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자 배우가 현시대에 보내는 편지
*스포주의*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볼 예정이 있으신 분들은 스포주의...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한 가지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당신은 이 모든 걸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 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 마지막 회 내레이션 中
얼마 전, 백상 예술대상에서 TV부문 대상을 받으신 김혜자 배우님의 수상소감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 김혜자 배우님의 수상소감을 들으면서 많은 이들이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고 위로를 받았다. 그 순간,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나이에 서있는 ‘김혜자’라는 한 인간과, 수 십 년간 정말 다양한 배역을 맡아온 ‘김혜자’라는 한 배우와,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치매에 걸린 노인을 연기한 ‘김혜자’라는 배역이 한데 섞여 보였다. 대상을 받기 위해 무대에 오른 김혜자는 현시대가 ‘위로가 필요한 시대’라며 직접 적어온 꼬깃꼬깃한 종이를 펴서 위의 내레이션을 수상소감으로 대체하였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정주행하고 마지막화를 보면서 오열했던 나로서는 다시금 드라마의 여운에 젖을 수 있는 특별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나의 마음에 박힌 단어는 ‘위로가 필요한 시대’였다. 내가 살아온 날의 곱절은 더 넘게 살아오신 그녀의 눈에 지금의 시대가 어떠하길래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내레이션을 찬찬히 읽어나가는 그녀의 눈빛과 그녀의 목소리에서 나는 이것이 그녀의 진심임을 느낄 수 있었다. 진심으로 자신의 조그마한 위로가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이 되었으면 하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바람이었다.
삶은 언제나 눈이 부실 수 없다. 눈이 부시기 위해서는 그 주위가 어두워야 한다. 더 밝게 부실 수록 그 주위는 더욱 어두워야 한다. 하루는 여기가 눈이 부실 수도 있고 내일은 다른 곳이 눈이 부실 수도 있다. 어떤 곳은 황홀할 정도로 반짝반짝 빛날 수도 있고, 어떤 곳은 스산할 정도로 어둠이 가득할 수도 있다. 빛남과 어둠은 필연적인 관계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고 서로가 있지 않으면 자신이 존재할 수 없는 관계.
어쩌면 지금 우리의 시대가 슬픈 이유는 눈이 부신 것에만 집착하기 때문이 아닐까. 당장 ‘인스타그램’만 들어가 보아도 모두가 자신의 눈부신 순간들을 포스팅하고 있다. 그곳에는 눈부신 순간들만 있다. 마치 그것이 이 모든 세상인 양 보이는 착각과 환각까지 일으킨다. 인스타그램 속 빛나는 순간들에 자신의 어둠이 끼어들 장소는 없다. 그 어둠은 전시될 수 없고 내보일 수 없으며 절대 나의 집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눈이 부시지 않을 때 사람과의 교류를 끊어버리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취업 준비에 계속 실패하고, 공무원 시험에 계속 떨어지고, 겨우 들어갔던 직장과 맞지 않아 이직 준비를 하거나, 평생 영원할 것 같았던 배우자와 이혼을 하거나… 남들이 생각하는 ‘빛나는 순간’에 대한 기준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면 한없이 우울해지고 사람들과 교류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 연락망이 편리하고 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는 시대인데 말이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말하고자 하는 ‘눈이 부신 순간’들은 정말 사소하고도 작은 순간들이다. 위의 내레이션에서도 언급했듯이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이런 순간들조차 우리 인생에서 눈이 부신 순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사소한 순간들만이라도 온전히 즐길 수 있다면, 그래도 우리 인생은 충분히 살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