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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주적 사회주의자 Jan 04. 2020

[청년정치 기획연재5]새로운 정치와 청년정치인의 필요성

by 고준우(민주적 사회주의자 교육팀장)

* 본 글은 지난 2019년 12월 22일 국회에서 열렸던 청년국회의원후보 선출방안 토론회, "국민을 닮은 국회로 정치개혁!"의 청년할당제 찬성토론 발제문으로 제출되었던 내용입니다.


들어가기에 앞서 청년할당 제도의 위상     

제가 생각건대 본격적인 찬반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고민해봐야 하는 것은 청년할당이라는 제도가 갖는 위상입니다. 청년할당이 전체적인 정치 내지는 선거에 있어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느냐에 따라 청년할당의 중요도나 의미 역시 다르게 고찰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청년할당 제도의 위상은 그것이 하나의 전술이라는 것입니다. 정치의 기본을 무엇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견해에 다소간 차이가 있겠지만 어느 경우에도 적대와 경쟁이 정치의 중요한 구성요소라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의 사회를 둘러싸고 (복수의plural 이론에 입각한) 분석들, (복수의 이념에 입각한) 가치의 우선순위들, 그리고 그에 따른 (정책과 제도에 기초한) 미래 사회에 대한 청사진들이 충돌할 때 필연적으로 정치세력들은 경합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이견이 있는 상대방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한 싸움을 상정하게 됩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방법들의 체계적 구성을 우리는 ‘전략’이라고 부릅니다. 예컨대 총선전략을 세운다고 한다면 우리는 총선이라는 표 싸움에서 여타 정치세력에 비해 더 많은 득표를 함으로써 자신들이 내세우는 정치인을 당선시키기 위한 전반적 방향의 설정, 중장기적인 대책의 수립, 평가를 위한 합리적인 기준 마련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전략은 바로 이러한 필요에 대응하여 만들어지는 거시적 행동방법론인 셈입니다. 이때 전략은 세부적으로는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대응방법을 의미하는 전술들로 이뤄집니다. 연결해 말하면 전략은 서로 다른 전술들 사이에 통일성과 의미를 부여하는 체계이고, 거꾸로 전술은 전략의 구체적 상황에 대한 적용인 셈입니다.      


 다소간 군사주의적인 용어인 전략과 전술이라는 표현 대신에 우리는 이런 비유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전술은 바둑판 위 하나의 국지적인 판세에서의 개별적인 착수인 것이고, 전략은 바둑돌들의 전반적인 관계와 대립구도를 만들어나가는 전체 국면의 구상이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바둑기사가 전체 국면에 대한 구상 없이 함부로 돌을 내려놓아도 패배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돌이 대응하고 있는 구체적인 상황을 중심으로 전체 국면을 유연하게 재조정하는 창의성이 없어도 패배합니다. 또한 하나의 돌은 그 자체로 고유한 의미를 갖지 않고 다른 돌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부여받지만, 거꾸로 그 돌이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서 전체 관계와 돌들의 형세가 뒤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전술과 전략의 관계가 꼭 그러합니다.     


 청년할당이라는 전술도 그 자체로 본질적인 의미를 논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싸움에서, 모든 전략에서 청년할당이 동일한 중요성과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청년할당이 구체적으로 어떤 싸움에서 어떤 전략의 일부로서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 대응하여 나온 것인지를 알아야만 청년할당이라는 전술의 의미와 필요성을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이미 충분히 청년정치인들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풍부하게 갖춰진 국가에서 청년할당은 중요하지 않은 전술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청년정치인들이 많지 않고 기존의 정치제도가 정체된 상황에서 청년할당은 그 정당의 정체성과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하나의 효과적이고도 중요한 전술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청년할당제에 대한 제 입장 역시 이러한 맥락을 따라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청년전략의 중요성과 의의     

 먼저 정의당이 지향하는 가치와 이념으로부터 전략의 당위를 이끌어낼 수 있겠습니다. 정의당은 강령에서 끊임없이 혁신하고 진화하는 진보정당이 될 것을 표방하고 있으며, 당헌 제2조(목적)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개혁을 정당의 목적 중 하나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정의당이 총선에서 전략으로서 채택하고자 하는 것은 청년전략, 호남전략, 브랜드전략, 무지개전략입니다. 이들 전략 중에서 호남전략과 브랜드전략은 보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정의당의 장기적인 정치적 거점과 자산을 확보할 것이냐는 질문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청년전략과 무지개전략은 정의당의 지향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어떻게 기존의 민주주의가 대표하는 데에 있어 실패하고 있는 사람들을 의회로 불러들임으로써 민주주의를 새롭게 탈바꿈시키는 정치개혁의 목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정의당이 지향하는 바가 투명인간들에게 정치적 목소리를 부여하고 그들이 주체가 되어 사회를 보다 민주적으로 개혁하는 것에 있다면, 그런 의미에서 청년전략은 필요합니다. 통계청의 「인구총조사」 자료에 따르면 전체 인구 51,629,512명(약 5200만 명) 중에서 정의당이 청년으로 보는 만35세 미만 인구는 19,660,495(약 2000만 명) 정도로 전체 인구에서 약 38퍼센트를 차지하며, 국회의원 피선거권이 인정되는 만 25세 이상으로 한정하더라도 39,491,173명(약 4000만 명)의 인구 중 10,966,899명(약 1100만 명) 정도가 만35세 미만 인구로 약 28퍼센트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현재 국회의 구성은 어떻습니까? 국회의원 300명 중 ‘만 45세’를 청년의 기준으로 잡아도 19명, 약 6.33퍼센트만이 청년의원입니다. 38퍼센트 내지 28퍼센트라는 수치에 턱없이 미달하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정치개혁이라는 것이 국민의 의지를 보다 대변하고, 국민들이 특정한 삶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경험세계 내의 문제들을 보다 활발하게 공적으로 논의하고 해결하도록 촉진하는 것이라면 현재의 이 비정상적인 청년의원 비율을 적극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국민을 닮은 국회”를 만들겠다는 정의당의 국민에 대한 약속과도 궤를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내지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현재 국회에서 대변되지 못하는 정체성이 비단 청년뿐이냐는 것입니다. 여성, 장애인 등 현재 정의당의 총선전략에서 ‘전략’의 차원에서까지 논의되지 못한 소수자 정체성은 다양한 데 왜 청년에게만 특권을 주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청년전략을 구체적인 싸움을 맥락으로 하는 전략의 위상으로서 이해하지 않고 고정적이고 불변하는 물질성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제기되는 반론입니다. 싸움이 처해있는 현실적 존재조건에 따라서 전략은 변경되거나 수정될 수 있고 나아가 핵심적인 전략의 축은 유지하되 전술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다변화함으로써 가치들을 포용하고 연결시킬 수가 있습니다. 예컨대 현재 청년할당에 대한 안에서 여성에 대한 비율을 참고하여 반영하는 것이 이러한 전술적 차원에서의 고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필 왜 청년이 전략의 축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당위 이상의 답변이 필요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은 전략의 현실적 유효성이라는 측면에서의 답변입니다. 목적에 부합하는 방향성을 갖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목적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지가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맥락에서 청년전략에 요구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목적은 총선이라는 당락의 결과가 뚜렷한 싸움에서 청년을 내세우는 것이 당에게 어떤 도움을 주느는 것입니다.     


 먼저 청년전략은 정의당이 표방하는 혁신과 진화라는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이 됩니다. 유권자들이 모든 후보자들이나 정치인의 정보를 숙지하는 것은 인지자원을 지나치게 낭비하는 일이 됩니다. 결국 유권자들은 정당에게 부여된 상징성 내지 가치를 중심으로 투표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정의당은 (故 노회찬 의원님의 불판의 비유에서 잘 드러나듯이) 양당정치의 낙후성을 넘어설 정치의 혁신과 진화의 가치를 일관되게 표방해온 바 있습니다. 이때 혁신과 진화란 필연적으로 새로운 것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때, 대중들은 정의당에게 기존의 정치세력에게 표를 던지는 것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는 새로운 것을 기대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치에 있어서 새로운 것의 출현은 다양한 방식으로 포착할 수 있는데, 새로운 정치적 이슈가 출현할 수도 있고 새로운 정치적 관계와 주체가 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청년세대는 이들 모든 영역에 있어서 중요한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청년주체는 새로운 정치적 이슈와 직결되는 상징성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이는 오늘날 불거지고 있는 세대 간 정의라는 문제에 있어서 더욱 도드라집니다. 예컨대 기후위기에 대한 문제에서 우리는 청년주체가 갖는 고유한 지위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2003년생 그레타 툰베리 씨의 연설이 최근 세계적인 반향을 이끌어냈다는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만약 툰베리 씨의 자리에 환경운동에 오랜 시간 몸담아온 유명인사가 있었다고 해도 툰베리 씨만큼의 울림을 주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핵심은 시간의 흐름이라는 객관적 조건 속에서 서로 다른 시대를 청년기에 경험했다는 경험세계의 차이가 곧 특정 사회문제에 대한 문제의식과 공감의 정도를 바꿔놓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객관적인 정의의 관념에 비추어 보더라도 후속세대와 기성세대 사이의 정당한 몫의 분배 차원에서 기존의 현상에 문제제기하고 정의의 실현을 요구하는 쪽은 아직 충분히 사회를 살아가지 못한 (다시 말해 기대수명이 더 오래 남아있어 특정한 삶의 조건을 더 오래 감내해야 하는) 후속세대가 됩니다. 기성세대가 사회를 보다 불평등하고 살기 어려운 환경으로 만들수록 그 피해에 보다 장기적으로 누적적으로 노출되는 것은 후속세대입니다. 이러한 후속세대의 대변자로서 청년세대는 특정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보다 여타 세대에 비해 더 적합한 대변자이자 급진적 사회주체로서 자리매김할 가능성을 갖게 됩니다.      


 여기서 구태여 ‘가능성’이라 말한 것은 물론 이와 같은 급진적 사회주체로서의 청년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것에 언어와 가치를 부여하는 담론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정당이 그와 같은 담론을 형성하는 노력을 함께 기울인다는 전제 하에서, 정의당이 지지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개혁이라는 당위에 비추어 보아 청년주체를 내세우는 것만큼 대중들에게 정당의 정치적 입장을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전략이 있겠습니까.     


 지금 이 정세에서 또한 정의당이 적극적으로 청년전략을 채택한다는 신호는 정의당이 서초동 집회와 태극기 집회 중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찾을 수 없었던 투명인간들의 편에 설 것임을 천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청년이 현재 불평등 이슈가 첨예화되어 폭발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불평등의 문제는 청년세대에 있어서 더욱 극대화된 형태로 체험되고 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이 저성장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불평등에 대한 민감도가 상승했기 때문입니다. 고성장 시대에는 일자리가 확장되는 속도가 빠르다보니 사회적 이동성이 높습니다. 경쟁을 통한 수직적 사회이동이 활발한 만큼 같은 계층적-계급적 입장을 점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동질감이나 유대감은 줄어드는 반면에 전체 사회체계에 있어서의 불만은 개인 수준에서 통제됩니다. “옆집 누구누구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번에 어디 취업했다더라, 무슨 고시 붙었다더라”식의 이야기가 가능해지고 그만큼 개인이 감내하는 경쟁의 비용이 ‘출세를 위해 당연한 것’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경쟁적인 환경이 사회적 연대를 붕괴시켰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연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개인이 자신의 삶이 위기에 처했을 때 정서적·물질적으로 의탁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망입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사적 부양의무를 지는 가정, 공적 부양의무를 지는 국가,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개인의 사회적 관계를 아우르는 것입니다. 사회적 연대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을 때 개인은 불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쟁을 강조하고 각자도생의 합리성만 강조하는 사이 한국 사회의 사회적 연대는 실종되었고 이 사실을 무엇보다 가장 직접적으로 체감하고 있는 것은 청년입니다. 장기화된 저성장 속에서 성장한 탓에 이러한 만성화된 삶의 불안이 더 이상 개인이 출세를 위해 감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청년세대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서초동 집회나 태극기 집회에서 청년을 찾아보기 힘든 것입니다. 서초동 집회나 태극기 집회는 특정한 정치적 인물들에 대한 지지를 말할 뿐 상실된 사회적 연대로 인한 고통을 해결하는 데에는 무신경하기 때문입니다.     


 올해 정의당은 부동산 소유, 자녀 학벌 세습 등 각종 법의 테두리 내에서의 특권을 누리는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에 직면하여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함으로써 한동안 지지율 침체기를 겪은 바 있습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정의당에게 실망했던 점에는 (대부분의 경우 공정한 경쟁이라는 이전 세대의 수직적 사회이동의 경험으로부터 탄생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상은 사회적 연대의 상실로 인해 불안과 슬픔을 떠안아야 하는 청년들의 현실적 존재조건이 있습니다. 정의당은 청년전략을 통해 바로 이 지점에 말을 걸 수 있는 것이고, 이를 통해 기성세대의 정치언어에서는 충분히 문제되지 않았던 (공정한 경쟁 아닌사회적 연대의 담론을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이 연대야말로 기존의 사회적 관계들을 복원하고 한 개인이 경쟁에서 도태되어 비참하게 죽지 않아도 된다는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며, 그 첫 단추는 그 연대의 상실을 소비주의적 문화(YOLO) 등을 통해 우회적으로 해소할 수밖에 없는 청년들에게 정치라는 확실하고 강력한 도구를 쥐어주는 것입니다.

현재 정의당에서는 2020 총선을 앞두고 청년할당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청년할당이라는 구체적 전술의 필요성

 그렇다면 청년전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살펴보았으니 그 전략의 구체적 전술로서 청년할당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청년 주체를 정치에 진입시키는 것이 중요한 건 알겠는데 왜 하필 할당제를 통해서 그렇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인 것입니다.     


 이유는 명료하고도 단순합니다. 지금껏 청년세대에게 정치적 자원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저성장과 고성장 시대의 차이점이기도 합니다. 기득권을 가진 기성세대 정치인들의 경우에는 학력, 직장(ex. 검찰), 조직화된 운동의 경험 등을 통해서 자신들만의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성장 시대에 일상화된 경쟁을 감내해야 하는 청년들에게는 이런 인적 네트워크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주변에 고위 당직자인 청년도 찾기 쉽지 않고, 청년 국회의원은 더더욱 적습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청년실업의 문제가 본격화된 지 10년이 지나는 기간 동안 청년은 정치에 도전할 만큼의 경제력을 갖추기도 어려워졌습니다. 경제력이 없다는 것은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조직하고 자신의 인적 네트워크이자 자원으로 삼을 수 있을 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다른 활동에 전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선거에 들어가는 각종 비용을 감내할 수도 없습니다. 선거운동원들에게 지급할 돈도 없고 모일 사람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대 간 연대를 말하며 다른 모든 유권자들을 설득시켜야 된다고 말하며 청년들에게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현재의 기울어진 대표성을 수정할 마음이 없다고 공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연대는 대등한 조건에서 이뤄지는 주체들 간의 결속입니다. 대등한 조건을 갖춰주지도 않고 결속을 내세우는 것은 특정 집단이 특정 집단에게 예속되거나 시혜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을 포장하는 말이 되기 쉽습니다. 달라진 시대적 조건 하에서 정치적 자원을 갖추기 힘든 청년들에게 지금이라도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후속 세대에서는 청년할당에 의존하지 않고도 충분히 역량 있는 청년정치인들이 다수 배출될 수 있는 상황을 유도해야 합니다. 마중물을 붓지 않고 샘물이 솟아오르기만을 기다려서는 샘물이 마르기 전에 우물을 이룰 수 없는 셈입니다.     


 정치의 어떤 측면은 축구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축구클럽의 비유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세계 유수의 축구클럽들은 최소한 세 가지 조건 중 하나 이상을 반드시 만족하는 축구클럽들입니다. 첫째는 돈이 많은 축구클럽입니다. 이런 클럽들은 실력이 검증된 유명선수들에게 주전 자리를 보장하고 사들여오면 됩니다. 정당에 비유하자면 돈이 많고 정치적 자원이 많은 정당입니다. 둘째는 명성이 드높은 축구클럽입니다. 이런 클럽은 잘하는 선수들일수록 한번쯤 뛰기를 소망하는 꿈의 클럽이 됩니다. 정당으로 치자면 역사와 전통이 있고 그에 따라 많은 정치적 유망주들이 들어가기를 소망하는 상징성을 가진 정당입니다. 


 셋째는 유스 시스템을 잘 갖춘 축구클럽입니다. 돈이 많지 않고 역사와 전통이 깊지 않아도 꼼꼼한 육성체계를 통해서 유망주들을 발굴하고 자기 팀의 선수로 길러낼 수 있는 클럽은 실력이 있는 클럽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 정당이 현재 돈이 많은 정당도, 정치적 유망주들이 앞 다투어 몰려드는 상징성도 갖추지 못했다면 지금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다음 세대를 책임질 청년정치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기성세대의 정치언어로는 해결되지 않는 이 시대의 문제에 도전하는 정당으로서 가야할 길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논지로 저는 청년할당에 찬성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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