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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정 May 31. 2023

정자씨와 성호씨

가족의 역사

"엄마가 꾼 태몽은 배경이 늘 송면 외할머니 집이었어. 첫 번째 꿈은 예쁜 호랑이 한 마리가 삽짝 안으로 들어왔는데 줄무늬가 아주 선명했어. 두 번째 꿈은 집 옆 텃밭에서 푸르고 싱싱한 풋고추를 따는 꿈이었어. 초록색 고추면 딸이고, 빨간색 고추면 아들이래. 세 번째 꿈은 아빠가 꿨어. 아빠한테 들은 꿈 이야기가 아직도 생생해. 그 꿈에서 아빠가 삼을 발견했대. 조심스럽게 삼 주변에 흙을 걷어내니까 그 안에 뿌리가 엄청나게 컸대. 아빠가 그걸 캐서 안고 “심 봤다!”을 외쳤더니 삼이 구렁이로 변했대.”  


정자씨의 이야기다. 정자씨는 능선이 고운 산들로 둘러싸인 마을에 자박자박 개울가 옆 밤나무집 막내딸로 태어났다. 정자 씨는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성호씨는 사랑이 서툰 집 장남으로 태어나 스스로 하나씩 성취해 가며 자랐다. 정자씨가 넉넉하고 낙천적인 마음을 가지 덕인이라면, 성호씨의 목표 지향적이고, 치밀한 전략가였다. 생김새에 성품이 새겨져 있기라도 하듯 그들의 생김새가 그러했다. 성호씨는 구릿빛 피부에  눈매가 선명하고, 콧대가 높고 단단했다. 입술은 도톰했다. 반면, 정자씨는 피부가 하얗고 눈, 코, 입 반듯했다. 미인이기도 했지만, 선하다는 인상을 더 강하게 외모였다. 27살의 성호씨는 24살의 정자씨에게 한눈에 반해 열렬한 구애를 했고,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성호씨는 가정의 기틀을 다졌고, 정자씨는 관계의 풍성함과 나눔으로 가정 안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너희 엄마가 부유한 남자와 결혼과 결혼했더라면 더 많이 베풀고 더 널리 덕을 쌓으며 살았을 텐데…” 언젠가 한 번 성호씨가 말했다. 정말 그랬을 것이다. 타인의 사정을 살피는 사람, 헤아리고 채워주는 사람, 정자씨는 그런 사람이었다. 시골에 계신 성호씨의 부모님을 대신해 어린 시동생들 돌보았던 오육 년의 시간을 회상할 때도 그랬다. 신혼시절을 빼앗긴 것에 대해 한탄을 할 법도 한데, 시동생들에게 더 잘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아쉬워했다. 정자씨의 베푸는 마음이 정당한 평가를 받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꼼꼼하고 우선순위가 분명한 성호씨와 때때로 다투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자녀들로부터는 ‘오지라퍼’라는 은근히 놀림도 받았다. 그런 긴장감에 단련된 중년기 이후의 정자씨는 ‘왼손 모르게’ 베푸는 기술을 습득하는 경지에 이른다.  “엄마는 말이야. 하나님에게 ‘나눔의 은사’를 받은 것 같아.” 어느 날 밥상을 물리고 딸과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던 정자씨는 말했다. 뜨거운 커피에서 퍼지는 과일향처럼 은은하고 조용한 목소리가 분명하게 울렸다. 


그렇다면 성호씨는? 그는 정자씨와의 상대적 비교로 인해 늘 ‘인색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꿋꿋하게,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며 가정의 안정을 이루어 갔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본성이었을까? 정자씨와 성호씨는 성호씨가 예순 을 앞두고 미국에서 일 년을 보냈다. 출산을 앞둔 딸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은 달랐다. 소박한 의식주에도 늘 감사했고, 배우는 일에 오랜 갈증을 느꼈던 사람처럼 도서관을 드나들었으며, 그것으로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해했다. 더불어, 사람을 사귀는 일에도, 나누는 일에도 막힘이 없었다. ‘장남’, ‘가장’의 무게에서 벗어난 그는 가벼웠고 여유로웠다. 


두 사람은 가정을 이루어 세명의 아이를 얻었다. 첫 딸은 생김새도 성격도 성호씨를 닮았고, 둘째 딸은 생김새도 성격도 정자씨를 닮았다. 막내아들은 생김새와 성격 모두 두 사람을 고루 닮았다. 세 아이들은 각기 짝을 이루어 그들을 고루 닮은 아이들을 낳았다.  


태중의 아이까지 13명, 정자씨와 성호씨는 오늘 그들과 커다란 테이블 앞에 둘러앉는다. 이야기 꽃이 핀다. 곡절이나 근심이 없는 인생은 없다. 하지만 성호씨와 정자씨,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관통해 온 시간들은 오늘 꽃이 되어 피어난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다복하다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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