치는 그 주체와 거점을 필요로 한다. 학생운동은 그 주체가 대학생, 거점이 대학이다. 그렇다면 청년 정치는 어떨까? 이에 청년정치의 주체는 ‘특정하게 대상화된 청년(과대대표 되어 있는 이미지화된 청년)’이며, 거점은 ‘정당’으로 제안하고자 한다.
거점을 정당으로 제안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청년들이 물리적으로 구속되어 있는 생활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함께 일하는 직장이 있고, 대학생들은 대학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있지만, 청년들은 어느 한 물리적 공간에 모여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을 대상으로 조직화를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 무중력지대와 같은 청년공간들이 있긴 하지만 이는 정치적 공간이 되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이에 정당을 매개로 정치세력화를 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수단이다. 둘째는 우리가 하고자하는 청년정치가 이념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이념을 중심으로 청년들을 정치세력화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정당이 매개가 아니면, 느슨한 일상 커뮤니티 이상이 되기가 어렵다. 청년이 약한 정체성이라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정당이라는 정치를 업으로 하는 공간이 그 중심이 되어야 한다.
2020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은 청년정치를 무기로 2030세대의 표를 얻어내려 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청년정치는 기성정치의 재생산 도구가 아니라, 새로운 정치세력화의 무기가 되어야 한다. 이에 정당이 청년정치를 활용하게끔 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청년정치의 기반을 정당으로 삼아야 한다.
청년정치는 도달해야 할 목표 그 자체가 아니다. 그래서 지속가능한 장기간의 수명을 가지기 어렵다. 지금의 청년세대가 현 시대의 과제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한 과정에서 하나의 축을 담당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기꺼이 거부하지 않을 수 있다. 마땅히 우리 세대가 해야 할 과제를 다음 세대가 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는 청년정치의 모습으로 사회를 바꾸어 나가야 한다.
* 이 글은 12월 10일 (화) 민주적 사회주의자 내부 토론회에서 발표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