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김선기(민주적 사회주의자 기획국원)
코로나19는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고 있다. 정치, 시민 참여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 평소 둘러싸여서 살다가, 연구 목적으로 그렇지 않은 청년들을 갑작스럽게 마주하게 된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전염병으로 매장에 손님이 줄면서 권고사직 형태로 혹은 시용 기간에 사실상 해고를 당한 청년들은 그들 스스로 이 상황에 개입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정부에서 지원금이 나오게 되면 신청해서 받는 정도에는 관심 있는 생활인이지만, 위기 상황에서 건물 임대료는 꿈쩍하지 않고 노동자만 먼저 해고되는 현실을 바꿀 수 있다거나 혹은 국가에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지는 않는 식이다. 그들이 당장 아르바이트 자리를 잃었다는 사실 외에도 그들이 권리의 주체인 시민이 되는 방식이 스스로의 각성이나 요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정책의 호명을 받아 수혜자가 됨으로써만 가능해지고 있는 이 상황이야말로 백날 ‘시민 없는 시민사회의 문제’를 고민하는 시민사회 내지는 정치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시기 ‘우리들’―나는 이 말에 행정 관료와 정치인, 언론, 전문가를 비롯해 정치적, 사회적 사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소수의 시민들을 포괄하고자 한다.―의 영역에서 나온 요구와 담론은 주로 민생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가 이러이러한 것들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몰려 있었다. 이러한 언어는 부지불식간에 행위의 주체를 ‘그들’―이 표현은 어렵지 않게 상상되는 수동적 대중의 이미지를 지시하려고 의도적으로 사용한다.―에게서 슬그머니 ‘그들’을 대변하는 ‘우리들’로 옮겨 놓는다. 우리들이 주체로서 행위하는 무대에서 그들은 다소간 정치적 행위성을 박탈당한 상태로 구성되기도 한다. 지자체가 경쟁적으로 민생 대책을 내놓을 때, 정당이나 시민사회를 통해 갖가지 방향성에 대한 담론이 제안될 때, 역설적으로 이같은 정책이나 공약 따위에 반응하여 지지하거나 지지를 철회할 일종의 종속변수 혹은 매개변수 자리에 ‘그들’이 배치된다. 나는 정치적 행위자인 ‘우리들’의 담론이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주체성의 가능성을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 ‘우리들’ 담론의 한계에 대해 께름칙함을 느끼게 됐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정의당에서도 21대 총선에서 가장 큰 화두 중 하나였으며, 지난 십 년 정도 주요 선거 때마다 화두가 되었던 ‘청년 전략’이 무슨 상상에 발 딛고 있었던 것인지 말이다. 지금껏 존재했던 청년 전략은 크게 서로 연결된 두 갈래의 전략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청년 유권자 포섭 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청년 후보자 전략’이다. 전자는 젊은 유권자는 민주·진보 진영에 유리하다는 정략적 판단 아래 투표를 독려하는 수준 혹은 ‘20대 남성’과 같은 구성된 정체성에 호소하는 방식 정도로 행해져 왔다. 후자는 젊은 후보를 내세워 ‘변화’ 내지는 ‘혁신’의 이미지를 가져감으로써 뭔가 이득을 보고자 하는 전략이었다고 여겨진다. 양쪽 어디에도 ‘그들’의 잠재적인 주체성을 현실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 프로젝트는 없다. ‘그들’은 활동하기보다는 수동적인 존재고, 자극을 일으키기보다는 반응하는 존재로 이미 전제되어 있다. 어쩌면 청년들은 대부분 탈정치화·개인화된 ‘무개념’이라고 보면서, 그렇지 않은 몇몇 청년만 ‘개념 청년’으로 보고 ‘밀어주는 척 해보는’ 이분법이 청년 전략을 반쪽짜리로 만들어 반복적으로 실패하게 하는 데 큰 힘을 보태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처음의 사례로 돌아가,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행위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저 청년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들’은 조금 쉽게 ‘탈정치화된 청년’과 같은 이미지에 기대어, ‘그들’이 ‘우리들’과 동등한 시민으로서 정치참여를 할 수 있다는 잠재력을 조급히 삭제해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말이다. 이것은 마치 직원을 믿지 못해서 혼자 일을 다 처리하려고 하는 리더가 범하는 우처럼, ‘그들’과 나눠서 질 수 있고 그래야 마땅한 책임을 소수의 ‘우리들’에게 집중시키면서 우리의 어깨를 과도하게 무겁게 하기도 한다.
정치적 행위자가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유형의 시민 혹은 ‘대중’을 만날 때는 나 역시 사실 어떤 선입견이 있다. 내가 하는 질문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섣부른 걱정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점이 내가 (질적 연구를 하는) 연구자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하는데, 확실히 거의 모든 인터뷰 상황에서 연구참여자들은 평소 일상에서는 할 기회가 없는 속 이야기들을 말로 풀어낼 수 있고 또 들어주는 사람이 있고, 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 자체에 대한 만족감을 표하곤 한다. 또 다른 사례로, 청년정책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시민참여기구에 적당한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활동할 의사가 있는지 묻는 설문조사를 진행하면 꼭 90%에 육박하는 청년들이 ‘참여하겠다’고 답한다. 나는 이러한 근거들을 통해 희미하지만 확실하게, ‘그들’로 여겨지는 청년(뿐만 아니라 시민 모두)들이 ‘우리들’과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한다. ‘그들’에게는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능력이 없다거나 혹은 그런 의지가 없다고 보는 ‘우리들’ 안의 미묘한 경계선들이 먼저 부서져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지난해 조국 사태를 통해 우리가 함께 확인한 사실은 사람들이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무언가에 대해 구조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배정된 혹은 우연하게 찾아온 기회의 결과라기보다는 노력과 능력의 결과로 이해하려 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인간적인 욕망이 사실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연결된다는 것이었다. 스스로 특권층은 아니라고 느끼는 우리들은 학벌, 글로벌 경험, 부동산, 직업 등과 관련해서 분노하며 성찰적인 담론들을 생산하기도 했다. 나는 이러한 방식으로 성찰되는 영역에 정치적, 사회적 참여라는 부분까지 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때 ‘우리들’은 이미 그 참여의 역량을 갖춘 것으로 스스로 이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역량이나 정체성 자체가 능력이 아니라 특권일 수 있다는 점을 성찰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더 많은 사람을 지지자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우리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우리들’의 역량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리들’과 ‘그들’의 경계를 넘어 너르게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연대감을 만드는 것, 즉 더 많은 시민이 단순히 우리를 지지하거나 지지하지 않을 수 있는 단순 유권자에 머무르지 않게 하는 것, 그들을 우리와 운명을 같이 하고 함께 책임을 나누는 동료로 만드는 과정을 견뎌내야만 가능한 일이다.
최근 알게 된 것은 정의당이 참 가입하기 쉽지 않은, 진입 장벽이 높은 정당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일정 부분 정의당이 아직까지도 ‘소수’라는 측면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최근 박예휘 부대표는 지역구 청년 후보자가 받게 되는 시선이 어느 당 후보로 나왔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을 지적했다. 정의당을 비롯한 소수정당 청년 후보들은 당연히 능력을 검증받았다거나, 당선되기 위해서 나왔다고 받아들여지기보다는 경험 삼아 나온 청년으로 보는 시선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는 생활인으로 살아가고 있을 일반 당원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회사에서 누군가가 더불어민주당 당원으로 알려진다면 기껏 ‘정치에 관심 많은 친구’ 정도 되고 말겠지만, 누군가가 정의당 당원인 것이 알려진다면...? (여기까지만 쓰겠다.)
하지만 그저 정의당이 소수라서가 진입장벽의 전부라고 보기는 어렵다. 선거 때마다 정의당을 찍는 유권자에게까지도 당원 가입을 망설이게 하는 ‘보이지 않는 벽’들이 존재한다. 일단 최소당비가 월 만 원이나 된다. 시민단체 CMS가 몇 개씩 가입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장벽이 되지 않는 금액이지만, ‘우리들’이 ‘그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다수는 이러한 지출에 대해 일단은 매우 보수적이다. 정치와 정당활동은 완전히 경험재이기 때문에 일단 당원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프로그램을 통해 점차 동료가 되어 후원금을 늘릴 수 있도록 하는 ‘전략’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조금 다른 얘기를 보태자면, 나는 권리당원 최소당비를 인하하면 당의 결정에 불만이 있을 때마다 ‘내가 낸 당비’ 타령하며 으스대기가 어려워지는 효과도 있을 거라고 본다.)
가장 중요한 진입장벽은 다름 아닌 ‘느낌적인 느낌’이라고 본다. 정의당에 투표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저기서 당원으로 함께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그 ‘느낌적인 느낌’ 말이다. 당원이 많지 않다는 것은, 사실상 정의당이 다양성을 지향하고 보장하려는 정책 방향을 표방하는 것과 별개로, 당 내부를 매우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인지하도록 만든다. 예컨대,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시민사회 경험 등이 있는 ‘그들’ 편에서의 ‘그들’, 즉 ‘우리들’에게만 열려 있는 공간처럼 지각될 수 있다. 연장선상에서 농담 조금 보태 얘기하면, 또 정의당 당원들은 유식하다(혹은 그런 척 한다)는 느낌을 풍기는데 이것 또한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진입장벽이 된다.
사회운동이 쇠퇴하면서 혹은 특히 현 86세대의 자기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는 ‘학생운동’이 쇠퇴하면서 평범한 시민들이 정치적 행위자가 될 수 있는 구조적이면서도 우연한 기회를 만날 수 있는 확률이 상당히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가끔은 그 시기에 태어나 대학을 다녔다는 위치성 덕분에 시위 한 두 번 나간 사람들까지도, 자신들은 민주화를 이루었는데 지금 청년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느니 그런 말을 쉽게 할 때 정신이 아득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지점에서 “바보들이나 비평의 쇠퇴를 애석해 한다”는 벤야민(<일방통행로>, ‘세놓음’)의 문장이 왠지 떠오른다. 비평, 혹은 학생운동, 사회운동의 쇠퇴를 애석해만 하는 여유 혹은 자의식은 사치에 가깝다. 조직화된 사회운동이 상당히 약해지고 있지만,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다른 꿈틀거림이 있다. 이를테면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우후죽순 조직되어 세를 불리고 있는 ‘청년 참여기구’가 있다. 혹은 시민사회와 같은 직접-매개적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라인 커뮤니티, 유튜브와 같은 어떤 간접-매개적 방식을 통해서 새롭게 잠재적으로 정치화되고 있는 주체들이 존재한다. 나는 ‘그들’이 정의당과 같은 진보정당과 연결되지 못하는 상황이 필연적인 게 아니라고 본다. ‘그들’과 ‘우리들’ 사이의 연결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할 텐데, ‘그들’을 ‘그들’의 상태에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결합하는 고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정의당은 물론 우리가 ‘애석해 하는’ 사회운동의 재활성화에도 도움을 줄 것이라고 본다. ‘그들’이 들어오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정체성이 약해지거나 위협받을까? 혹은 ‘그들’이 사실 ‘우리들’과 달리 충분히 진보적이지 않은 사람들일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대중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대중정치를 할 수 없고, 21대 총선 결과를 받아든 정의당에는 별로 잃을 것이 많지 않아 보인다.
21대 총선에서 정의당은 270만 표를 받았다. 비례대표 경선 기준으로 정의당의 권리당원은 3만 6천여 명으로 이를 비교하면 1.33% 수준이다. 일반당원이 5만여 명이라고 하니 권리당원의 비중이 높다고는 하지만, ‘정의당’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정말 적다는 얘기다. 단순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더불어민주당은 930만 표를 받았다. 비슷한 시기 비례연합정당 참여 전당원투표 기준으로 권리당원은 79만여 명으로 8.49% 수준, 일반당원을 포함하면 2019년 말 기준 406만여 명으로 43.66% 수준까지 올라간다. 이 비율의 차이가 바로 지금 정의당이 직면한 문제이자, 역으로 기회와 잠재력의 근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