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만에 돌아온 대마도(쓰시마) 여행기
대마도를 다시 방문할 계획을 세울 때만 해도 곧바로 브런치에 글을 쓸 생각이었다. 어쩌면 항구가 보이는 방향으로 창문이 난 방을 잡고 배에서 사람들이 내리는 것을 구경하면서 글을 쓰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친구 탓을 하는 건 아니지만) 동행을 했던 친구 임군을 내버려두고 글만 쓸 순 없었기에 결국 지켜진 것은 항구가 보이는 방을 잡은 것 뿐이고, 여행기를 쓰기 시작한 지금은 대마도에 다녀온 지도 한달이 지나버린 시점이다. (그래도 이만하면 나름 나의 게으름에 대해 선방했다고 생각한다.) 임군과 술자리에서 처음 대마도 이야기가 나왔을 땐, 대마도 종단 여행을 구상했었다. 지난번에 버스를 타고 히타카츠에서 이즈하라로 내려가는 길이 예뻤다고, 숲이 많아서 걷기도 좋을 것이라 내가 주장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대마도가 큰 섬이었고 그에 비해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적당히 첫날 많이 걷고, 둘쨋날 차를 빌려서 구경을 다니고 마지막날엔 한가로이 면세점 구경이나 하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첫날 장장 네다섯 시간동안 걷기만 한 것도 일종의 첫 큰그림(대마도 도보 종단 여행)에 대한 미련이었다.
이른 점심 대마도에 도착하고선 배에서 여유를 부리며 내리다가 기나긴 입국 심사대 줄을 기다리게 되었다. 히타카츠항은 그리 큰 항구가 아니었지만 부산에서 출발한 배는 거의 만석이었기 때문에 이미 항구를 나왔을 때에는 주변 식당들은 죄다 입구 앞에 웨이팅이 있었다. 항구에서 조금씩 멀어지며 식당을 찾다보니 '친구야(Chinguya)'라고 영어로 적혀있는 가게가 있었다. 주변 식당들보다 테이블이 한적해서 머뭇거렸지만 이러다간 여기도 금세 웨이팅이 생길 것 같아 일단 가게로 들어갔다. 쿠시카츠와 소바를 주문하고 기다렸고, 사장님께서는 식당일 뿐 아니라 전기 자전거 렌탈을 위해 방문한 손님들을 응대하느라 바쁘셨다. 음식을 내어 주시면서 여기 자리가 원래는 햄버거 가게였다는 얘길 해주셨는데, 그제서야 '아 맞다 7년 전에 여기서 자전거를 빌릴까 고민했었지.' 하는 기억이 났다. 그땐 왜 안 빌렸더라? 전기 자전거가 낯설어서?
가게 이름이 그래서 '친구야'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마도하면 떠오르는 것들 중에서 예전에 스펀지에서 "로밍 없이도 대마도에선 한국 휴대전화가 터진다."는 것과 "대마도 사람들은 친구라는 단어를 대마도 사투리로 알고있다."는 것이 머릿속 깊이 박혀있다. 문득 아직도 대마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저 방송들도 거의 20년전이라 이제는 히타카츠항 주변 카페에선 카카오페이도 된다! 왜인지 그 사실이 조금 서글펐다. 아마도 어릴적 꼬박꼬박 챙겨본 스펀지의 기억과 7년 전의 첫 방문 그리고 지금의 모습이 뒤죽박죽이 된 느낌이어서인 듯하다. 그래도 그때나 지금이나 바다는 여전해서 좋다. 매년 연말마다 바다를 찾아다나는 마음도 거기에 있겠지.
친구야를 나와서는 걷기 시작했다. 목표는 나기사노유 온천이 문을 닫기 전에 도착하는 것. 중간에 벨류마트에 들러 장을 봤는데, 밤에 방에서 마실 술과 마른안주 그리고 시메사바를 샀다. 살때는 밤에 술 한잔 할 생각에 신이나서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이게 하루종일 걷는 동안 스스로에게 짐을 지운 격이 되었다. 사케 병은 무겁고 시메사바는 비닐봉투 안에서 기울어져서 국물이 흐르고. 굳이 시키지도 않은 짐까지 임군과 번갈아 들고 온천까지도 가까운 길이 아닌 더 먼 길로 돌아가는 모습이 둘 다 대학원엔 잘 갔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전기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보일 때쯤 다시 히타카츠로 돌아옴을 느꼈다. 온천에는 문이 닫기 전에 도착했으나 아쉽게 해가 진 이후여서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뿌연 수증기가 높은 천장까지 가득 차 있었고 바다 방향의 통유리창엔 어둠이 짙게 깔려있엇다. 탕이 많거나 아주 넓진 않았지만 하루종일 걸은 피로를 풀기에 아주 적절한 공간이었다. 임군에게 짐 드느라 고생했다고 얘길하니 임군은 사케랑 안주도 우리 동행이었지 하고 얘기해주었다. 온천욕을 하고 나와서는 병우유가 다 떨어지고 팩에 든 바나나우유만 남아있었어서 병우유를 먹으려면 내일 다시 와야곘다고 결정했다. 다시 마저 40분 정도를 걸어서 히타카츠항 앞에 잡은 숙소로 돌아갔다. 가는 동안에 쓰시마 산고양이(삵)을 볼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지난번 여행에서는 마지막날 보았지만 사진을 찍진 못했다.) 마지막까지 산고양이는 보지 못했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티비를 틀어놓고 술을 마셨다. 사극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는데 둘 다 일본어는 하지 못했지만 대강의 분위기와 인물들의 행동들로 내용을 유추하면서 토론을 했다. 무엇보다도 '엥 이렇게 빨리 사람들을 죽인다고?'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개가 빠른 사극이었는데 추후에 찾아보니 '필살시리즈'라는 이름의 드라마였다. 사실 내용을 우리가 맞게 유추한 것인지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워낙 시리즈가 많아서 우리가 본 회차를 찾을 수 없었다. 대략 우리가 이해한 대로가 맞겠거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둘쨋날에는 차를 빌려서 토요타마라고 하는 대마도 중부의 마을을 다녀왔다. 지난번 대마도 여행에서 다시 보고싶었던 풍경인 에보시타케 전망대에서 바라본 푸릇푸릇하고 폭신할 것 같은 섬들로 둘러싸인 해안선이라거나 파란 바닷물에 두 다리를 버티고 서 있는 와타즈미 신사의 도리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덤으로 우핸들 차량 운전도 한번쯤 해보고 싶었기에 임군에게 내가 운전을 할 테니 가자고 했다. 결론적으로 에보시타케 전방대에는 올라가긴 했지만 와타즈미 신사는 (반한 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고민끝에 스쳐지나가며 보기로 했다. 물에 잠긴 도리이들을 지나치며 속도를 늦춰 달렸고 오히려 그 장면이 마치 몽환적인 분위기의 지브리 애니메이션으로 들어가는 듯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여행기를 쓰는 시점으로부터 며칠 전에도 꿈에 그 장면이 나왔다. 훨씬 더 영화스럽게 각색된 채로, 신사 주변 숲에는 사슴들이 살고 있었고 신사 앞 바다에는 듀공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꿈 속에서는 사진처럼 도로변에 신사가 있는 것이 아닌, 한참을 숲을 헤맨 뒤에야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그곳을 발견했었다.
토요타마에 오면 7년전에 방문했던 중식집을 가려고 했었다. 그 때 먹었던 텐진동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었기 때문인데 가게 이름이 기억이 나질 않아 과거에 내가 썼던 브런치 글들 다시 들어가서야 가게 입구에 적힌 한자를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찾아간 토요타마 한텐은 그날 휴무였고, 다시 차를 돌려 근처에 식당들을 찾아다녔으나 문을 연 곳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가게 주인분이 오늘은 휴무라며 도시락 가게가 하나 열었을 것이라 말씀해 주셨다. (보통 이렇게 먹을 복이 없는 여행은 드물었는데) 찾아간 그 도시락 가게 마저도 (심지어 처음 갔었던 중식당 맞은편이었다.) 휴가를 갔었다. 우린 결국 마트 도시락을 사서 문닫은 중식당 주차장에서 점심을 해결했으나, 이 작은 한적한 마을에 임군은 벌써 정이 든 것 같다고 했다. 나도 동감하는 바였다.
그날은 조금 일찍 히타카츠로 돌아와서 해지기 전에 나기사노유 온천에 몸을 담갔다. 탁 트인 바다뷰가 있었다고 기억했는데, 바다보단 온천 앞 마당과 하늘이 더 많이 보이는 전망이었다. 동절기에는 노천탕이 닫혀있어서 여름에 한번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찬 공기에 따뜻한 온천욕을 해야 하는데...)
마지막 저녁을 먹으면서 다른 사람들은 이곳을 어떻게 여행하는지 궁금해졌다. 부산에서 출발할 때 패키지 상품으로 온 승객들이 많았기에 패키지 일정을 찾아보았다. 패키지 일정은 히타카츠에 도착하자마자 남쪽 이즈하라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면세점에는 사람들이 붐볐으나 이른 점심을 먹고 돌아왔을 땐 배 시간이 지났는지 나와 임군 외에는 손님이 없었다. 면세점 입구에는 '일본어 못해도 가능, 알바 구인'이라는 전단이 붙어있었다. 나와 임군은 해산물만 너무 많이 먹은 탓이었는지 그날 점심으로 경양식집을 갔다. 여전히 항구 주변의 식당가는 항구에서 가까운 순서로 줄이 늘어났다 사라졌다. 부산으로 돌아가는 배 시간이 남아서 항구 주변을 한참이나 왔다갔다 했다. 끝끝내 어딘가 도착하지 못하고 돌아다니기만 했던, 2023년의 마지막날이었다.
부산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대마도에 백패킹을 온 분들을 보았다. 누가 뭐라 한것도 아닌데, 역시 도보 종단여행을 언젠가는 해야할까 생각했다.
브런치에 여행기를 쓰는게 너무나 오랜만이라 어색하면 어쩌나, 예전만큼의 글이 안나오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는데, 늘 그렇듯 나는 하기 전에 쓸데 없는 걱정이 너무 많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물론, 여행기를 다시 쓰는게 어색해서 이걸 시간 순서대로 써야하나, 어디까지 생략해도 되나, 매끼 먹은 메뉴를 나열하지 않아도 되나 고민하며 쓰긴 했다. 예전에 내가 쓴 여행기를 읽는 게 남이 쓴 글마냥 색다르게 느껴지긴 했다.
그래도 브런치 사이트 구조가 그대로여서 반가웠고 이전에 남겨둔 내 글들 (미완인 것까지도)도 반가웠다.
무엇보다 근래 공모전이나 합평회에 낼 글들을 쓰면서 글쓰기에 부담을 어느정도 느꼈던 것도 사실인데, 이번 여행기는 쓰다가 막혀도 "뭐, 평가받는 것도 아닌데 일단 쓰자"는 마음으로 밀어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2023년에 쌓아둔 여행들은 많으니 2024년은 쏟아낼 일만 남은 것 같기도.